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시 읽기의 즐거움
김풍기 지음 / 아침이슬 / 2002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한시를 읽을 때마다 느끼는 것은, <깊이>에 대한 목마름이다. 가라타니 고진은 그러한 <깊이에 대한 불만>이 근대인들의 사유를 지배하는 원근법적 시각에 기인한다는 것을 갈파한 적 있다. 그러나 옛시인들에게 원근법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들에게도 개념으로서의 풍경이 시적 사유를 앞서가기도 하는 사례를 우리는 쉽게 찾을 수 있다. 단지 현대시의 경우처럼 중심을 향해 구심력과 원심력을 반복하는 개념적 탄력으로서의 구성을 좀처럼 허락하지 않을 뿐이다. 그것을 <자연>에 대한 관념의 차이라고 곧잘 지적되어 왔지만, 나는 그것 역시 <정도의 문제>라고 보고 싶다.

동서양, 혹은 근대와 전근대적 자연사유에 있어서 가장 궁극적인 차원에서의 전도를 찾기란 쉽지 않다. 푸코나 가라타니 고진 처럼, 혹은 데리다처럼 고고학적 탐사나 차이의 생성에 대한 현상학을 주시할 뿐이다.

이 책의 마지막에 실린 김시습의 <題淸平山細香南窓>은 한시의 풍경이 근대담론으로서의 풍경과 어떤 격절점을 가지고 있는지 잘 보여 준다.

새, 종소리, 파랑새, 신선 등의 풍경(얼굴)들은 조금의 개념적 권력을 선취하지 않고 동등한 자격으로 자연에 참여하고 있다. 저자는 이 시에 대해 '후반부는 道仙의 세계를 그리고 있'다고 평하는데, 좀 야속하지만 확대해석이다.(이런 점은 이 책 곳곳에 자주 등장하는데, 결점이라기보다, 대중 독자를 고려한 친절함일 터인데, 나로서는 좀 아쉽다.)
여기서 신선은 파랑새, 혹은 복사꽃이나 이끼가 주는 존재론적 무게 보다도 가벼운 소품에 불과하다. 아무 일도 없으며 저절로 굴러가는 말 그대로의 自然이 정치적 좌절로 세속으로부터 눈을 돌린 매월당에 의해 새로운 풍경으로 살아나는 것이다.

아무튼, 이런 괜한 트집에 아랑곳 않을 정도로 저자는 한시의 풍경들을 넉넉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풀어주고 있다. <깊이에 대한 목마름>이란 말은 나와 같은 고체적 인간에게 돌아오고 있는지도 모른다. 내가 아는 <문학>이 <문학>이 된 지는 근래 백년 남짓일 것이다. 그 이전의 <문학>으로 가고 싶으나 나는 왜 꼭 <문학>이어야 하는가. 그런 물음으로 다시 돌아가야 할지 모른다. 이 책은 그런 물음을 다시 던져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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