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령비행기 - 팝아트 소설가 죠 메노 단편집
죠 메노 지음, 김현섭 옮김 / 늘봄 / 2008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죠 메노의 단편집『유령 비행기』엔 작가의 말대로 “대형 참사에서부터 일상적인 비극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종류의 재난”(9쪽)이 등장한다. 소설의 주인공들은 끊임없이 죽음을 떠올리거나 세계의 종말과도 같은 파국적인 상황에 직면하곤 한다. 그들이 종말론적인 정서에 기대고 있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진정한 비극은 세계대전이나 비행기 충돌, 혹은 블랙홀이 세상을 삼켜버리는 것처럼 일순간에 닥치는 거대한 재난이 아니다. 진정 그들을 위협하는 것은 매일 반복되는 죽음과도 같은, 즉 고통의 연속인 삶 그 자체이다. 요컨대 삶이란 “연속적인 비극”(214쪽)인 것이다.

세계의 종말은 그들에게 중대한 문제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누군가의 개인적인 삶이다. 세계의 종말 따위는 어쩌면 단 한 번의 키스 뒤에 생길 부차적인 에피소드에 불과할 지도 모른다. 

     
우리는 어떤 일이 일어날까 생각한다. 우리가 키스를 한다면, 늘 상상해 왔듯이
      세상이 끝날 수도 있다.
(47쪽)

개인적 삶의 본질은 역설적이게도 개인을 넘어서는 지점에 있다. 그렇기에 무엇보다 주인공들에게 절실한 것은 외부와의 소통이다. 그들이 좌절하게 된 것은 타인과의 소통이 중단되었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형은 극심한 조울증으로 가족과 사회에서 격리된다. 혹은 사랑했던 여인은 이제 그녀가 “왔던 곳으로 돌아(48쪽)”가게 되거나 “이제 나를 바라보지도 않”(같은쪽)게 된다. 청각장애자인 딸은 담요를 덮어쓰고 유령 행세를 하며 학교생활에 부적응한 상태이다. 동물원 사육사의 아내는 그와 어린 딸을 버리고 떠나버렸다. 누군가의 사랑하는 아내는 말을 걸거나 안으려고만 해도 구름으로 변한다. 구체적이지 않은 경우라도 대개는 존재론적 불화를 암시하는 듯한 모습들이다.

애초에는 그들도 서로에게 가장 소중한 존재였었다. 그러나 점차 상대의 눈까풀 아래 흐릿한 잔상이 되고, 이제 아무 것도 아닌 단지 지나버린 추억에 지나지 않게 되어버렸다.

     
월요일이 되자마자 달은 더 이상 빛을 내지 않게 되었다. 한순간 그것
      은 밤하늘에서 가장 중요한 단 하나의 형체였는데, 그 다음에 사라져
      서는 사람들의 눈까풀 아래 불타오르는 흐릿한 잔상이 되고, 그 다음
      에는 그저 하나의 질문, 그저 한 줄기 섬광이 되고, 그 다음에는 아
      무 것도 아닌 것, 단지 추억이 되고 말았다.
      (233쪽)


돌이켜보면 그것은 얼마나 사소한 삶의 균열에서 비롯된 비극인가. 우리는 “얼마나 더 오랜 시간이 흘러야 모든 종류의 어리석”(231쪽)음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존재 사이의 균열을 치유할 수 있다는 확신을 버리지 않는다면 그것도 머지않아 가능한 일은 아닐까.

     
집에 오는 버스 안에서, 존은 다양한 정체불명의 낯선 여자들의 입술에
      대하여 몽상한다. 만일 기회가 주어진다면 그 뜨거운 입술에 대고 무엇
      을 어떻게 할 것인지 상상한다. 버스 통로 너머를 바라보면서 그의 마음
      속에는 질문이 하나 생긴다. "만일 아내를 소유하는 것이 이토록 불가능
      한 것이 아니라면, 그래도 나는 여전히 그녀를 가질 수 있다면, 그래도
      나는 여전히 그녀를 이만큼 열렬히 사랑하고 있을까? 내가 원할 때마다
      그녀를 가질 수 있다면, 그래도 나는 그녀를 원하고 있을까?" 그는 알지
      못한다. 확신이 없다. 갑자기 그는 아닐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아마도
      그녀에게 키스하는 것은 이 세상 모든 권태와 맞먹을 만한 가치가 있을
      것이다.
                                              (138-139쪽)


그런데 개인적 삶은 세계의 종말과 정녕 무관한 것일까. “죽음은 모든 것의 종말이 아니라는 믿음”(147쪽)은 주인공들이 종종 상상하는 삶의 마지막 순간에도 죽지 않고 “어떻게든, 어떻게 해서든 ……… 서 있”을 것이라는 모종의 확신에서 비롯된다. 물론 “이것이 종말이 되기를 바라”(150쪽)긴 하지만 말이다. 그렇다면 죽음 뒤에도 그들을 지탱해주는 것은 무엇일까. 죽음 이후의 그들을 상상하는 것은 가능할까.

      
도시의 소리가 우리 뒤에 있는 낯선 그림자 안에서 속삭이는 것을 생각
       한다면, 우리도 이쯤에 서서 말을 멈춘 채, 손목에서 뛰는 맥박을 셈으
       로써 우리 인생의 순간들을 헤아려 보는 것이 어떨는지. 도시의 소리에
       몰입한 채 그저 기다리는 방법도 있다. 그러다 보면 어느 특정한 순간
       의 소리를 알게 될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이 순간을 정지시킨 채, 죽음
       이후에 과연 우리는 무엇이 될 것인지 생각해볼 수도 있다.
   (166쪽)


※ 죠 메노의 한국어판 서문은 2009년 10월에 쓴 것으로 되어 있다. 아직 당도하지도 않은 미래에 쓰여진 것일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