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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전이나 문헌에서 돌봄의 의미는 “건강 여부를 막론하고 건강한 생활을 유지하거나 증진하고, 건강의 회복을 돕는 행위”(네이버 어학사전) “우리의 삶과 노동을 매일같이 재구성하게 해주는 관계와 활동의 복합체”(페데리치), “인간과 인간의 상호작용을 전제로 하여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욕구와 필요에 진정으로 부응하여 배려하고 보살피는 것”(문현아) 등으로 쓰여 있다. (페데리치와 문현아의 정의 출처는 안숙영, 「젠더와 돌봄: 남성의 돌봄 참여를 중심으로」, 《한국여성학》, 제33권 2호, 2017.)
그러나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돌봄 개념은 이러한 정의와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정치인들의 공약과 교육 혹은 보육 정책에서 종종 등장하는 “돌봄”이란 누군가 힘겹게 감당해야 하는 어려운 것을 연상시킨다. 사회적 돌봄의 제도적 기반이 충분치 않기 때문일 것이다.

이 책을 읽기 전 나의 생각도 그랬다. ‘돌봄 소설집’이라는 타이틀에서 작년에 읽었던 『열여덟은 진행 중』(김애란, 창비, 2024)이 떠올라서 더욱 더. 이 시집에는 일명 ‘영케어러(young carer)’라 불리던 가족돌봄청소년의 고단한 삶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이 책을 읽고 ‘영케어러’의 존재도, 외국에서는 이들을 위한 특별법이 마련되어 있다는 것도 처음 알게 되었던 강렬한 기억이 『너의 오른발은 어디로 가니』에 대한 기대지평을 그렇게 형성했던 것 같다.

첫 번째 소설 강석희의 「녹색 광선」과 마지막 소설 황보나의 「가방처럼」은 그러한 예상에 부합하는 작품이었다. 「녹색 광선」에서 장애인 이모를 끌어 안아 들어올리는 장면은 돌봄의 무게를 물리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았고 「가방처럼」의 화자가 ‘할머니의 모든 것은, 뭐랄까 좀 더러웠으니까’라고 서술할 때 마냥 밉살스럽지만은 않았던 것도 어쩌면 그 무게를 나 역시 두려워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백온유의 「샤인 머스캣의 시절」은 핸디캡을 가진 사람을 사랑하며 일상을 함께하는 것의 현실적인 어려움을 세밀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깨어질 뻔한 관계가 다시 이어지는 해피엔딩은 아름다워서 낭만적으로 느껴졌다. 현실에서 그 벽을 넘는 과정은 아마도 장편에 담겨져야 할만큼 지난했을 수도.
돌봄과 가정폭력을 연결 지은 「낙원」(김다노)을 읽을 때부터 돌봄의 개념이 조금씩 확장되었다. 폭력을 견디고 그 안에서 억압 당하며 수행하는 돌봄이라니. 그 폭력의 피해자들이 가정에서 피신할 수 있도록 마련된, 또 다른 돌봄의 공간인 물음표가 함께 나오는 것, 독서의 과정 속에서 악어=가정 폭력의 주체라는 은유로 읽게 되는 순간들은 흥미로웠다.
그 뒤의 작품들은 관계 일반에 대한 이야기라 해도 무방해 보인다.
위해준의 「바코드 데이」와 전앤의 「너의 오른발은 어디로 가니」는 주변 인물들의 역할이 마음에 들었다. 어떤 대상 또는 일로부터 상처 입고 좌절했을 때 그 아픔에 압도되지 않도록 도와주는 의외의 인물들이 배치되어 있는 삶은 얼마나 건강한가. 그런 의미에서 대피소의 삼총사(「바코드 데이」)와 설이(「너의 오른발은 어디로 가니」) 캐릭터는 위안이 되었다.
‘쌍방 구원의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는 최영희의 「귀여워지기로 했다」에서 화자가 결혼 제도 속에서의 엄마의 입장을 이해하는 과정-므드셀라가 만드는 연대기에서 탈출하고 싶은 엄마의 마음을 이해하고, 엄마를 안아주고 싶어하는 순간, 별채를 엄마의 공간으로 양보하는-이 눈에 들어왔다. 또 “19년 단 한 명의 어린이에게 받았던 호의를”(195면) 호명으로 받아들여 귀여워지기로 한 제프의 사연을 다 듣고는, 견강부회이지만 이야기의 힘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만들었다. “은퇴한 전투 로봇이 왜 아이들에게 달려갔는지 듣지 못한” 다유가 제프의 생명을 연장했던 것처럼 이야기_누군가의 간절한 사연_은 그의 삶을 이어가게 해주는 것 같다. 제프처럼 간절한 꿈을 가진 이라면 더더욱 그러할 것이다.
이 소설집이 우리 사회가 확장된 돌봄의 개념을 고민하는 단계로 갈 수 있는 하나의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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