내려오는 모습
루이즈 글릭 지음, 정은귀 옮김 / 시공사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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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즈 글릭(1943-2023.10) 그녀의 수사는 꾸밈없는 꾸밈으로,

수수하면서도 덤덤하게 다가오는 시와 심상의 색채에 비해 화려한듯한 타이틀로 먼저 만났습니다.

미국 현대 문학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면서 24년 만의 여성 노벨 문학상 수상자, 그리고 퓰리처상

거기에 국내 시인들의 찬사와 번역으로 실린 일부의 시들은 명성보다도 먼저 만날 수 있어 왔는데

그 이름만을 알고 있던 여류 시인 루이스 글룩을 이 겨울에 드디어 봅니다.

아직, 야생 붓꽃<1993년 시집 The Wild Lris>도 접하지 못해서 최대한 많이 그녀의 시를 알고자 <내려오는 길>, <아라라트 산> 2 권의 시집을 한 번에 읽었네요.

먼저 읽은 <내려오는 길>은 첫 시의 강한 여운으로 몇 날 며칠을 펼치고 또 펼쳐 생각하고 또다시 읽게 되는 힘이 있습니다,

그녀의 시는 맑고 청량한 낮에도 깊은 밤에도 시간 상관없이 읽기 좋겠지만

제목으로만은 짐작할 수 없었던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이었는지 오래 생각해 보게 되었는데요,

시들을 읽고 나면 왜 그 '모습'에 주목하는지,

'현상'이나 '형상'의 묘사가 여러 장면을 오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장면을 슬로우 화면으로 찬찬히 그려

마치 명화를 보며 생각에 잠기는 것과 비슷한 느낌을 주었고

우리가 다 같이 바라보는 사건, 그러니까 일상과 삶에서 오는 인간 성찰의 결이 속속 깃들어 있습니다.

그녀의 문체는 아름다움을 묘사하는 데에 쓰이는 것이 아니라

'묘사하는 모습'이 아름다운 것이라 느껴지는데 그 이유가 여기에 있는가 합니다.

첫 장부터 오해 없이 편견 없이 시를 마주하기는 생각보다 어려웠는데

오명이 생기는 사회도, 그 조차 감안했을 시인의 마음도, 책을 덮을 때에 이르러서는 어쩐지 두 쪽의 마음이 다 이해가 되더군요.

필자는 평소 수없이 많은 아름답고 유명한 시 등이 있음에도

이조차 식상해져 고전을 다시 찾아 읽고 있었는데 동시대 시인에게서만 느낄 수 있는 감상들이, 새삼 인상적이었습니다.

시집 <내려오는 모습>에서 타이틀 시도 좋았지만

필자는 가장 앞 장의 '익사한 아이들'이 오래 마음에 남아 마음에 걸리었네요.

가 없는 물속에서 길을 잃은 아이들.

물의 품 속에서 꿈으로 떠났을 아이들.

문득 천안함 생각이 났고,

한국인들이라면 그들을, 그 아이들을, 그리고 아이들을 보낸 부모들의 찢어지는 가슴의 떨림을 다 함께 흐느껴왔기 때문에.

많은 장면들이 겹쳐지면서 불쑥 눈시울이 뜨거워지더군요.

익사한 아이들

The Drowned Children

보세요. 그 애들은 판단력이 없어요.

그러니 물에 빠져 죽는 거, 당연한 일인지도,

우선 얼음이 아이들을 끌어들이고,

그다음, 겨울 내내, 아이들 털목도리가

가라앉는 아이들 뒤에 떠다니고,

그러다 아이들이 조용해지네요.

그리고 연못은 겹겹의 어두운 팔로 아이들을 들어 올리네요.

죽음은 아이들에게 다르게 와야 하는데,

시작만큼이나 말이지요.

아이들은 늘 눈이 멀어 있었고

둥둥 떠다녔던 것 같아요. 그러니

나머지는 다 꿈으로 온 것 같아요, 그 램프도,

테이블과 아이들 몸을 덮었던

그 근사한 하얀 천도.

그래도 아이들은 자기 이름을 듣네요,

연못 위로 미끄러지는 유혹처럼;

뭘 기다리고 있는 거니,

집으로 와, 집으로 와, 시퍼런

가없는 물속에서 길을 잃었네.

<내려오는 모습> 루이즈 글록

시로 묘사할 수 있는 것이 딱, 정해진 것은 아니겠지만 쉬이 다루지는 못하는 '죽음'이라는 주제는

인간 모두의 삶에 있음에도 동시에 직접 겪은 후에는 쓸 수 없는 영역, 글쓴이는 이 갈래에 담담하게 서서 안과 밖을 넘나들며

아이도, 어른도, 그 공기도 풍경도 되었다가 궁극적인 성찰의 순간을 보여주며 제가 가진 편견마저 깨워 주네요.

하나 덤덤한 마음.

솟구쳐 글로 울음 짓지 않아도

상실에 깊이 동감하고

죽음이라는 것을

그저 불행으로만 여기지 않으려는 성찰의 마음과 꽤 단호한 듯한 글쓴이의 호흡마저 느낄 수 있습니다.

덤덤함을 떠올리니 오래전 마음에 묻은 아버님의 일이 떠올랐는데요,

빈소에서 나를 에워싼 주위의 사람들은 ' 정도 없다', '독하다'라며 욕 아닌 욕을 했지마는

너무 시린 가슴은 저밈에서 빠져나올 틈이 없어

오히려 단 한 방울의 눈물도 나지 않더라고요.

그래서인 시에서 느껴지는 이 덤덤함은 먹먹함에서 태어난 그녀만의 시적 아이는 아닌가 생각되었습니다.

분명, 당사자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인간의 아름다운 생의 소멸의 순간에

그 볼을 타고 내려가는 눈물에 담긴 의미가

꼭 슬픔만은 아니도록,

다시금 상기하고 기리고 그려보며,

비통하게 남겨진 사람들의 등을 쓰다듬어 줄 마음 꼭 다시 움켜쥐기를.

그녀는 바라고 바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오래전부터 말해오던

'가슴속에 묻는다'라는 다소 진부한 이 표현이

저마다의 이유로 떠나는 모습, 지켜보는 마음으로

그보다 나은 표현이 또 없음은 아니었을지.

책<내려오는 모습>에는 '아이'도 자주 등장하고, '어린' 아이라는 수식도 꽤 있는데

영원히 어른이 되지 않는 어떤 마음마저 느껴지는 대목이 아닌가 합니다.

아이들을 통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자신의 아이 시절을 투영하는 어떤 것이라고 말이죠.

그중 '귀환'의 일부를 보면,

... 중략

그 아이 눈이 내 눈과 비슷했어,

비통하고 맑았지; 내가

그 아일 불렀지; 내가 그 애한테 말했어

우리의 언어로,

....

<내려오는 모습>

비통하고 맑은 눈은 나의 눈이지만, 아이의 눈이기도 한 것이죠.

그녀의 시 속 활자들처럼 땅속에서 솟아오른 숲과도 같은 그녀의 시들.

오랜 성찰이 녹아 있는 시들 사이에서

우리 모두 내가 품고 있는 나만의 아이의 눈으로

깊은 밤에는 침통할지 모르겠지만 어쩐지 이른 아침, 빛나는 낮에 오히려 좋을 시집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차가운 밤도 어두운 그늘도 빛과 낮이 있어 있기에

삶의 반대편, 누구나 뽐내려고만 하는 식상함에서 벗어나고 싶은 우리들.

낯선 죽음, 그러나 그러기엔 또 너무 익숙한 그리움을 느끼고 싶은 분들께 추천합니다.

그리고 지난 10월 또 하나의 꿈으로 떠난 그녀 평안하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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