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밭 창비시선 210
최정례 지음 / 창비 / 2001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평론가 이남호는, '최정례시인은 최근 가장 밀도 높은 언어를 구사'하고 있으며, '일상의 균열을 너무 정직하게 투시하'기 때문에 '수은처럼 위험하다'고 말한다. '아픈 기억들과 외면당한 욕망들이...복개천처럼 흐르는' 우리들의 삶을 냉정하게 증언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이 시집에 실린 시들을 한번에 꿰뚫을 수 있는 적확한 독법이다. (이 시집에 실린) 최정례 시는 적어도 두 갈래의 발성법으로 이루어져 있다. 하나는 삶이라는 것 자체의 모순과 슬픔과 소외를 숨김없이 남김없이 드러내어 주는 것.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시간에 관한 것인데, 어제(과거)의 시간을 오늘(현재)의 순간에 섞어보는 것, 혹은 오늘의 순간을 어제에 심어두고 그 어제를 오늘 다시 꺼내 말리는 것이다. 이 두가지의 발성법은 몇 몇 뛰어난 절편들에서는 훌륭하게 결합되기도 한다. <늙은 여자>, <붉은 밭>, <빨간 다라이> 들이 그것이다.

삶에 대한 도저한 비극적 인식, 그리고 냉소, 어쨋든 살아야 한다(할 것이다)라는 체념과 그 체념을 버팅기는 뻔뻔스러운 상상력들, 그 슬픔의 무게를 견디기 위한 축축한 응시들이 이루는 이 시편들의 언어는 쉽게 접근하기 힘들다.

그렇다고 이러한 밀도 높은 언어들이 이남호의 말처럼 '우리들의 삶'이라는 영역으로 확장되지는 않는다. 개인적 불행과 외면당한 욕망들의 기억이 시인의 시간에 대한 현학적 관심과 어색하게 팔짱을 끼고 있기 때문이다. 세계의 비극성에 대한 고집이 일상에 대한 응시 보다는 좌절과 체념, 그리고 기억과 착란에 의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그녀의 시선이 무게를 가지는 것은 기억과 착란을 조직(구성이 아닌)하고 이끌어가는 편집증적 상상력 덕분이다.

우리는 그녀의 슬프고 뻔뻔스러운 이미지들에 한걸음씩 다가가서 그것들을 음미할 뿐인데, 시인은 그러한 우리들을 다시 뻔뻔스럽고 냉소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을 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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