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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개의 보따리
이종식 지음 / 지식과감성# / 2021년 6월
평점 :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서평입니다.
이종식 장편소설, 지식과감성, 260쪽
제목을 보고 상상했다.
세 개의 비슷한 이야기, 혹은 같은 주제로 풀어낸 세 개의 옴니버스 식의 이야기를 생각하며 첫 장을 넘겼다. 표지를 넘기고 책날개에 쓰여 있는 작가의 한 마디를 읽고 적잖은 감동을 받았다.
혹여 공감이나 동의되지 않으실지라도 다른 세상 구경하는 심정이라도 드릴 수 있기를 바라며……
한 권의 책을 써낸 저자가 독자에게 이리도 낮은 자세의 감사인사를 할 수 있을까 싶었다. 마지막은 말줄임……. 흰색 찻잔에 담긴 맑은 물에 푸른 잉크 한 방울 떨어뜨린 것처럼 보였다. 그렇게 서서히 퍼져나가는 잉크처럼 목차를 살폈다.
6개의 큰 제목, 그 안에 적게는 12개, 많게는 19개의 이야기가 담겨있었다. 모두 93개의 짧은 이야기. 단편소설집도 아니었고 제목을 보고 상상했던 옴니버스 이야기도 아니었다. 궁금증을 가지고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한 여자의 이야기, 귀하게 태어나 곱게 자랐고 지금도 여전히 고울 것 같은 한 여자의 이야기가 담겨있었다. 더없이 평범한, 옆에 서있으면 그 존재조차 알아채지 못할 만큼 평범한 한 사람의 이야기였다. 태어나고 자라고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아주 평범하기에 더없는 공감이 가득 남았다.
짧은 이야기가 아주 호흡 빠르게 이어졌고 93개의 이야기는 각각으로도 하나의 완전한 수필이었다. 그래서 더 편안히 읽을 수 있었다. 아니, 수필보다 조금 더 소중하고 조심스러운 일기처럼 느껴졌다. 속을 전부 보여주지 못하는, 누구에겐가 확인을 받아야 하는 방학숙제 일기처럼 천천히 주인공의 속을 드러내며 이야기는 이어지고 또 이어졌다.
책을 읽는 동안이 너무 편안했다. 짧은 호흡의 이야기들이라 편하게 읽을 수 있었다. 장편소설이지만 짧은 글을 모아 하나의 커다란 흐름으로 이어지는 이야기. 소설보다는 이야기라 부르고 싶다. 하지만 이야기는 이야기로만 이루어지지 않았다. 은유와 비유로 그리고 어떤 부분은 마치 시(詩)처럼 나의 모든 감각을 일깨워주기도 했다.
한 시간쯤 어딘가 사라졌다가 땀과 흙탕물에 흠뻑 젖은 지친 모습으로 돌아온 그들을 정성스레 씻겨 털을 곱게 말리는 작업에 열중하던 오라버니의 모습은 물기 마르지 않은 봄날의 수선화처럼 늘 생생한 그리움으로 남아있다. - P.29
눈으로 읽으며 머릿속에 배경이 그려지고 가슴속에 사람과 행동이 그려졌다. 글은 그림이 되고 그 그림은 짧은 영상이 되어 내 머릿속에서 재생되고 또 다음 장면으로 그대로 흘렀다. 93개의 이야기는 그렇게 내 마음속에서 장편 영화가 되었고 주인공의 대하드라마처럼 그려졌다. 그것이 작가가 이야기를 풀어내는 능력이지 싶었다. 거부감 없이 이야기를 받아들이고 가까운 사람의 감춰져 있던 놀라운 일들을 이야기로 듣는 듯한 착각에 빠지곤 했다. 그리고 이야기는 작가의 삶이었다.
책의 뒷부분에는 주인공이 그림을 마주하는 장면이 나온다. 도대체 어떤 그림인지 궁금해서 화가의 이름으로 검색을 했고 책에서 설명한 그림이 바로 이 그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주인공은 이 그림에서 많은 생각을 얻었는데 그림만 봐서는 큰 감흥이 오거나 하지는 않았다. 잠을 자고 있는 목동 혹은 여행자의 꿈에 세 명의 천사가 찾아와 선물을 건네주는 그림이다. 오르세 미술관은 파리를 여행할 때에 하루를 꼬박 걸려 전시품을 감상했던 적이 있다. 하지만 미술관에는 엄청나게 많은 미술품이 있어 내가 이 그림을 마주했었는지는 기억이 없다.
Pierre Puvis de Chavannes의 le Rêve [출처 : 위키미디어]
마지막 장을 덮었을 때, 내가 숨 쉬고 있고 살아있음에 감사할 수 있었다. 지금이 힘든 사람들, 가족과 사람들 사이의 관계 속에서 힘들어하는 이들에게 조심스럽게 추천해주고 싶은 책이다. 자신의 이야기가 될 수도 혹은 이 이야기를 읽으며 나 자신에게서 한 발자국 떨어져 스스로를 바라볼 수 있는 이야기가 되지 않을까 하는 조심스러운 생각이 든다.
세 개의 보따리가 무엇인지는 여기에서 밝히지 않겠다. 내가 느낀 보따리 세 개가 정답은 아닐 테니 말이다. 직접 읽어보고 무엇인지 알아내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