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로쟈 > 오역의 모험

작년 가을에 북매거진 <텍스트>의 청탁으로 쓴 글로 인문 번역서의 오역 실태를 점검해본 것입니다. 절반 정도는 이미 쓴 글들에서 따온 것인데, 분량(원고지 50매) 제한 때문에(청탁받은 분량은 40매) <천개의 고원> 등 몇몇 책이 다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기회는 또 있겠지요...

 

 

 


얼마전 <한겨레>에 “다시 불붙은 화두 ‘번역은 반역이다’”란 제하의 기사가 실렸다. 기사의 내용은 불문학 전문번역가 이세욱씨의 <나는 그녀를 사랑했네>(문학세계사)에 대해서 동료 번역가인 백선희씨가 이의를 제기했다는 것인데, 쟁점은 과연 번역가는 원작에 얼마만큼 개입할 수 있는가로 읽혔다. 예컨대, “나는 면이 알맞게 익었는지 씹어 보다가 혀를 데었다.”라고 한 이씨의 번역에 대해서 백씨는 “면이 알맞게 익었는지 씹어보다가”는 원작에 없는 내용이며 역자가 불필요하게 첨언함으로써 단문 중심의 원작을 훼손했다고 주장한다. 번역가의 역할에 대해 두 사람은 상반된 의견을 갖고 있는 셈인데, 최근에 나온 인문서들의 오역문제를 다루는 자리에서 소설 번역 얘기를 먼저 꺼낸 건, 그나마 그 정도의 쟁점이라면 ‘사치’에 가깝다는 얘기를 하고 싶어서이다.

원작을 읽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짐작에 이세욱씨가 역자로서 지나친 친절을 베푼 것이 아닌가 싶은데, 사실 그러한 친절이 아쉬운 쪽은 소설이 아니라 인문서 번역이다. ‘번역은 반역이다’란 말이 결코 비유가 아닌, 그리고 절대로 과장이 아닌 배신, 배반형 번역서들이 넘쳐나는 마당에 사실 그러한 (과잉)친절은 오히려 과분하다. 고전이라 일컬어지는 문학작품들의 번역이 기대에 못미친다는 일전의 (놀랄 것도 없는) 조사결과가 보여주듯이, 우리의 일반적인 번역환경과 수준은 아주 열악하며 한참 뒤떨어져 있다. 하지만, 정확하기 이전에 최소한 ‘말이 되는’ ‘논리가 닿는’ 정보만 전달해도 나쁘지 않은 번역이란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인문서 번역에서 제대로 된 번역을 가물에 콩나듯이 만날 수 있다는 것은 분명 소극이다(여기에 비극이란 말은 어울리지 않는다). 그리고 실제로 ‘웃기는’ 번역들이 너무 많다.


 


 

 

 

인문서 번역의 경우 우리말이 어색하거나/이상하거나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 경우는 거의 대부분 오역이라고 보면 된다. 소설의 경우라면, 도대체 면이 알맞게 익었는지 말았는지 하는 내용이 오역인가 아닌가는 원작을 대조해 보아야만 확인할 수 있다. 때문에 소설 등 문학작품의 오역은 웬만큼 눈썰미가 좋지 않고서는 찾아내기 어렵다. 예외적인 경우라면, 논리에 맞지 않는 내용이 나올 때인데, 가령 시중에 나온 번역본 중에 가장 많이 팔린 걸로 돼 있는 <걸리버 여행기>(문학수첩)의 첫쪽에는 걸리버가 긴 항해를 준비하기 위해 2년 7개월 동안 ‘물리학’을 공부한 걸로 나온다. 물리학이라니? 뭔가 이상해서 원작을 대조해봤는데, 물리학이라고 옮긴 단어는 'Physick', 즉 ‘의학’이었다(다른 번역본에서는 ‘의학’이라고 제대로 옮겼다). 역자는 그걸 ‘물리학Physics'으로 착각한 것인데, 아쉬운 것은 그렇게 옮기면서 뭔가 이상하다는 낌새를 느끼지 못했다는 점. 걸리버가 항해중에 의사 노릇을 하는데도 불구하고, 이런 오역을 눈치채지 못한 역자의 무신경을 탓할 수밖에 없다. 이럴 경우 번역이 아무리 경쾌하고 유려해 보여도 역자에 대한 신뢰는 팍팍 떨어진다.

또 다른 사례로는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민음사)의 맨마지막쪽을 들 수 있다. “이렇게 슈호프는 그의 형기가 시작되어 끝나는 날까지 무려 십년을, 그러니까 날수로 계산하면 삼천육백십삼 일을 보냈다. 사흘을 더 수용소에서 보낸 것은 그 사이에 윤년이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반 데니소비치의 ‘거의 행복한’ 하루를 뒤따라온 독자의 머리를 한대 치는 결말인데, 안타깝지만 여기에도 오역이 있다. 10년이면 날수로 삼천육백십삼일이 아니라 삼천육백오십삼일이어야지 맞다. 어쩌다가 십단위의 ‘오’가 빠졌는지 모르겠지만(교정중의 실수일 수 있다), 덕분에 독자는 감동을 받기 이전에 날짜수를 계산하도록 요구받는다. 문제는 사례로 든 두 작품의 경우 계속 판을 찍으면서도 오역이 교정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그런데, 이제부터 검토해 볼 인문 번역서들은 이 정도의 오역들을 오역으로서 정말 무색하게 만든다. 예컨대, 현대 사상의 원조로 꼽히는 언어학자 소쉬르의 <일반언어학 강의>(민음사)부터가 전혀 미덥지 못한 번역이다. 다음을 보라. "언어적 물체는 쓰여진 낱말과 발음된 낱말의 결합으로 정의되지 않는다. 후자 하나만으로써도 이 물체를 구성한다."(35-6쪽) 언젠가 이차문헌의 내용을 확인해 보기 위해 이 대목을 읽다가 경악을 한 기억이 있다. '언어학의 대상'을 정말 황당하게도 '언어적 물체'라고 번역해놓고 있는 것이다!(이게 물리학책인가?) 절판된 옛날 번역본을 인용하자면, 이 대목은 적어도 “언어학의 대상은 쓰여진 낱말과 말해진 낱말의 결합인 것으로는 정의되지 않는다. 말해진 낱말만이 그것의 대상이다."(형설출판사, 41쪽) 쯤으로 옮겨져야 한다. 사실 확인해보지 않은 다른 대목들의 번역은 훌륭할 수도 있지만, 이 한 대목에서 일단 번역에 대한 기대는 접어두게 된다.

 

 

 

 

이런 사정은 소쉬르 언어학에 근거를 둔 <구조주의의 역사2>(동문선)에 가서도 반복된다. ""하나의 모음이 움직일 때 그것은 전체 체계를 끌고간다는 의미에서 구조주의적인 보어"임을 알게 해주었다."(14쪽)라는 문장이 나오는데, 여기서 구조주의적인 '보어'라는 게 도대체 무슨 말일까? 역자는 무슨 말인지 알고 번역했을까? 물론 아니다. 말도 안되는 소리이기 때문이다. 그 부분의 영역은 이렇다(불어본과 대조해보면 더 확실하겠지만). "completely structualist insofar as when each vowel moves, the whole system moves with it."(물론 앞에 좀 길게 나오는 부분이 있지만, 생략했다.) 역자가 보어라고 번역한 건 무엇일까? 바로 영어로는 ‘completely’이다. 짐작에 불어로 '꽁쁠리뜨망completement'이란 단어를 '꽁쁠리망complement'(보어)으로 착각한 듯싶다. 비슷한 단어이기 때문에 혼동할 수 있다고 해도 ‘완전히 구조주의적’이란 뜻을 ‘구조주의적인 보어’라고 옮기고 태연하게 넘어갈 수 있었던 역자의 배포가 놀라울 따름이다(말이 안되면 다시 봐야 할 것 아닌가?).

소쉬르 이후 현대철학의 수난이라고 할 만한 번역에는 <현대유럽철학의 흐름>(한울)도 빼놓을 수 없다. 92년에 초판이 나온 이후에 제법 많이 팔려나가고 있는데다가 대학 교재로도 자주 쓰이는 책이지만(강사의 양식이 의심스럽다), (좀 자세하게 뜯어본) ‘구조주의’ 장의 번역은 오역의 연속이다. 가장 원초적인 문제는 역자가 기표/기의 혹은 능기/소기라는 기본적인 개념쌍부터 혼동하고 있다는 사실. “새로운 언어학을 형성시키는 과정에서, 소쉬르는... 소기(le signifie; signifier)와 능기(le significant; signified)... 등의 일련의 차이를 제시한다.”(274쪽)를 보자. 우선 역자는 리처드 커니의 원저에도 없는 불어를 병기하는 (과잉)친절을 베풀었는데(시니피앙le signifiant은 철자도 틀렸다), 그것이 도리어 사단이 됐다. 불어의 시니피에(le signifié)와 발음상/형태상 유사한 영어의 signifier를 같은 뜻으로 착각하고 ‘소기’라 옮긴 것이다. 이 문장은 일단 “소쉬르는 기표(signifier)와 기의(signified) 등의 일련의 구별(distinction)을 제시한다.”로 옮겨져야 한다. 예상할 수 있는 바이지만, 역자는 이후에 능기/소기(기표/기의)를 뒤죽박죽으로 옮겼다(그나마 오역에 일관성이라도 있으면 나으련만).

전혀 엉뚱하게 번역한 한 대목만 더 보도록 하자. “랑그에 대한 연구는 구조적 기호체계를 위한 지향적 전언내용을 일괄적으로 다룸으로써 언어학의 확실한 과학적 정초를 다지게 하는 것이다.”(276쪽) 원문은 이렇다. “In short, by bracketing the intentional message for the sake of the structural code, Saussure resolves to set linguistics on a firmly scientific footing.” 문제가 되는 건 “전언내용을 일괄적으로 다룸으로써”란 말인데, 그것은 “전언의 내용을 괄호침으로써”로 고쳐져야 한다. 요점만 말하면, 소쉬르는 코드(code)를 위해서 메시지(message)에는 괄호를 쳤다는 것이고, 이것이 소쉬르 계보 구조주의의 핵심이다. 일괄적으로 다룬다는 게 그런 뜻인가? 그나마 소쉬르가 이 정도이다. 하물며 라캉에 대해선 무얼 더 기대하랴. 신기한 것은 이런 책이 아무런 교정 없이도 판을 거듭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구조주의 사회학자로 분류되는 부르디외도 불운하긴 마찬가지이다. 그의 책들 중에서 가장 얇은 <강의에 대한 강의>(동문선)를 보자. 얇지만, 오역은 충만하다. '강의에 대한 강의'란 제목이 뜻하는 건 자신의 사회학 강의에 대해 사회학적으로 검토해보겠다는 것이다. 시작부분에서 자신이 생각하는 사회학에 대해 말하는 부분: "사회학이 표명하는 모든 명제들은 과학의 주제에 적용될 수 있고, 또 그래야 합니다."(10쪽) 하지만, 이 문장을 어느 누가 "사회학이 표명하는 모든 명제들은 이 학문[사회학]을 실행하는 주체[사회학자]에 적용될 수 있고, 적용되어야 합니다."는 뜻으로 읽겠는가? 우리말 번역만 가지고는 부르디외가 과학사회학 강의를 한 것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다. 이렇듯 핵심이 빗나갔으니 나머지 대목들이 끼워맞추기식 번역일 거라는 건 안봐도 뻔한 얘기이다. 제대로 읽히는 대목이 손으로 꼽을 정도에 불과하지만, 가장 문제가 되는 건 긍정문/부정문을 바꿔치기하는 것이다. "전혀 자연스럽지 않은 행위가 왜 일어나는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45쪽)는 문맥상 전혀 자연스럽지 않다. 그것은 "결코 자명하지 않은 어떤 행위가 왜 존재하는가에 대해서 우리는 물으려고 하지 않는다."쯤으로 옮겨야 한다. 여기서 부르디외가 말하는 행위는 사회적 행위이고, 그것은 결코 자연스럽거나 자명한 행위가 아니다. 하지만, 사회적 관계[게임]속에 행위자는 그것을 자연스럽고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더욱 가관인 사례. "사실상 뒤르켐이 말한 바, '사회는 신이다'까지 인용할 필요 없이, 저는 "신은 전혀 사회가 아니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신에게 기대하는 것은 사회에서 전혀 얻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사회로부터 유일하게 인정하는 힘, 인위성 우연성 부조리를 제거하는 힘을 얻을 수 없을 것입니다."(50쪽) 이 또한 역자가 사회학자가 맞는지 의심케 하는 오역이다. 첫문장까지는 괜찮다. 하지만, 그 다음부터는 "신에게 기대할 수 있는 모든 것은 오직 사회를 통해서만 얻을 수가 있습니다. 오직 사회만이 여러분을[여러분의 존재를] 정당화시켜주며 사실성, 우연성, 부조리성으로부터 해방시켜 줍니다." 쯤으로 옮겨야 한다. 그나마 양심적인 건 역자의 말이다. "번역 수준에 대해 역자 자신은 아직도 불만족스럽다. 이 번역판을 읽는 데에 독자의 각별한 인내심과 양해를 구한다."(65쪽) 사실 더 양심적이었다면, 책을 내지 말았어야 했다.

부르디외의 책 중에서 가장 대중적인, 그런 만큼 가장 많이 팔린 <텔레비전에 대하여>(동문선)도 오역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서문에서 저자가 매스미디어들의 부추김 때문에 일전을 불사할 뻔했던 터기와 그리스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부분. “그리스 병사의 섬 상륙, 함대의 이동, 그리고 전쟁은 정의를 피했을 뿐이었습니다.”(12쪽) 여기서 “전쟁은 정의를 피했을 뿐”이라는 게 무슨 말인가? 영역본이 “war was only just avoided."(전쟁을 가까스로 피할 수 있었다)인 걸로 봐서 역자는 불어의 justesse(혹은 justice)가 들어가는 숙어(‘가까스로’)를 잘못 옮긴 것이다. 문제는 왜 그런 오역/실수를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또 역자는 그렇다 쳐도(역자의 실력이 그렇다면) 교정자는 왜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일까?

그런 단순한 오역을 놓친다면, 다음과 같은 대목은 어떻게 읽고 이해할 수 있을는지? “저는 말하자면 과거의 온정주의 교육적 텔레비전을 바라는 향수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저는 이런 향수가 대중의 취향과 대규모 방송 수단의 민주적인 이용을 위한, 대중의 자발적 혁명과 선동 정치적 복종에 반대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48족) 읽으면 읽을수록 머리가 아파오는데, 이유는 말이 안되기 때문이다(역자는 아무런 고통없이 번역했을까?). 두번째 문장을 다시 번역하면 이렇다. “과거의 가족주의적-교육적 텔레비전이야말로 제가 보기엔 (로자 룩셈부르크식의) 대중적 자발주의나 대중적 취향에 대한 선동적인 투항 못지않게 대중매체의 진정한 민주(주의)적 사용에 대립됩니다.” 즉 부르디외는 매중매체에 대한 순응이나 전면적인 부정이 아닌, 민주적인/비판적인 활용에 방점을 두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문제의 번역문을 그런 뜻으로 읽을 수 있는 것인지? 

 

 

 

 

이렇듯 넘쳐나는 오역의 사례들에서 유턴하기 전에 반드시 확인하고 지나가야 할 지점은 최근에 마구 뜨고 있는 슬라보예 지젝이다. 지젝의 자리에서는 또 무슨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올가을에 방한할 예정이기도 한 지젝으로서 불행한 것은 그 번역서들이 대부분 오역의 진창이라는 사실이다. 비교적 읽을 만한 그의 ‘영화책’들을 제외하고 그나마 가장 상태가 좋은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인간사랑)을 먼저 보자. “모든 이데올로기적인 보편성은, 그 통일성을 깨트리며 그 허위성을 드러내는 어떤 특별한 경우를 필연적으로 포함하고 있는 이상(理想) 또는 ‘허구’이다.”(49쪽) 축약하면, “모든 이데올로기는 이상 또는 허구이다”라는 것인데, 너무도 자연스러운 이 오역은 사실 역자의 것이라기보다는 교정자의 것이다(역자가 이런 정신나간 짓을 했을 리는 만무하다). 이상(ideal)으로 번역돼 있는 것은 사실 영어의 ‘so far as’(-인 한에서)이다. 짐작에, “모든 이데올로기는 ...포함하고 있는 이상, ‘허구’이다”라는 번역문에 교정자의 (과잉)친절욕이 개칠을 한 것이다. 바로 다음 문단에 ‘시장의 이상(理想)’(이때는 ideal을 번역한 ‘이상’이다)이란 말이 나오는 것도 이런 심증을 굳게 한다. 이 정도의 오역은 사실 어처구니없기는 해도 분통을 터뜨리게 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개역판까지 나온 <향락의 전이>(인간사랑)는 사정이 다르다.

역자 자신이 개역판의 서문에서 시인하고 있듯이 초판은 '몇 군데 오역'을 포함하고 있었다. 역자가 말하는 '몇 군데'라는 건 주로 대중문화에 대한 무지에서 나온 영화감독과 제목명의 오역인데(거의 맞는 게 없었다), 개역판에서는 이를 상당 부분 바로 잡았고, 그 점에 대해서는 (비록 기본이라 하더라도) 역자의 노고를 평가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게 거의 전부이다. 영화명과 주인공에 대해서도 '시라노'를 여전히 '키라노'로, 그의 여인 '록산느'는 '로잔느'라고 옮기고 있다. 그래도 이건 영어가 병기돼 있어서 눈치껏 읽으면 된다. 하지만, 멀쩡한 유고의 영화감독 '쿠스투리차'는 왜 '쿤스투리카'로 개명해놓고, 거기에 'Kunsturica'(406쪽)라고 병기까지 해놓는가? 그런데, 정작 문제는 이런 것들이 아니다. 역자는 본문의 내용에 대해서는 거의 의미있는 교정을 하지 않았다.

예컨대, 1장 시작부터 '부모의 성적 착취'(parental sexual abuse)를 역자는 '아버지의 성적 남용'(28쪽)으로 옮겼다. 그리고 '욕동이론과... 해석의 이중성'을 '욕동이론의 이중성'(29쪽)으로 옮기고, 정신분석에서의 '수정주의'를 줄곧 '개량주의'(30쪽 이하)로 옮겼다. '제2의 본성'(second nature)은 '이차적 자연'(33쪽)으로 옮기고, '억압의 모든 장벽을 제거하려는 요구'는 계속 '억압의 모든 장벽을 벗기려는 요구'로 옮겼다. '한순간이라도 멈춰서 생각해본다면'을 '한순간이라도 생각하기를 멈춘다면'(44쪽)으로 옮기고, '반계몽주의'는 '계몽주의'(170쪽)으로 옮겼다. 물론 이러한 지적은 부분적이다. 왜 그런가 하면, 이러한 부분들이 역자에게는 '몇 군데 오역'에 포함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책에 대해서 한 일간지 서평자는 “지젝은 라캉 정신분석학 이론에 충실하면서도 독창적이고 ‘재미있게’ 글을 쓰는 사람으로 이미 국내에도 널리 알려져 있다. 독자들은 지젝의 이 책을 통해 인간의 비밀인 향유의 세계를 탐험하는 모험을 만끽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무책임한 소리를 늘어놓은 바 있다(서평자들이 한심하게도 자주 잊어먹는 일은 서평의 대상이 원저가 아니라 번역본이라는 사실이다). 이 책을 읽는 일은 분명 모험이긴 하지만(그것도 굉장히 고된), 그 모험은 오역의 진창에서 허우적거리기이다. 물론 이 허우적거리기에서 일반 독자가 뭔가 '교양'을 얻어낼 확률은 거의 제로에 가깝다. 말 그대로 당신들의 향락인 셈이다.



 

 

 

믿지 못하겠지만, 그보다 더한 ‘향락’을 선보이는 책이 지젝의 신간 <믿음에 대하여>(동문선)이다. 책은 정말 믿을 수 없는 오역으로 가득 차 있다. '모세의 형상'을 '모자이크한 모습'으로 옮기기 시작하더니 '인도'를 전부 '인디언'으로 탈바꿈시키고, 하이데거의 '현존재'는 난데없이 '실존성'으로, '뉴에이지'는 '신시대'로 옮겼다(뉴에이지는 신시대가 아니다!). '진리의 정치'를 전부 '진실의 정치'로 옮기고, '대상 a'는 ‘대상’ ‘물질’ ‘사물’ 등 갈피를 못잡고 옮긴 걸로 봐서 역자는 라캉/지젝을 전혀 이해하고 있지 않으며 읽어본 적도 없어 보인다(무슨 사명감으로 번역에 나선 것인지?). 정말 경악스러운 대목. “라캉의 관심은 지배자에 관한 강좌로부터 당시 사회에서 주도적 논의 대상이었던 우주에 대한 강좌로의 이전에 있었다. 논점이 우주로 바뀐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38쪽)

전후좌우가 다 오역으로 도배돼 있지만, 이 대목은 정말 하이라이트이다. 믿기지 않을까봐 원서를 인용한다. “Lacan's interest is focused on the passage from the discourse of the Master to the discourse of University as the hegemonic discourse in contemporary society. No wonder that the revolt was located in the universities.”(30쪽) 중학생도 해독할 수 있는 단순한 구문이다. 라캉의 네 가지 (강의가 아니라) 담론(discourse)에 대한 약간의 배경지식만 갖고 있다면 말이다(라캉 입문서가 부족한 것도 아닌데). 해서 다시 옮기면, “라캉의 관심은 주인의 담론에서 현대 사회의 지배적 담론인 대학의 담론으로의 이동에 초점이 맞춰진다. 그 반란이 대학에서 일어났던 것은 전혀 놀랄 일이 아니다.”(여기서 ‘반란’은 아마도 68혁명을 가리키는 듯하다.) 역자는 무슨 생각에서인지(대문자라서?) ‘대학(University)’을 ‘우주’로 옮긴다. 라캉이 천문학자였단 말인가? ‘대학’이 ‘우주’로 바뀐 것이 역자에게는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닐지 몰라도 우리로선 놀라 자빠질 일이다. 게다가 이 놀라운 번역서에서 역자는 엄청난 누락도 서슴지 않는다. 번역서 52쪽(원서 45쪽) 밑에서 6행 ‘그러나’ 앞에는 2/3쪽(20행)이 누락돼 있다. 정말 집어던지고 싶은 책이다!

이런 식의 오역뒤지기는 아마도 한동안(어쩌면 끝없이) 계속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정도에서 끝내기로 하자(내게 주어진 분량을 이미 훨씬 넘어섰다). 좋은 번역서가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좋은 번역자/번역가가 사회적으로 대우받는 시대가 온다면, 물론 사정은 지금보다 훨씬 좋아질 것이다. 부르디외가 매번 강조하듯이 오역의 문제도 어쩌면 사회구조적인 문제일는지 모른다. 그 구조는 아마 금방 바뀌거나 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지/무책임하고 불성실한 오역들을 양산해내는 현재의 번역/출판관행에 면죄부가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결론적인 제안은 이렇다. 자기가 이해한 것을 이해한 만큼 번역할 것. 자기가 이해할 수 없는 번역에 대해서는 두눈 부릅뜨고 따져볼 것. 오역에 대해서는 가차없이 지적할/수정할 것. 이런 행위자들의 노력에 대해서 구조도 언젠가는 감복할 날이 오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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