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옥같은 시적 묘사들, 매 세기마다 동시대적인 공감과 흥분을 자아내는 극적인 갈등구조는『햄릿』을 시대를 초월한 걸작으로 사랑받게 만드는 요인이다. 『햄릿』을 폄하하는 목소리도 만만치 않다. "명백히 예술적 실패작"(T.S. 엘리어트)이라거나 "햄릿의 위장된 광증에는 어떠한 합리적 동기도 찾을 수 없다"(사무엘 존슨)는 비판이 바로 그것이다. 작품으로서의 햄릿에 대한 의문과 비판은 주인공 햄릿이라는 캐릭터가 갖고 있는 불가해성 또는 성격적 난해함과 상당 부분 일치하는 것처럼 보인다. 부친이 횡사한 이후 급거 귀국한 햄릿은 숙부에게 왕위를 빼앗긴 처지이다. 유력한 왕위계승권자인 햄릿을 제쳐두고 왕위에 오른 데다 형수를 왕비로 맞이한 숙부 클로어디스에게 조카는 눈에 가시일 것이 뻔하다. 두 사람은 조만간 권력투쟁의 쌍방이 되어 일방을 제거할 수밖에 없는 숙명적인 상황에 처해 있다. 그런데도 햄릿은 숙부와 어머니에게 적의를 드러낼 뿐 구체적으로 어떠한 정치적 행동도 하지 못한다. 게다가 그는 유령이 되어 나타난 아버지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확인한 이후에도 복수를 실행하지 못한다. 그 와중에 미래의 장인이 될 수도 있었던 폴로니어스를 숙부로 오인하여 살해하고 부질없이 영국으로 떠나게 된다. 영국행 배에서 영국왕을 통해 자신을 제거하려는 숙부의 음모를 확인하고 나서 귀국하지만 결국 숙부와 레어트스가 획책한 음모의 희생양이 될 뻔 했다가 극적인 운명의 반전으로 복수에 성공한다. 시종일관 햄릿은 비극적인 운명의 조연인 자신에 대한 번민에 휩싸일 뿐 주체적인 행동을 보여주지 못한다. 얄궃은 운명의 신은 그의 편이 아니었다가도 어느 때는 그의 손을 들어주기도 하는 등 변덕스럽다. 수동적이고 감정적인 햄릿은 이와 같은 상황을 매번 냉정하게 인식하지 못하고 부단한 갈등 속에 휩싸인 채로 또다른 운명의 장난에 몸을 내맡길 뿐이다. 운 좋게 합법적이고 공인된 복수에 성공했지만 그것은 주도면밀한 계획에 의한 것이 아니라 슬픈 운명의 한 장면이었을 뿐이다. 주체적 삶을 개척하지 못하고 숙명에 몸을 내맡기는 햄릿이야말로 삶의 국외자이자 주변인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