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르는 여인의 편지 슈테판 츠바이크 소설 시리즈 3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원당희 옮김 / 세창출판사(세창미디어)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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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기억은 어떻게 인식되는가? 몇 번의 마주침에도 애끓는 누군가의 사랑은 감각될 수 없는 것. 다만 눈 앞에 보이는 몇 개의 꽃송이로만 기억될 뿐. 한 사람의 절대적 관심과 절대적 사랑이 타인이라는 대상으로부터는 절대적 무관심으로 되돌아오는 기묘한 인간관계의 이야기.

여태까지 스테판 츠바이크의 소설작품중에서 가장 오묘하고 독특했던 작품. 프로이드의 영향을 많이 받은 듯 보이는데 읽는 내내 안타깝고 애틋하면서도 여인의 집요함과 광기같은 사랑에 숨막히기도 했다. 역시나 ‘사랑은 일방통행’인가. 허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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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은 불명료하고 복잡하게 겹쳐 있었다. 그것은 마치 흐르는 물살의 맨 밑바닥에서 돌 하나가 간간이 빛을 내며 형체 없이 떨고 있는 것과도 같았다. 그림자의 물결이 머릿속을 오가기는 했지만, 어떤 형상을 이루지는 못하였다. 그는 감각으로 이런저런 기억을 더듬어 보기는 했으나, 그것을 재현하지는 못하였다.

<모르는 여인의 편지>, 슈테판 츠바이크

#모르는여인의편지 #슈테판츠이바크 #세창미디어 #독서 #책읽기 #북스타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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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의 밤 슈테판 츠바이크 소설 시리즈 1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원당희 옮김 / 세창출판사(세창미디어)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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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에 애정도 없고 희망도 없고 사귀던 여자에 대한 욕망이나 질투도 없이 그냥저냥 귀족들의 사교계 안에서 격식과 겉치레, 예법과 평판같은 굴레에 묶여 무료하게 살던 주인공. 어느 날 우연히 남이 흘린 경마권을 슬쩍한 후 큰 돈을 벌고나서 이전에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평범한 사람들이 탐닉하는 짜릿한 쾌락을 경험하면서 점차 삶에 대한 애정을 찾아가는 이야기.

처음에는 솔직히 돌려주지 못하고 훔친 돈이라는 죄책감에 잠깐 시달리기도 하지민, 그 돈을 어렵게 살아가는 창녀, 불량배, 풍선장수들에게 아낌없이 베풀면서 그들이 기뻐하고 자신에게 감사하는 모습을 보고 행복한 마음를 느낀다. 이전에 사교계에서는 절대 느끼지 못했던 새로운 기쁨, 그리고 자신의 존재를 고마워하는 사람들에게서 받는 감동이라니. 이 색다른 쾌락을 알게된 그는 절대 예전에 몸담았던 세계로는 다시는 돌아가지 않을 것을, 이웃에 존재하는 미미한 사람들에게 베풀면서 느끼는 행복감을 계속 이어갈 것을 맹세한다.

작품을 읽다보니 어쩐지 <인형의 집> 속 주인공이 떠오르는 것 같기도 하고. 뭐, 이 작품 <환상의 밤> 말미에 이 작품의 주인공은 전쟁에 나가 전사했다는 결말이 나오기는 하지만. 자신이 살던 세계에서 과감히 박차고나와서 어떻게 살았을지 궁금해지는 소설이었다.
슈테판 츠바이크 작품에서 자주 보이는 섬세한 심리묘사가 역시나 돋보인다. 무료한 생활을 하고 있을 때도 그렇고 사건을 거치면서 변화되는 상황에서도 그렇고 실감나는 표현들이 차고 넘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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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오후 나는 너희들의 차갑고 말라빠진 세계에서 뛰쳐나왔다. 나는 너희들의 세계에서는 하나의 톱니바퀴, 거대한 기계 속에서 소리 없이 기능을 발휘하는 톱니바퀴였다. 피스톤으로 차갑게 둘둘 말려 올라가면서 자신의 둘레를 공허하게 선회하는 그 기계 속에서 말이다. 나는 알 수 없는 어떤 심층 속으로 빠져들어 가 있지만, 그래도 나는 너희들의 화려한 세계에서보다 이 짧은 순간 동안 더 생동감 있게 살았다. 더 이상 나는 너희들의 소유물이 아니며, 더 이상 나는 너희들의 부류에 끼지 않을 것이다. 나는 지금 공중 아니면 지하, 그 어딘가에 있는 것이며, 앞으로는 결코 너희들 시민적 행운아의 평탄한 해변에서 서성이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생전 처음으로 가면을 벗고 인간들에게서 이루어진 모든 것을 감지했다. 그렇다면 너희들은 내가 어디에 있었는지 알지 못할뿐더러, 나의 본질을 인식하지도 못하리라. 속물들이여, 너희들이 내 비밀에 대해 뭘 안단 말인가!

<환상의 밤>, 슈테판 츠바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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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 광기 열정 1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원당희 옮김 / 세창출판사(세창미디어)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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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테판 츠바이크가 쓴 세계적 문호들에 대한 전기. 1편에는 톨스토이, 도스토옙스키, 니체, 그리고 많이 낯선 독일의 극작가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에 대한 전기가 들어있다. <광기와 우연의 역사>에 톨스토이와 도스토옙스키에 대한 내용이 나오기는 하는데, 이는 흥미로운 부분만 발췌하여 극적으로 보여준 것이었는데, 이 책에서는 본격적으로 각 인물들의 전 생애에 걸친 츠바이크의 설명과 그들의 작품을 연관지어 설명하는 독특한 형식의 길지만 영양가 많은 평전 느낌의 해설서다. 역시나 츠바이크 특유의 예술적이면서도 적확한 표현들이 눈길을 끈다.

<톨스토이>

인간이 도달하는 도덕적 완성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완성해 나가는 과정이 중요하다. __톨스토이 노년의 일기 (8쪽)

세속의 정기, 원초적 감각과 불안, 무한성 앞에 놓여진 인간의 원초적 고독이 그의 작품의 주제이다. (38쪽)

그리하여 톨스토이는 농부들과 그들의 삶으로 근접해 들어가 그들로부터 신의 비밀을 알아내려 하는 것이다! … <안나 카레니나>와 <전쟁과 평화>를 썼던 손으로 그는 이제 자신이 재단한 구두창에다 송곳을 꿰어넣는가 하면, 방을 말끔히 청소하고 자신의 옷도 손수 기워 입는 것이다. 너무도 가깝게, 너무도 성급하게, 한 치의 간격도 없이 그는 “형제들”에게 다가갈 뿐이다 - 단번에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가 되려는 일념만으로 레프 톨스토이는 “민중”이기를 희망한다. (72쪽)

가족 속에 있으면 나는 비애를 느낀다. 왜냐하면 나는 가족과 소속감을 나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들이 즐거워하는 모든 것, 학교 시험이라든가 출세, 문건 구입 따위를 나는 그들 자신에게 불행하고 재앙스러운 것으로 여기지만, 그런 말도 하지 못한다. 말이야 그렇게 할 수 있고, 행동도 그렇게 한다지만, 아무도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 __톨스토이 일기에서 (114쪽)

<도스토옙스키>

그의 내부에 존재하는 것은 선과 악의 씨앗이었다. 그는 바로 열정과 패덕의 씨앗을 감동과 자기도취를 통해 승화시켰고, 위기에 직면해서도 그의 핏속에서 그것을 뿌리째 뽑아내지 못했다. 그의 도박사 본성은 정열의 한 판 승부에 남김없이 모든 것을 걸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삶과 죽음이 좌우되는 빨간색과 검은색의 회전을 볼 때에만, 그는 달콤한 현기증을 일으키며 실촌의 완벽한 환희를 감지했기 때문이다. (182쪽)

그의 인물들은 그들이 사랑받는 만큼 사랑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들은 늘 사랑만을 원하여 희생자가 되고자 한다. 사랑받는 것보다는 오히려 사랑을 베푸는 그런 희생적 사랑을 원한다. 그들은 감정의 광적인 표출을 통해 부드러운 유희로 시작한 감정이 흡사 가쁜 숨결, 신음, 싸움, 고통과 같은 것이 될 때까지 서로를 고양시킨다. 그들은 급격한 변화 속에서 자기들이 배척되고 조롱 받을 때, 비웃음 받을 때 행복을 느낀다. 이렇게 해야 그들은 베푸는 자, 한없이 베풀고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않는 자가 되기 때문이다. (241쪽)

<니체>

“병은 나를 나 자신으로부터 벗어나게 했다”고 그는 고백했다. 병은 그에게 내적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게 한 산파였다. … 왜냐하면 고통만이 깨달음을 주었기 때문이다. — 그는 고통을 짊어지고도 고통을 성스러운 것으로 찬미했다. … 모든 지식은 고통으로부터 나왔다. (286쪽)

허물을 벗지 못하는 뱀은 파멸한다. 자신의 견해를 바꾸지 못하는 사람들의 정신도 그러하다. 그런 정신은 정신이기를 중지한다. __니체 (307쪽)

<클라이스트>

클라이스트는 목표 지향적 의지에서가 아니라 자기욕구에서 촉발된 독일의 위대한 비극시인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어쩔 수 없는 비극적 본성을 지니고 있었고, 그의 존재 자체가 바로 비극이었기 때문이다. … 그의 핵심적 본성은 긴장과 열중이었고, 그의 운명의 불가피한 의미는 극단성에 의한 자기파괴였다. (415쪽)

<천재 광기 열정 1>, 슈테판 츠바이크

#천재광기열정 #슈테판츠바이크 #세창미디어 #독서 #책읽기 #북스타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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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니 트렌드 2025 - 새로운 부의 기회를 선점할 55가지 성공 시나리오
정태익 외 지음 / 북모먼트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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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실상부 대한민국 No.1 경제 트렌드서 <머니 트렌드 2025>
- 누적 조회수 11억 뷰, 420만 명이 열광하는 인사이트
- 2년 연속 출간 즉시 분야 · 종합 베스트셀러
- 교보문고 · 영풍문고 이달의 책 선정 도서

경제나 돈 관련된 책은 거의 읽지않고 있던 참이라 한 권 읽어볼까 싶었던 차에 서평단에 뽑혀서 우연히 읽게 된 책. 호기롭게 읽기 시작하긴 했지만 앞부분에 나온 경제전망이나 주식, 부동산쪽은 도저히 내가 이해할 능력 밖이라 전반적인 우리 사회의 소비패턴과 변화하는 사회의 모습에 초점을 맞춰 설명한 4장과 5장, 그리고 반도체, 인공지능 같은 신기술과 기후위기에 관련된 내용을 담은 6장, 7장 위주로 재미있게 읽었다. 최근 가장 핫한 이슈들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4장 과거와 관성을 버려야 돈이 보인다

<오프라인의 역습, 러닝>
최근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고 있는 취미인 달리기. 늘어가는 러닝관련 수요에도 불구하고 나이키의 매출은 추락했다. 이것은 소비자들이 패션 스타일의 접근에서 진짜 운동으로의 접근으로 태도가 전환됨을 보여주는 것이다.
소비위축 상황으로 막대한 재고가 발생했을 때, 오프라인 소매점에서 나이키가 철수한 후에 호카, 온 러닝, 아식스, 뉴발란스 등이 기회를 잡는 결과가 되기도 했다.
결론적으로, 오프라인은 계속 필요하다는 것. 사람들의 욕망은 오프라인을 버리지 않으며, 오프라인 유통과 소매는 사라질 수 없다.

<Young-Old와 케어 이코노미>
욜드는 건강을 유지하며 은퇴 이후에도 적극적으로 소비생활과 여가를 즐기는 이들을 말하며 젊은 노인의 소비력과 그들의 자산이 큰 비중을 차지한다.
기대수명은 점점 길어지고 노후에 쓸 돈은 더 많이 필요해지며, 자녀에게 부를 대물림할 여력 역시 점점 떨어진다.
결국 노년의 부모를 돌보는 것은 자녀의 몫이 아니라 돈의 몫이다.

<수면 이혼과 슬립 테크>
수면이혼이란 부부가 함께 살지만 잠은 분리된 각방에서 자는 것을 말하고, 수면의 질이 낮아지기 때문에 증가추세에 있다. 특히, 여성의 수면의 질이 상대적으로 남성보다 낮기 때문에 여성이 수면산업에서 좀 더 중요한 소비자다.
수면장애를 개선하는 웨어러블 디바이스 확대, 조명과 음향, 향기, 가구, 침구에도 IT 기술이 적용된 제품과 서비스가 커질 것으로 예상된다. 편안한 잠을 돕는 수면관련 치료제, 수면유도 음료나 영향보조제 산업도 확대될 것이다.

<2025년 뜨는 음식 유행의 비밀>
SNS에 사진을 올리기 좋게 인스타그래머블한 ‘시각적으로 새롭고 화려한‘ 디저트 계속 유행한다. 호기심에 의한 접근, 남들보다 먼저 경험했다는 것이 중요하기에 초반에 인기가 강하지만 경험이 확산되면 금새 사라진다.
디저트가 달달해질수록 매운 음식시장도 건재할 가능성이 높다. 즉, 탕후루는 사라져도 마라탕은 지속된다.
쉽게 충족되지 못하는 욕망은 오래가지만, 누구나 몇천 원으로 쉽게 충족할 수 있는 욕망은 오래가기 어렵다.
*일본 디저트에 주목하라

<다이어트 이코노미와 올라운드 안티 에이징>
사람들이 건강관리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당뇨와 비만. 이들은 서로 연결된다. 비만치료제 시장은 점점 커질 수밖에 없다.
운동으로 건강관리를 일상적으로 하는 운동홀릭족도 많아질 수밖에 없고, 근력운동과 함께 단백질 섭취를 늘리는 이들도 많아질 수밖에 없다.
**비만을 잡는 자가 돈을 잡는다.

다이어트에 성공하는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패션, 뷰티 산업도 커진다.
다이어트는 노화와 밀접하게 관련이 있으므로 자연스럽게 안티 에이징과 연결된다. 이제 20대부터 모든 연령에 전방위로 적용되는 욕망이 되었다(얼리 안티 에이징 시장에 20, 30대 대거 진입).

<4554, 한국 사회의 킹핀이 되는 사람들>
2025년 기준으로 45~54세 (1971~1980년생)면서 다양하게 경험을 쌓고 안목과 경제력을 갖춘 4050대가 한국 사회의 킹핀이다.
한국에서 가장 많은 인구수를 가진 그룹이고, 1020대를 자녀로, 7080대를 부모로 둔 사람들이면서 중간 세대로서 이들 모두에게 직접적 영향력을 미친다.

#도서협찬 #머니트렌드2025 #정태익 #김도윤 #경제경영 #트렌드 #베스트셀러 #신간 #책추천 #책스타그램 #북스타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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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사슴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장편소설 문학동네 한국문학 전집 24
한강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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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아... 한 번도 손에서 놓지않고 단숨에 읽었다. 숨이 가쁘다. 책을 읽는 내내 작품 전면에 흐르는 마치 ‘깊은 굉도에 갖혀 숨도 못쉬고 차가운 물이 목까지 차올라있는 느낌’이라니. 작품 속의 어느 인물처럼 그렇게 어둠속에서 60시간 넘게 생사를 오가다 멀리서 빛 한 줄기를 발견했을 때의 경험이란 어떤 의미일지 감히 상상도 하지 못하겠다.
모두들 각자의 어둠이 있고 그 어둠에 대응하는 방식은 모두 다르다. 어둠의 존재를 인정하며 거기서 파생되는 비애와 패배감을 운명으로 받아들이며 그 결박속에서 안정감을 느끼며 사는 사람도 있고, 끝내 어둠을 물리치려 발버둥치다 산산이 부서지는 사람도 있다. 또는 어둠을 싫어하지만 저항보다는 그저 침묵하며, 침묵을 빛이라 착각하며 그저 이리저리 부유하듯 아무렇게나 살아버리는 사람도 있겠다.
작품속 의선, 인영, 명윤, 사진가 장, 이 인물들이 각자의 어둠을 뚫고가는 여정이 어느하나 녹록치는 않지만, 결국에는 그 혹독함이 사람들이 근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따스함과 용기를 더욱 돋보이게 해주는 결말인듯 해서 마음에 들었다.

<검은 사슴>이라는 제목이 궁금했는데, 광부들 사이에서 전설처럼 전해내려온다는 동물이란다. 정말로 이런 이야기가 전해지는지는 알 길이 없으나, 작가의 상상력이라면 정말 감탄할 수밖에 없다.
깊은 땅속 암반 사이에서 사는 짐승. 온몸은 검은 털로 뒤덮였고 두 눈은 굶주린 범처럼 형형하며 이빨은 늑대 송곳니처럼 단단한 이 짐승의 몸에서 유일하게 아름다운 것은 이마에 자라난 번쩍이는 뿔이다. 천형처럼 어둠을 짊어진 이 짐승의 평생소원은 단 한 번만이라도 하늘을 보는 것이어서, 마주치는 사람들한테마다 바깥으로 나가는 길을 묻는데, 사람들은 검은 사슴의 뿔을 자르고 이빨을 뽑은 뒤 길을 막아 따라나오지 못하게 한다.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보지 못하게 된 검은 사슴은 흐느껴 울다가 들쥐 새끼만하게 쭈그러들어 숨이 넘어가거나, 어쩌다 운좋게 암반 사이의 가느다란 틈을 비집고 나와 꿈에도 그리던 하늘을 보게 되면, “햇빛을 받자마자 (……) 순식간에 끈적끈적한 진홍색 웅덩이로 변해버린다. 눈부터 빨갛게 녹아버리는 거다”.

‘검은 사슴’은 극중 이상한 행동을 보이며 행방불명되는 ‘의선’의 모습과 흡사하다. 가출한 어머니를 찾아서 아들 딸을 남겨놓고 외지로 떠돌던 아버지를 기다리며 정신이 온전치 못한 오빠를 돌보던 그녀는 사회로 나와서도 자신을 옥죄는 어둠과 싸우며 희미한 기억 속의 아름다운 고향마을을 찾아 길을 떠난다. 그녀 주변의 모든 것이 검은 사슴의 뿔을 자르고 이를 뽑아내는 광부들처럼 그녀를 파괴하려든다.
한강 작가의 1995년 작품인데, 중간중간 <채식주의자(2007)>의 한 대목을 보는 듯 한 설정과 구절들이 보여서 반가웠다. 한강 작가의 작품을 접해보지 못한 분이라도 쉽게 흥미를 가지고 읽을 수 있을만한 작품인듯 하다. 너무 좋았다. 강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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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서서히 미쳐가는 사람들도 있는 거 아닐까요? 서서히 병들어가다가 폭발하는 사람 말예요. 줄기가 뻗어나가다가, 한없이 뻗어나갈 듯하다가, 그 끝에서 거짓말처럼 꽃이 터져나오듯이…… 글쎄, 이 비유가 걸맞은 것 같진 않지만…… 그런 식으로 터져버리는 거죠. 그래요, 오래 잘 참은 사람일수록 더 갑자기.
... (중략) ...
선배는 예전의 그애를 좋아하지요. 하지만 나는 그때의 그애를 몰라요. 다만 지금의 그애가 좋아요. 그때를 모르니까. 하지만 몰라도 괜찮아요…… 지금이 좋으니까.

검은 사슴 | 한강 저

**어둠 속에서 서서히 미쳐가는 사람에게도 희망은 있다. 미치기 전의 모습 뿐 아니라 미치고 난 후의 모습도 괜찮다고 말해주는 누군가가 어디엔가는 있을 것이기에.

#검은사슴 #한강 #문학동네 #독서 #책읽기 #북스타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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