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담한 사이즈와 읽기 쉬울 것 같은 편집(대중적으로 씌여졌음에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순전히 나의 어리석음 때문이다.) 때문에 서점에 가면 늘 현암사의 시리즈들을 훑어 봤던 기억이 난다. 물론 그 중에 읽은 것은 두세권에 불과하지만. 주말에 술먹고 하루 신세를 진 친구 방 한 구석에 그 현암사의 도덕경이 꽂혀 있었다. 빨간 책들 사이에 외롭게 있는 것같아 기왕 진 신세라는 생각에 '안 읽으면' 달라고 했다. 선듯 내주는 친구. 고마운 친구^^. 긴 휴가를 맞아 다시금 읽어 봤다. 대학때, 그리고 사춘기 시절 도가와 관련한 책들을 간혹 읽곤 했었다.(이 책도 서점 한구석에 앉아서 다 읽었었다.) 초탈한 도인들을 사뭇 경외하고 한편으로는 부러워하면서. 다시 읽어 본 도덕경, 정확히는 주석자가 다시 '읽어준' 도덕경은은 예전의 느낌과는 많이 달랐다. 단지 '도를 도라고 하면 도가 아니다'는 '최소한 도는 '도를 도라고 하면 도가 아닌 것'은 일러준다'는 식의 말장난에 가까운 이해를 위한 책읽기는 아니었다. 그것은 첫번째로 주석자가 그 뜻을 우리 삶에서 이해할 수 있도록 쉽게 풀어낸 것에 크게 빚지고 있다는 생각이다. 말을 위한 말, 논쟁을 위한 논쟁이 아니어야 한다는 도덕경의 가르침을 도덕경의 해설에서 부터 실천하고자 노력한 느낌을 받았다. 물론 그만큼 그 참 뜻을 밝히기 위해 이전의 다양한 해석들을 읽고 읽었을 것이리라. 또 그 문구를 언어적 해석이 아닌 자신의 삶에 대입하여 성찰하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을 한다. (물론 지식과 경험이 일천한 나는 도덕경은 물론 해설까지도 짐작할 뿐이지만 말이다.) 두번째는 10여년이라는 세월이 읽기의 깊이를 다르게 해주었다는 생각이다. 그간 얼마나 지혜로워지고 얼마나 지식이 쌓였겠는가. 하지만 그간 부딧친 사람들, 사건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내가 만난 (알지 못했던) 나 자신들. 그런 경험과 혼란들이 다시 읽는 도덕경을 더 깊이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해주었다고 믿는다. 말하는 자는 알지 못하고 아는 자는 말하지 않는다. 언어와 대상과의 인식론적이고 본질적인 간극만을 다루는 것은 아니다는 생각이다. 그것은 대상을 명명하기 위해, (혹은 그렇게 하는 것이 일반적 사고의 관성이거나) 만들어진 이분법적이고 정태적인 언어적 시스템과 그 기반인 인간의 일차원적인 욕망을 우리에게 드러내 보이고자 함이 아닐까? 옛 선인들의 깊은 통찰과 본질에 대한 탐구는 시대를 초월한다. 아마도 그것은 죽어서 쌓여있는 지식이 아니라 살아 있는 직관으로만 파악할 수 있는 인간 본질/자연 그 자체에 대한 것이기 때문일테다. 오랜만에 다시 읽어본 도덕경. 두고 두고 읽어야 겠다는 생각을 했다. 괜한 흥분에 '장자를 읽다'라는 책까지 사버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