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연 조화로운 삶이란 무엇을 말할까? 어떻게 보면 너무나 상대적이고 주관적인 대답이 나올 수 있는 물음이다 하지만 궁극적인 건 인간관계에서의 조화를 생각해야 되지 않을까 사람은 혼자 태어나 혼자 세상을 떠나는 것이지만 인생에 있어 끊임없이 누군가와 얽히게 된다는 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최근에 인생을 살아가는데 있어 절대적으로 필요한 나만의 기준 같은 걸 내리려고 할 때 떠오른 것은 비교하지 않은 삶이다. 남과 비교하지 않을 때 심적으로 보다 자유로울 수 있다. 어떻게 인생을 살 것인가를 고민할 때 내가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찾는 데는 소홀했다. 어떻게 하면 세상에 보여 지는 나라는 존재가 그럴듯하게 보일 수 있을까를 무의식중에 각인 하고 있었다. 이것도 결국 다른 사람들과의 비교에서 비롯된 게 아니였을까

 

 

무엇을 위한 소비인가

 

책을 읽으며 처음에 기대했던 인생의 큰 축을 발견하지는 못했지만 나의 삶에 방식에 참고하거나 시도해 볼 만한 부분들이 많았다. 먼저 소비에 관한 헬렌과 스코트의 견해에 동감되는 부분이 많았다.

현재 도시는 끊임없이 우리에게 소비를 부추기고 있다. 광고, 길거리의 상점들, 구매권유 전화, 우리 주변의 이미 최신품을 소비한 사람에게서도 유혹받는다. 이런 소비 의 부채질에서 초연해 지려고 나름 노력도 해 본다. 하지만 사람들은 내가 무엇을 지니고 있는 지로 나를 판단하려 하고 또 내가 가지고 있는 것들의 상품가치가 얼마인지에 따라 나의 가치 정도를 가늠하려 든다. 소비에서 구속받지 않을 자유를 선택 할 수는 있지만 그에 따른 타인의 불합리한 시선과 대우는 옵션이다. 이런 이유에 소비를 자제하는 인내보다 다른 이들의 시선을 인내하는 게 더 힘들 때가 있다.

하나의 예로 스코트 니어링이 도시에서 허름한 차림으로 강연에 가려고 하자 경비가 그에게 출입을 저지하고 강연자인 그에게 입장료를 받았다. 물론 그는 그의 허름한 행색을 보고 강연자라고 전혀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런 분위기에서 좀 더 자유로울 수 있는 환경은 시골이 최적이기에 왜 스코트 니어링과 헬렌 니어링이 시골에서 조화로운 삶을 찾으려 했는지 충분히 이해된다. 하지만 현재 우리네 시골에서는 조화롭지 못한사람들이 정착인의 삶보다는 잠시 들려가는 개념으로 지어대는 건물들로 인해 조화로운삶을 위해 귀농했던 분들이나 조화롭게살고 있던 토박이 주민들에게 위화감이나 상대적 박탈감을 조성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조화로운 삶을 꿈꾸고자 하는 사람은 계속해서 더욱 깊은 시골로 들어가야 진정 자유로울 수 있을까?

무엇을 먹을 것인가?

 

먹거리에 관한 헬렌과 스콧의 이야기도 나의 관심을 끌었다. 나의 백가지 계획 중에 “1년은 내 손으로 지은 작물만 먹고 산다가 있다. 이것을 계획으로 만들고서도 과연 실행 가능할까 고민을 한 적이 있다. 계획이 아니라 소원에 그치는 건 아닐까 하고 말이다. 하지만 헬렌과 스콧의 자세한 설명들은 꼭 불가능 한 것만은 아니라는 자신감을 갖게끔 한다. 하지만 이 계획을 실행하는데 작물 재배의 어려움 보다 먹고 싶은 것들을 참아야 한다는 초연의 인내심이 더 필요로 할 것 같다. 하지만 헬렌과 스콧은 시골로 이주하고 시작한 삶에서 죽을 때 까지 줄곧 자신들이 재배한 작물만을 먹고 지냈는데 나도 1년 정도는 할 수 있을지 않을까 하는 오만함도 가져본다.

 

채식에 관한 헬렌과 스콧의 견해에도 주의를 기울이게 된다. 사람이 채식에 가까운 동물이라는 것이나, 건강에 채식의 삶이 더욱 훌륭하다는 것. 이것은 스콧이 직접 증명해준 사례가 아닐까 매일 노동해서 자신이 거둔 채식만을 하면서 스콧은 100살 까지 살았다. 본인이의 몸이 더 이상 노동이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느끼고 단식을 함으로써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만약 계속 누군가의 도움으로 작물을 재배하고 채식의 삶을 살았다면 더 오랜 세월을 살았을 것이다.

예전에 채식주의의 식단으로 일주일 가량 시도해 본 적이 있다. 시도하게 된 계기는 니어링 부부의 말처럼 고기를 동물의 시체로서 받아들여서도 단순히 건강을 위해서도 아니다. 동물을 좋아하고 야생의 동물들을 직접 보기 위해 먼 길을 찾아 가기도 했던 내가 그런 유사한 동물들을 먹는다는 것이 이중적으로 느껴졌다. 순하고 귀여운 소들을 보면 너무 예뻐 손들 뻗쳐 만지려 들면서 내 밥상의 쇠고기는 아무렇지도 않게 먹는 게 과연 정상일까? 내가 본건 지만 내 그릇안의 것은 고기다 라고 매번 합리화시키며 하는 식사의 연속이 되어야 할까. 고기를 먹으며 마음에 거리낌이 있다면 결단이 필요하리라. 완벽한 채식은 못되더라도 먹기에 죄책감이 드는 것은 먹지 않는 게 최선이라는 결론에 이른다. 니어링 부부처럼 우유와 달걀 까지 거부하는 건 무리이고 생선까지 허용하는 범위에서 다시 시도 해도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하다 실패하면 또 어떠랴 다시 하면 되지. 작심삼일도 100번하면 300일이다.

채식에 대한 긍정적인 생각은 생명 자체에도 있다. 단지 매끼의 식사를 위해 지금도 어딘가에서 동물이 도살되고 있다면 내가 직접 생명을 해 한건 아니지만 간접적 영향을 준건 사실이리라. 그 간접적 영향에 드는 사람의 수가 많기에 그동안 많은 사람들 속에 나는 극히 작은 존재일 뿐이라며 나를 축소 해 왔다.

 

동물들을 먹이기 위해 쓰는 사료에는 사람들이 먹을 수 있는 몇 십 배의 식량 원자재가 들어간다. 세상 어딘가의 어린 아이들은 굶주리는 데 동물들은 살찌는 아이러니다. 물론 세상의 많은 사람이 채식주의자가 되더라도 그 식량들은 결코 배고픈 아이들에게 돌아가지 않는다는 건 알고 있다. 경제와 정치를 움켜쥐고 있는 세계 3%의 부호들은 남는 식량을 가지고 장난질 해 댈 테니까.

 

 

어떤 집에서 살것인가?

 

니어링 부부는 의복을 제외하고는 먹을 것 뿐 만아니라 자신들이 보금자리도 직접 만들었다 산에 굴러다니는 돌을 하나하나 모으고 그 돌들을 깎기보다는 그 돌 생긴 그대로를 쓰고 기둥이나 지붕에 쓰이는 목재도 모두 자신들이 사는 곳에서 얻어 썼다. 자재는 최대한 니어링 부부의 보금자리에서 가까운 자연에서 얻고 그들은 노동으로 집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집을 짓기 위해서는 특별한 기술이 필요로 하지 않다고 그들은 말한다 하지만 니어링 부부한 최소한의 소비와 검소한 생활을 결심 했기에 가능한 부분들이 아니였을까. 나도 작은 나만의 공간을 만들고 싶다는 충동을 가졌다. 하지만 거주를 위한 목표보다 창고나 작업실 같은 기능으로서의 공간이라면 한 번 시도해 볼만한다.

최근에 집안 청소를 하며 니어링 부부를 다시금 떠올리며 주거 공간이 큰 것이 좋은게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내가 살고 있는 이 작은 집도 가사 노동에 힘이 드는데 저택처럼 큰 곳은 청결을 위해 다른 사람의 노동을 쓰는 게 필수적인 게 될 터이니 말이다. 내가 필요한 일에 돈을 주고 사람을 부리는 게 가끔 미안한 마음이 드는 게 사실이다. 돈으로 사람의 노동을 삼으로써 인간간의 평등한 관계가 깨져가고 있다는 느낌이다

 

노동은 노동으로

 

니어링 부부는 다른 사람들의 노동을 금전으로 지불하는 것에 거부감을 갖고 있었다 그들이 농사일과 수액을 얻는데 빌린 노동은 다른 이웃이 필요한 노동이 있을 때 갚아주는 식으로 일종의 품앗이의 형태를 선호했다. 노동에서 국한하지 않고 어떤 물건이나 장비가 필요 할 때도 물물교환 식이 되기를 바랬다. 노동과 물품에 돈을 메기는 건 결국 인플레이션에 영향을 줄 것이라는 게 그렇게 하는 이유 중 하나다.

실패한 공동체

 

작지만 이상적인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 니어링 부부가 시도한 노력에 박수를 보냈다. 하지만 개인주의적 성향이 강한 미국에서 그것도 개척정신까지 가미된 시골에서 그들이 꿈꾸던 공동체를 일구어 내는 데는 한계가 있었던 것이 어쩜 당연한 결과다. 우리나라처럼 옹기종기 모여 사는 것도 아니고 자신들 만의 땅을 가지고 띄엄띄엄 사는 곳. 집집마다 총기를 소지한 곳. 또 당시는 2차 세계대전, 한국전쟁 등이 있던 시기라 이념적으로도 미국 시골 사람들이 받아들이는데 힘들었을 것이다. 마을 주민들이 그들에게 사회주의자라고 빈정댔던 것도 이상하지 않다.

 

오히려 그가 꿈꾸고 시도했던 이상적 공동체는 요즘의 한국에서 좀 더 실현 가능하지 않았을까. 아니면 이상적 공동체 실현을 위해 뜻이 통하는 사람들과 함께 만들어 가고 토박이 주민이 사는 곳이 아니라 그들이 처음부터 만들어 갈수 있는 곳에서 시작했더라면 다른 모습이지 않았을까. 니어링 부부가 그곳의 주민들을 설득하고 바꾸려고 노력한 건 알지만 그곳 사람들을 바꾸는 건 정말 힘들 일이다. 누구나 살아온 방식이 있기에 섣불리 바꾼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비록 그 모습이 인류애 적으로 바람직하다고 해도 말이다.

 

끝으로

 

<조화로운 삶> 책을 내가 처음 접한 건 거의 10여 년 전이다. 당시에 우리나라에 웰빙 바람일 불었고. 그동안은 열심히 일하고 달리는 데 주력했다면 2000년 대 부터는 더 잘 살고 더 잘 먹는 것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채식, 자연으로 돌아가자 식의 관련 저서도 많이 나오던 때이다. <조화로운 삶>도 거기에 편승한 한권의 책으로 생각 했었다.

그러다 니어링 부부에 더 관심을 가진 건 스코트 니어링과 헬렌 니어링의 독특한 삶의 이력 때문이다 신분이 보장되는 교수직을 버리고 과감히 시골로 갔다(당시 스코트의 사회주의적 성향 때문에 학교에서 내몰린 경향도 있었다). 그리고 시골에서 자급자족과 자연과 조화되는 삶을 살며 세상을 떠날 때 까지 일관된 모습을 보였다. 노동이가능하지 않는 자신을 인식하고 100세에 스스로 단식으로 목숨을 버린 사람. 20살이 넘는 나이 차이를 극복하고 제자로 만났다가 평생의 동반자로 함께 산 헬렌 니어링.

 

<조화로운 삶>은 니어링 부부의 표면적인 것에 시작한 관심 이였지만 책을 다 읽고 많은 것들에 다시금 생각하는 시간을 주었다. <조화로운 삶>이 한때 유행처럼 나타났다 묻혀 버리지 않고 꾸준히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는 건 한 개인의 잘 먹고 잘 사는 것에 머무르지 않고 책의 제목처럼 조화로운 삶에 관해 현대인이 잊고 있던 것을 다시금 깨우쳐 주기 때문은 아닐까. 나 또한 내 식탁위에 반찬을 고민하고 현재 내가 소비하는 패턴이 진정 나를 위함인지 남을 의식해서 비롯된 것인지를 돌아보게 되었다. 그리고 조화로운 삶이 내 이웃들과의 조화 뿐 만 아니라 내 심연의 나라는 존재와 보여 지는 나라는 존재의 조화, 자연과의 조화, 동물들과의 조화를 아우르며 깊게 생각할 시간을 갖게 했다.

 

비록 니어링 부부가 당시에 시도했던 이상적 공동체 실현은 어려웠지만 그들과 유사한 정신과 이념을 가지고 용기 있게 실험하고 도전하는 사람들은 꾸준히 늘고 있다. 지금 월가에서 시작한 시위는 니어링 부부가 말한 조화로운 삶을 거부하는 사람들에 대한 대중의 분노일 것이다. 주변의 더 많은 사람들이 <조화로운 삶>을 읽고 자연, 동물, 내 이웃들과의 조화에 대한 한번 씩 고민해 봤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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