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백 미야베 월드 2막
미야베 미유키 지음, 김소연 옮김 / 북스피어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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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한 번쯤은, 잘못한 일이나 상처받았던 일을 입 밖으로 꺼내놓는 것만으로도 홀가분해지는 경험을 한 적이 있을 것이다. 애써 잊으려고 하거나 묻어두었던 일을 누군가에게 이야기함으로써 자신도 몰랐던 응어리를 털어내는 그런 경험. 이 책은 그런 과정을 거치는 이들에 관한 이야기이다.


다른 것보다 먼저, 내가 미미여사의 팬이라는 것, 그 중에서도 '미야베 월드 2막'으로 나오고 있는 이 에도물 시리즈의 열광적인 팬이라는 것을 밝혀야 할 것 같다. 화차나 모방범으로 대표되는 사회파 추리소설을 쓴 미미여사를 기대하며 이 시리즈를 펼친다면 실망할 수도 있을 것이다. 또 '귀신 이야기'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어쩌면 이 이야기들이 허무맹랑한 소리들로 들릴지도 모른다. 특히 이 책의 마지막 부분은 호오가 갈릴 수 있을 것 같다- 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야기' 자체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그리고 여사님의 따뜻한 시선을 공유하고 싶다면 강력 추천.


상처를 가진 소녀가 있다. 그리고 그 소녀는 작은 방에 찾아오는 손님들로부터 '괴담'을 듣는 이가 된다. 잘 듣는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잘 듣는 이에게는 상대의 아픔과 괴로움이 느껴지니까. 하지만 그렇게 들어주는 소녀가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한 번도 꺼내놓지 못하고 오랫동안 마음 속에 묻어두었던 잘못을 반성하고, 원망을 털어놓고, 슬픔을 터뜨린다. 그리고 소녀 또한 그 과정을 거치면서 자신의 상처를 치유해 나간다.


자극적인 설정이나 커다란 반전 없이 담담한 어조로 풀어놓는 이 이야기들에는 사람이면 누구나 가질 수 있는 어두운 면들이 담겨 있다. 질투와 시기, 좀 더 잘 살아보려는 욕심, 교만과 업신여김. 그래서 소녀와 함께 이야기를 듣고 있는 독자 또한 마음이 아릴 수 밖에 없다. 누가 봐도 나쁜 놈인 악당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어쩌면 내가 일상적으로 짓고 있는 작은 나쁨들에 대한 이야기들이니까. 그렇다고 이야기가 단순하지는 않다. 미미여사는 타고난 이야기꾼이니까.  


百物語, 사람들이 둘러앉아 자신이 아는 괴담을 이야기하는 것. 미미여사는 그 이야기 대회를 작은 방에서 두 사람이 마주 앉아 하는 것으로 바꿈으로써 더 내밀한 속을 들을 수 있도록 바꾸어 놓았다. 무엇보다도, 그녀가 실제로 '백 가지' 이야기를 하려고 마음먹었다고 하니 나 역시 이 방에 한 동안 찾아와야할 운명이다. 이번엔 가슴 아린 이야기들이지만, 다음 권인 "안주"에서는 좀 더 밝은 분위기의 이야기들이 기다리고 있다고 하니 부담없이 다음 권으로 넘어가면 될 것 같다.



덧.

열심히 쓰다보니, 얼마 전에 본 연극 "거기"가 떠오른다. 그러고보니 같은 형식이네. 알고 있는 이야기들을 풀어놓고, 그 과정에서 상처를 치유하는 것. '이야기'의 힘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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