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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 ㅣ 미네르바의 올빼미 4
잉에 아이허 숄 지음, 유미영 옮김, 정종훈 그림 / 푸른나무 / 2003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
- 잉게 숄著. 박종서譯. 靑史. 188면. 값 1,900원
"어머니 오셨어요?"
"오냐, 잘 지냈니?"
"네."
(사이......말 없음)
"애야, 내일이면, 네가 그 자리에 없겠구나"
황지우,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 전문
1. 20년 만에 다시
중고생 시절인 80년대에 처음 이 책을 읽었다. 그때 무엇을 느꼈는지는 기억도 나지 않는다. 청사에서 출판된 낡고 바랜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자의 죽음'이 의미없는 과거의 이정표처럼 한동안 덩그마니 꽂혀 있을 뿐이었다. 문맹인이 아닌 덕에 다시 그것을 읽었고 20년전 중고생이라 읽어낼 수 없었던 과거와 의미를 서른넷이라 읽어낸다. 세월은 유심한 모양이다.
2. 숄 남매
숄 남매는 히틀러 체제를 반대하는 격문을 뿌리다 체포되었고 체포된지 나흘만에 사형 당한다. 그들이 하고자 했던 수세적 저항운동이 무엇인지 정확히 말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격문을 뿌리고 히틀러유겐트를 탈퇴하게 하고 편지를 보내던 저항방식은 그것이 무엇인지 엿볼 수 있게 한다. 저자인 또다른 숄남매 중 하나인 잉게숄은 그렇게 말한다.
"현존하는 바벨탑에 상처를 입히는 그러한 최소한의 일에 모든 희생을 각오하는 사람은 확실히 그렇게 많지는 않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처음부터 히틀러체제에 반감을 가지고 있던 아버지와 달리, 성장기에 히틀러유겐트를 접한 이들은 처음엔 그 재미에 빠져 그것의 본질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그들의 아버지는 강제하지 않았으나 덕분에 그들은 경험을 통해 스스로 파시즘의 본질을 간파해 간다. 그들이 좋아하던 스테판 츠바이크의 책이 금서가 되는 이상한 증후에 의심하기 시작하고, 중대장 시절 제작한 독수리 깃발이 다른 부대와 다르다는 이유로 불허되자 어린기수에게 가해지는 명령을 못견디고 한스숄은 상급자의 따귀를 때린다. 신앙을 억압하는 체제에 저항감이 증폭되고 고전을 읽는 나이에 이르러 히틀러체제를 비판하는 언어를 그 속에서 획득해 간다. 러시아 전선에서 수많은 이들의 희생을 목격하고 아버지가 투옥된 채 남형제들은 모두 전선으로 파견되는 불우함을 가족 모두가 겪어야만 했다. 그러나 그들에겐 신앙이 있었다.
3. 인격과 품위는 어디서 오는가.

'2년 전 숄 남매의 사망 60주년을 기념한 기사에서 그때까지 발표된 적 없던 게슈타포 심문 자료들이 처음으로 공개됐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소피 숄의 심문 자료 첫 번째 페이지엔 그녀의 거짓말이 기록돼 있다는 것이다. "그 문서를 배포하지 않았다. 나는 아무 관계없는 사람"이라고. 어떤 독일인도 소피가 거짓말했으리라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녀는 언제나 전형적인 순교자이자 영웅으로 받아들여졌으니까. 하지만 이 기록을 보면 그녀는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살고 싶어 했다. 그래서 자신의 행동을 부인했다. 그녀를 다그치던 매우 터프한 수사관은 심문 3일째에 이르러 서서히 바뀐다. "네 행동을 후회한다고만 하면 넌 살 수 있다." 그녀는 "결코 후회하지 않는다. 다시 태어난다 해도 똑같이 행동하겠다"고 대답한다. 그녀는 타고난 영웅은 아니지만, 심문당하는 3일 동안 매우 극적인 심리 변화를 겪는다. 그녀는 자신의 행동을 새롭게 돌이켜보고 결코 부인할 수 없는 존엄함을 찾아낸다. 그리고 죽음을 택한다. 그건 하나의 몸 속에 전혀 다른 두 개의 캐릭터가 존재하는 것 같았다. 정말 놀라웠다. 나는 그녀의 마지막 순간에 있었던 모든 상황이 알고 싶어졌다. 그래서 이 영화를 만들었다.
- 영화 <소피 숄의 마지막 나날>의 감독 인터뷰 가운데
백장미 단의 상당수는 기독교인이었다. 투옥과 전장으로 가족에게 위기의 나날이 지속될 때 그들은 그렇게 말한다. "하나님은 어디서든 가족을 지켜 주실 것이다." 그들은 그렇게 믿는다. 체포되어 사형을 눈앞에 두고도 그들은 말한다. "먼저 가서 준비를 해둘 테니 나중에 다시 만나요 어머니." 사형 전날 소피를 면회간 어머니가 말한다. " 얘야, 예수님을 믿어라" 딸이 답한다. " 어머니도 그러세요" 단두대에 오른 수많은 사형수들과 달리 그들은 끝까지 꼿꼿했던 이들로 널리 회자된다. 사형선고가 내려진 재판에서 아버지는 울부짖고 어머니는 실신 했지만 그들은 신앙으로 자식들의 선택을 품위 있게 지켜낸다. 문화민족으로 저항하지 않는 것에 수치심을 느끼고 기독교인으로 존엄성 상실을 견딜 수 없었던 이들은 엄혹한 상황에서 작은 저항일지라도 당당하고 심각하게 선택한다. 그들의 신앙이 놀라운 선택과 행동을 이끄는 힘이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내가 중고생 시절이었을 때는 그것을 알지 못했다. 읽어도 이해할 수 없었다.
4. 이들이 살았다면 대전 후 그들은 무엇을 선택했을까.
군부독재 시절 저항했던 이들이 현재 다채로운 영역에서 다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을 보며 그들이 독재에 저항했던 이유가 모두 다 제각각이었음을 발견하게 된다. 시절이 단순해서 선악이 분명한 상황과 달리 그것이 분명치 않은 상황에선 오히려 사람들은 혼란과 무기력에 빠지기도 하지만 그것이야 말로 그들이 저항했던 바탕의 동기가 무엇에 근거했는가, 얼마나 건강했는가를 시험하는 바로미터이기도 할 것이다. 바로 그런 점에서 운동을 선택한 각자의 특별한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의식했건 못했건간에, 그 각각의 이유가 궁금하다. 적어도 숄남매와 그들의 친구과 가족들은 신교에 바탕을 둔 신앙과 거기서 비롯되는 개개 인간의 존엄과 자유가 매우 중요한 동기였음이 분명해 보인다.
그들이 살았다면 대전 후 자유주의자로 살았을 수도 있고 국경없는 의사회와 같은 봉사자들이 되었을 수도 있고 저널리스트나 혹은 또 다른 어떤 선택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해방직후의 조선의 혼란과 환멸의 역사와 민주화 이후의 변화들을 생각해 보면 엄혹한 시절의 삶과 그 후의 계승과 단절이 간단치 않음에 그들의 선택은 어떠했을까, 간단히 추측하기 어렵지만, 그러나 가족 전체가 보여주는 믿음에 뿌리를 둔 인격과 품위는 계승과 단절이, 희망과 환멸이, 어디서 갈라지게 되는지 실마리를 던져주고 있는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