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괜찮은 사람입니다
히가시다 나오키 지음, 김난주 옮김 / 흐름출판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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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저자와는 경우가 다르지만, 내 가까이에도 보통 사람과 조금 다른 특별한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은 우리 이모인데, 어린 시절을 할아버지 댁에서 보낸 나는 이모와 둘도 없는 친구였다.  유난히 남들과 소통이 안 되고 사교성이 없었던 나는(심각하게 어두운 아이였다) 이모와 보내는 시간이 참 편했는데, 처음에는 함께 공부하고 있었지만 어느새 내가 이모를 가르치고 있는 모습에서 이모가 남들과 조금은 다르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어른의 외양에 아이의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이​ 이 세상에서 살아가기가 얼마나 힘든지를 옆에서 지켜보며 나는 이모가 많이 안쓰러웠다. 하지만 이모는 자신이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굉장히 노력하던 사람이었다. 예를 들어 우리는 덧셈 공부를 주로 했는데, 이모는 자신이 활용할 수 있는 숫자 안에서 내가 가르치는 것을 열심히 배웠다. 그리고 틈만 나면 공책을 펼쳐 무언가를 옮겨 적었다. 이모의 세계에서는 어쩌면 가장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사람일지도 모를 만큼 말이다. 하지만 세상은 어른의 몸을 가진 사람에게는 늘 어른의 사고방식을 요구했다.


어린 시절을 이모와 함께 보낸 덕분에 남들과 조금 다르게 태어난 사람을 받아들이는 것은 자연스럽게 배운 듯하다(아이러니하게도 나는 나와 같은 보통 사람들의 사고방식을 오히려 더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 같다). 이번에 《나는 괜찮은 사람입니다》를 읽게 된 것은 이모가 많이 생각나서이기도 하다. 남들과 다른 방식으로 소통하며 살아간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글을 통해 조금 더 확실히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자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늘 궁금했을, 자폐아를 둔 부모님들은 아마도 이 책을 통해 그 궁금증이 많이 해소되었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러고 보면 이 책의 저자는 자폐인들이 세상과 소통할 수 있도록 다리 역할을 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 아닐까. 참 멋진 사람인 것 같다.


내가 이 글에서 전하고 싶었던 것은 그 사람만이 아는 세계가 있다는 점입니다.

시각을 조금 달리하면 모든 것이 전혀 다른 방식으로 파악되지 않을까요.

내가 아무리 높이 뛰어도 그것은 순간의 일일 뿐, 이내 땅으로 내려오고 맙니다. 왜냐하면 몸이라는 추가 있기 때문이죠.

그러나 사고는 한없이 자유롭습니다.

아무런 제약 없이 하늘 저편을 날아오를 수도 있고, 깊은 바다에 잠길 수도 있습니다.

나와 함께 비상해 보면 어떨까요. 여러분도 반드시 새로운 '자유'를 얻을 수 있을 겁니다.

- P5 프롤로그 중에서


이 작품은 프롤로그에서부터 이렇게 멋진 말이 등장한다. 마음만큼은 내가 원한다면 한없이 자유로울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마음의 중력에 휩쓸리곤 한다. 이 세상에서 마음만큼 공평한 것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 스스로 불공평한 길을 선택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멋진 문구를 만나는 순간만큼은 마음이 자유로워지지 않을 수가 없다. 특히, 이렇게 내가 좋아하는 '단순하지만 많은 의미를 담고 있는 말'이 한가득 모여 있을 때는 말이다.


저자는 실제로 그림책 작가로도 활동하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이 작품도 어른을 위한 동화 같은 느낌을 많이 받았다. 무민 서평에서 썼듯이 나는 어르듯이 말해야 알아먹는(?), 말 안 듣는 삐딱한 어른이기 때문에 저자의 글이 내 눈높이에 잘 맞았던 것 같다. 어쩌면 한없이 어려울지도 모를 추상적인 내용을 조곤조곤 쉽게 설명했다는 점에서 작가로서의 저자의 모습을 계속해서 지켜보고 싶어졌으니 말이다.


어른인 이모가 아이의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기에 겪었던 일들을 지켜보면서 나는 그러한 세상을 바라보는 이모의 생각이 궁금해서 질문을 많이 던지는 편이었다. 하지만 이모의 생각은 여느 사람과 다름없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이모의 세계에서 통하는 언어를 사용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다른 이들의 눈에는, 속된 말로 표현하자면 '모자란다'고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했을 때 이모의 눈에는 우리가 '쓸데없이 복잡하고 심각한 인간들'로 보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저자가 얼마 전에 블로그에 좋은 소식을 올렸는데, 마침내 사람들에게 '응' 하고 대답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그의 말에 따르면 사람들의 말에 언제 반응을 해야 할지 몰라서가 아니라 지금까지는 대답을 하고 싶어도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배에 힘을 주는 방법으로 '응'이라는 대답을 할 수 있게 되었다는 그의 보고에 축하한다는 코멘트를 달면서 일본어를 배워서 참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웃음). 그리고 그의 책을 읽고 감동 받은 독자가 한국에도 있다는 사실을 전하고 싶어서 이번에 한국에 출간된 작품을 읽고 많이 배웠다는 말과 나오키 씨는 굉장한 재능을 가지고 있다는 말도 덧붙였다.


히가시다 나오키의 블로그

http://higashida999.blog77.fc2.com/


자폐아 아들을 둔 작가 데이비드 미첼과 히가시다 나오키의 이야기

주위 사람들을 둘러보면 우리는 저마다 미묘하게 다른 소통법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자폐인들의 소통 방식은 그 차이가 무척이나 도드라져서 우리에게 생소하게 보이는 것이 아닐까. 일반 사람들의 시선에서 보자면 그들의 언어는 암호로 가득 차 있으니 말이다. 저자가 앞으로도 그들의 세계와 우리의 세계를 이어주는 역할을 계속해 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나 또한 그들이 이 세상을 어떤 시선으로 보고 있을지 많이 궁금하니 말이다.


http://blog.naver.com/nahh1290/220396796707

 

사람은 누구든 마음의 상처를 안고 살고 있지 않을까요.

그 상처가 이내 낫는 사람도 있겠지만 시간이 오래 흘러도 아물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나처럼 어둠 속에서 계속해 비명을 지르는 사람도 있습니다.

왜 이런 차이가 나타나는 것일까요.

아마도 사람의 마음이 모호하고, 언제나 변화하기 때문이겠지요.

마음은 조금도 나를 기다려주지 않습니다. 고민하고 있을 때조차 나는 내 마음에 휘둘리고 맙니다.

- P19 중에서

식물의 일생은 인간과 비슷하지만, 인간은 식물처럼 살 수 없습니다. 그러나 생각을 중단하고 자연의 일부가 되면 그때야 비로소 보이는 세계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 P31 중에서

질문을 매끄럽게 하지 못한 사람도 평소 대화에서는 별다른 곤란이 없을 겁니다. 마찬가지로 자신의 기분을 명확하게 전하지 못한다고 해서, 말을 하지 못하는 장애인의 마음속에 언어가 없다고 쉽게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 P107 중에서

마치 슬프고 괴로운 일 따위는 하나도 없는 것처럼 상상 속의 나는 즐거운 표정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부럽지 않습니다. 상상 속의 나 역시, 보이지 않는 곳에서 울고 또 후회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상상이란 차원이 다른 가공의 세계입니다.

나의 행복은 현실 세계에서만 찾을 수 있습니다.

- P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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킨포크 KINFOLK Vol.10 킨포크 KINFOLK 10
킨포크 매거진 지음, 문수민 옮김 / 디자인이음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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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한때, 여자로서 나이를 먹는다는 사실이 굉장히 두려웠던 적이 있다. 자발적으로 30대를 맞이했으면 좋았으련만 자리를 내놓지 않겠다고 버티다가 30대로 밀려났을(?) 때는 왠지 모르게 억울한 기분마저 들었다. 젊음이 계속되면 좋겠지만, 늘 그렇듯 우리는 누군가에게 그 나이를 비워 줘야 하고, 새로운 나이에 적응해야 한다. 그런 이유에서인지 지금은 20대의 누군가를 흐뭇한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는 여유를 되찾게 되었다.

 

여자로서 나이를 먹는 일은 여전히 조금 두렵기도 하지만, 지금의 일을 하며 나이를 먹어 간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내 나이를 '기꺼이' 받아들이게 된다. 오히려 요즘은 이 일이 좋아서인지 '얼마든지'라는 기분으로 즐겁게 나이를 받아들이고 있다.


 

이렇게 긍정적인 시점에서 바라보면 노년이란 얼마나 낭만적인가. 물론 이건 그저 내 상상일 뿐이며 노년이 실제로 어떤 느낌인지 나는 아직 모른다. 내가 사랑하는 남자의 얼굴에 검버섯과 주름살이 생겨나는 과정을 오롯이 지켜보는 모습을 상상한다. 그가 기억하는 것을 내가 잊어버리고, 그가 잊은 것을 내가 기억하는 모습을 상상한다. 온갖 건망증에 대해 용서받는 모습을 상상한다. 머리로는 잊어버린 것을 몸이 기억하는 모습을 상상한다.  -p13

 


이번 KINFOLK는 '나이'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이번 호 주제가 마음에 들어서 발간되자 바로 주문했기에 아껴서 읽고 싶은 마음에 작업을 확실히 마무리 지을 때까지 표지를 넘겼다가 덮기를 수없이 반복했다. 하지만 사실, 나는 나이에 대해 그리 잘 알지 못한다. 영원히 계속될 것 같던 20대가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30대가 되면서 본격적으로 나이를 생각하게 되었기에 아직은 늙음을 생각하기보다 '나도 늙을 수 있겠구나' 하는 막연한 상상을 할 뿐이다. 내가 생각해도 바보 같지만, 20대가 영원히 계속될 줄 알았기에 지금도 나는 '내가 정말 노인이 되긴 하는 걸까?' 하고 엉뚱한 의심만 하고 있다. 나는 가끔 당연한 진리를 의심할 때가 있다. 왜 그럴까.

 

 

 

 

 

 

 

 

사실 내가 요즘 들어 부쩍 나이를 생각하게 된 이유는 나와 늘 함께 있는 우리 강아지들 때문인 것 같다. 나보다 '훨씬 어렸던' 아이들이 이젠 나보다 '훨씬 나이가 들어' 내가 쫓아갈 수도 없는 시간을 보내는 모습을 보면서 이 아이들의 나이를 내가 대신 걱정하고 있는 것이다. 요즘은 강군들의 나이를 말하는 것도 세는 것도 겁이 나서 누군가가 아이들의 나이를 물을 때면 몇 년째 같은 나이만 말하고 있다. 나이를 잊고 지내다 보면 강군들이 더 오래 살아 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말이다.

 

 

 

 

 

 

 

 

 

 

 

 

 

 

 

 

 

 

 

 

 

 

 나이 든다는 것은 빙하가 움직이듯 느리게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몇몇 빙하는 하루에도 수십 미터씩 이동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가. 눈앞의 시간이 멈춰 있는 것처럼 여겨질지도 모르지만, 사실 세계는 지팡이를 짚은 것처럼 한 번에 한 발짝씩 비척비척 나아가고 있다.

 

 

'나이 먹음'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늙음'과 그 늙음의 끝에 기다리고 있을 '죽음'을 모두가 두려워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 또한 '나이를 먹는 일' 자체는 가슴이 설렌다. 20대의 들끓던 마음이 가라앉고, 가슴에 무언가 가득 찬 느낌이 들고…… 내적으로 여물어 갈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감이 있기 때문에 '늙음'과 '죽음'을 덜어낸 '나이'는 기꺼이 받아들이고 싶은 마음이다. 아니면 적어도 '죽음'만이라도 덜어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번 호 KINFOLK로 위로를 많이 받은 듯하다. KINFOLK를 보면 잡지를 가장한 '철학서'라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그리고 이번 호는 유난히 그런 느낌이 더 들었던 것 같다. 책을 읽다 보니, 조만간 다가올 30대 중반, 언젠가 다가올 30대 후반, 오지 않을 듯하지만 어김없이 찾아올 40대와 그 이후의 나이들, 이 시간들을 차곡차곡 기록해 나가면서 늙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나의 시간들이 내 몸에 머물다 간 흔적을 남길 테지만 어딘가에 글도 남길 거라는 생각을 하면 왠지 즐겁게 나이를 먹을 수 있을 것 같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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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영혼의 부딪힘 - 명화로 배우는 감정의 인문학
김민성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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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고갱 <우리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김아타 <ON AIR Project> 

 

 

한때, 고갱의 <우리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와 김아타의 <ON AIR> 프로젝트로부터 매일 위안을 받았던 적이 있다. 하루 단위도 아닌 시간 단위로 마음이 급변하는 탓에 그 변화를 따라가려고 애쓰다 숨이 찰 때면 고갱이 내 마음을 달래 주었고, 집착에 목을 스스로 조르는 듯한 느낌이 들 때면 김아타의 작품이 흘러넘치는 나의 욕망을 덜어내 주었다.

 

마음은 시시각각 제 모습을 달리하기에 나는 그때그때 즐겨 찾는 그림이 다른 편이다. 조증이 아닐까 의심스러울 만큼 꿈으로 가슴 들끓던 20대 초반에는 화려한 색채의 샤갈에 열광했고, 한창 사랑에 빠져 있던 20대 중반에는 화려하고 요염한 여성이 등장하는 클림트에 집착했다. 그리고 등 떠밀려 20대 후반이 되었을 때는 제목에서부터 고뇌가 느껴지는 고갱과 붓터치에서부터 그의 숨 막히는 열정이 느껴지는 고흐에게 위로받았다. 그리고 30대가 된 지금은 샤갈이 다시 좋아지고 있다.

 

이 책 〈그림 영혼의 부딪힘〉은 그들의 인간적인 면모에 초점을 맞추고 이야기를 풀어 나간다. 한정된 페이지에 스물네 사람의 대가들을 어떻게 다 담아냈을지 책을 받아 들기 전부터 나는 궁금했다. 사실, 이들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자면 한 사람에 책 한 권을 할애해도 부족할 수 있다. 게다가 저자가 무언가를 담아내고자 하는 욕심이 많은 사람이라면, 이야기가 잘못된 길로 들어설 가능성도 있었다. 하지만 저자는 욕심 없이 담백하게 한 사람 한 사람씩 소개해 나간다. 또한, 우리가 그들의 대표작으로 한 번쯤 마주치게 되거나 화제에 오를 만한 작품을 중심으로 그것이 화가의 인생의 어느 시점에서 탄생되었는지를 설명하고 있었기에 나의 기대치를 훌쩍 뛰어넘었다.

 

미술사는 거시적 관점보다는 사람의 마음을 묶어 놓은 영혼의 역사답게 미시적 관점으로 세상을 본다. 매우 주관적이고 감정적이며 사리분별이 안 될 때도 많다. 이는 미술사를 이끄는 작가들의 영혼이 매우 주관적이고 감정적이며 사리분별이 안 될 때가 있다는 말과 같다.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이 지점이 미술사를 인문학의 기초로 삼는 이유 중 하나다. 화가들이 평범한 우리에게 작품을 통해서 인간의 감정에 관한 정보를 눈으로 확인시켜주기 때문이다. 미술사를 안다는 것은 사람을 알아간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림을 본다는 것은 열망하는 화가의 영혼의 부딪힘을 목격하는 매우 특별한 일이기도 하다.

─P5 프롤로그

 

나는 예술가란 여느 인간보다 더욱 인간답기에 예술가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감정을 내치지 않고 공평하게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 감정에 휩쓸리기를 두려워하지 않으며 설사 두렵다고 하더라도 기꺼이 뛰어드는 사람이 예술가가 아닐까. 또한 우리 모두가 예술가의 기질을 타고나지만 감정을 하나씩 억눌러 가는 것에 익숙해지며 예술가가 되기를 스스로 거부하거나 포기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곤 한다. 인간의 감정을 순수하게 그대로 지켜나가는 이들이 바로 예술가이기에 예술가란 여느 인간보다 더욱 인간다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들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하지만 작가보다 화가가 먼 존재로 느껴지는 이유는 화가의 언어는 그림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일상에서 소통할 때 사용하지 않는 도구로 그들이 우리에게 말을 건네기에 우리는 그들의 희로애락이 담긴 그림 언어를 부담스러워하는 것이 아닐까.

 

나는 이 책을 받아 들었을 때, 만나기를 애타게 기다리던 작가들을 먼저 찾아갔다. 서둘러 만나고 싶은 마음에 페이지를 넘기는 손길을 재촉하기도 했다. 나는 ‘감정의 기복이 너무 심해 힘들 때’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 고흐를 먼저 만났고, ‘밖으로 나가야만 비상구를 찾는다’는 부제가 붙어 있는 뭉크를 뒤이어 만났다. 그런 다음, 다시 첫 장으로 돌아와 한 사람 한 사람과 천천히 대화를 나누었다.

 

세상에서 가장 확실한 진리는 ‘언젠가 사람은 죽는다’는 것이다. 움베르토 에코는 인간이 죽음을 극복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유일한 두 가지가 책을 쓰는 일과 아이를 낳는 일이라고 했다. 그런가 하면 카뮈는 우리가 살아야 하는 이유라고 생각하는 것이 동시에 우리가 죽어야 하는 좋은 이유라고도 했다. 그러나 인간은 가능하면 죽음을 피하고 싶어 한다. 아니 죽음의 방문을 늦추고 싶어 한다는 표현이 더 옳겠다. 피할 수도 없고 아무리 애쓴다고 해도 반드시 맞이해야 하는 죽음. 죽음은 언제나 관망될 뿐 겪는 자의 증언을 들을 수 없으니 더욱 두렵다. 왜 사람들은 항상 때를 놓치고 후회라는 것을 할까? 밀란 쿤데라의 말처럼 정말 우리는 언제나 두 눈에 붕대를 감고 현재를 통과하는 어리석은 존재라서 그런 것일까? 왜 인간은 시간이 흘러 붕대를 벗고 과거를 자세히 들여다보면서 그제야 비로소 살아온 날들을 이해하고 그 의미를 깨닫는 뒷북치는 멍청이일까?

─밖으로 나가야만 비상구를 찾는다(신경쇠약, 환경으로부터 받은 저주: 뭉크)

 

어렸을 때, 죽음이란 실존하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연극이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다. 하지만 죽음이 내 주변에서 일어난 순간, 그것이 현실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나는 그때부터 지금까지 인간의 마지막은 왜 죽음이어야 하는지를 생각하며 일주일에 두세 번은 훌쩍이고는 한다. 왜 죽음으로 세상이 끝나야 하는 것일까. 죽음이 시작이고 탄생이 끝일 수는 없을까. 이 메커니즘이 두려우면서도 궁금한 나는 여전히 죽음에 대해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 하지만 죽음을 늘 곁에 두고 살아가면 인간은 피폐해질 수밖에 없다. 생각의 둘레에 벽이 생기고 그 벽이 좁혀져 오며 자신을 가둬 버리는 것이다. 이때, 어떤 생각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이 글의 부제처럼 자신의 마음이 밖으로 나가야 한다. 그래야만 비상구를 찾을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요즘에는 미술관을 찾을 때면 큐레이터에게 설명을 들을 수 있는 시간을 미리 확인하고 가는 편이다. 물론, 큐레이터도 관람객도 뜸한 시간을 골라서 갈 때도 있다. 그럴 때는 그림의 언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잘못 받아들이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하지만, 소통의 오해에서 오는 대화의 재미도 상당하다. 하지만 되도록 큐레이터가 있는 시간을 찾는 이유는 그들이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그림 언어를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옮겨 주는 통역가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미술 통역가인 그들 덕분에 거리가 꽤 가까워진 그림이 있었기에 나는 그들의 직업을 정말 존경한다. 사실, 이민성 큐레이터가 기획한 <클림트 전>은 내게 쓰린 기억으로 남아 있다. 클림트를 한창 좋아하던 그 시기에 외국에 머물고 있어서 전시회 소식을 기사로 접하며 마음을 달래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렇게 클림트 전을 기획한 큐레이터의 글을 읽을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감사하다. 그리고 언젠가 저자의 통역으로 그림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꼭 찾아왔으면 하는 바람이다.

 

여느 인간보다 더욱 인간다웠기에 예술가가 된 이들. 그들이 자신의 희로애락을 온전히 담아낸 그림이 지금은 인간의 감정과 삶을 논하는 근거가 되고 있다. 굳이 우주까지 범위를 넓히지 않아도 우리 자신부터가 미지의 존재이기에 인간을 연구하는 학문은 앞으로 더욱 활발해지리라고 생각한다. 그러한 점에서 그림에는 감정에 가장 솔직했던 이들이 우리에게 전하는 말들이 담겨 있기에 우리가 그들에게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다가가고자 하는 의지만 있다면 여느 학문보다 더욱 편안하게 접근할 수 있으리라고 본다. 가까이 다가가도 그들의 말이 들리지 않거나 이해가 되지 않는다면, 《그림 영혼의 부딪힘》의 저자와 같은 미술 통역사의 힘을 빌리는 것 또한 좋은 방법일 테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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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센셜리즘 - 본질에 집중하는 힘
그렉 맥커운 지음, 김원호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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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의 끝자락을 악착같이 붙들고 있던 무렵, 꿈이 지나치게 많은 것은 결국 꿈이 없는 것과 같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하고 싶은 일이 너무나 많았던 나의 20대, 누구보다 꿈이 많으니 서른이 되기 전에 뭐든 하나는 되어 있겠지 하고 내심 생각했지만, 수많은 꿈들이 내 인생의 정체성을 모호하게 만든 결과, 나는 아무것도 되지 못한 채 서른을 맞이해야 했다. 그리고 꿈과 세상에 실연당한 기분으로 홧김에 내 꿈들을 내다버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동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모시고만(?) 있던 꿈들을 과감히 벗어던지자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길이 보이기 시작했다.

 

 

본질적인 것은 극히 일부분에 불과하며, 잡음을 걸러내고 본질을 찾아내는 것이 자신이 해야 할 일이라는 게 그의 평소 신념이었다.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 비본질적인 것들을 제거하는 데에는 용기가 필요했다. -p16

 

 

지금 생각해 보면 벼랑 끝에 몰리자 무의식적으로 나온 이 행동이 에센셜리즘에 가까웠던 듯하다. 나는 비본질적인 것들을 걸러내기 위해 ‘용기’가 아닌 ‘분노’를 발휘했다는 점에서 살짝(?) 어긋났지만 말이다.

 

 

분노로 인해 일시적 에센셜리스트가 되었던 나는 비본질적인 꿈들을 덜어내고 진짜 내 꿈을 찾게 되자 다시 비에센셜리스트였던 본모습으로 돌아왔다. 여전히 관심 분야가 폴더 두세 개로는 정리할 수 없을 만큼 다양했기에, 내 욕구를 충족시키다 보면 하루라는 한정된 시간으로는 부족해서 늘 시간에 허덕여야 했고 내일이라는 시간을 자꾸 끌어 쓰게 되었다. 그러자 내 시간의 부채는 늘어갔고, 시간은 나를 마구 독촉하기 시작했다.

 

 

그런 나에게 《에센셜리즘》의 저자는 이렇게 말했다.

(서술어는 서평의 분위기에 어울리게끔 수정했습니다.)

 

 

때로는 뭔가를 하지 않는 것이 뭔가를 하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p61

경쟁적이고 도전적인 사람에게는 열심히 일을 하는 것 자체는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자신을 극한까지 밀어붙이는 것은 오히려 쉬운 일입니다. 그들에게 진짜 어려운 일은 일의 속도를 조절하는 것입니다. p122

에센셜리스트는 내일 더 큰 성취를 이루어내기 위해서라면 오늘 한 가지의 일을 더 적게 하는 편을 선택합니다. 이것이 바로 현명한 선택과 포기이지요. -p124

 

 

이 말을 들은 나는 저자가 건넨 말 가운데 ‘무언가를 하지 않는 것’에 대한 의미를 생각해 보았다. 내 인생은 늘 물 한 모금 마실 틈도 없이 숨 가빴다. 노력과 대가는 정비례라고 멋대로 믿어왔고, 그 기대를 보답 받지 못하면 세상을 원망하기도 했다. 무언가를 하지 않는 것은 그림으로 치면 여백에 해당하지 않을까. 그림에 있어서 여백을 남기는 행위는 그림을 그리는 행위만큼이나 중요하다. 화가가 크기가 한정된 캔버스 안에 너무 많은 것을 담으려다 여백을 간과하면 그 그림은 정체성을 잃게 되기 때문이다.

 

 

저자는 나에게 에센셜리스트가 되려면 모든 것을 잘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비본질적인 것을 덜어내라고 했지만, 일시적 에센셜리스트였던 나는 본질적인 것을 추구하는 방법과 비본질적인 것을 덜어내는 방법이 정확하게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자 저자는 이렇게 답했다.

 

 

6장에서 에센셜리스트가 되기 위해서는 우리가 언론기자가 되어야 한다는 말을 했는데, 이는 다수의 비본질적인 것들로부터 극소수의 본질적인 것들을 가려내기 위해 질문을 하고, 정보를 수집하고, 결론을 유추해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찬가지로 에센셜리스트가 되기 위해 우리는 삶의 편집인이 되어야 하는데, 이는 우리의 인생에서 비본질적인 것들을 전부 삭제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요. -p203

편집인의 임무는 잘라내고 요약하는 것 외에 교정하는 것도 있습니다. 작게는 어법의 오류를 바로잡기도 하고, 좀 더 크게는 저자의 주장 가운데 논리적 오류를 바로잡기도 합니다. 이와 같은 교정 작업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편집의 대상이 되는 작품의 본질적인 주제, 혹은 궁극적인 목적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일과 삶에서도 우리가 추구하는 본질적인 목표가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어야 그러한 목표로 나아가는 과정을 바로잡을 수 있는 것이지요. -p209

 

 

우리는 오직 현재에만 존재합니다.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현재뿐이지요. 물론 우리는 과거로부터 배우고 미래를 상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무언가를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현재 뿐입니다.

비에센셜리스트는 과거의 성공이나 실패, 미래의 도전이나 기회에 지나치게 매몰되어 정작 현재의 순간을 자주 놓칩니다. 과거나 미래의 일 때문에 현재에 집중하지 못하는 것이지요. 비에센셜리스트는 온전하게 현재를 살지 못합니다.

반면에 에센셜리스트는 현재에 집중합니다. 크로노스가 아닌 카이로스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에센셜리스트는-과거나 미래가 아닌-현재 시점에서 가장 중요한 일에 집중합니다. -p285

 

 

나는 인생의 편집자로서 어떤 사람일까? 카메라에 많은 장면을 담으려 하고 일단 찍은 필름은 어떻게든 활용하고 싶어 하는 편집자가 아닐까. 그리고 나의 인생이라는 영화를 보는 관객조차 정신없고 숨 가쁘게 만드는 편집자가 아닐까. 그렇다면 내 관객들은 이미 모두 자리를 떴을지도 모른다. 한두 명 정도 아직 자리에 남아 있다면 그들은 아마 졸다가 영화관을 뛰쳐나갈 타이밍을 놓친 것이라 생각한다. 몇 년 전에 본 영화가 그랬다. 작품명을 밝힐 수 없는 그 영화는 미술감독이 만든 영화답게 영상미는 최고였지만, 쉴 틈 없이 쏟아져 들어오는 현란한 영상에 눈이 피곤할 지경이었다. 영화를 보고 난 후에 내 감상평은 ‘감독이 너무 많은 것을 작품에 담으려고 한 게 역력하다’는 것이었다. 실제 영화도 그러하거니와 인생이란 영화에서도 완급 조절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관객뿐만 아니라 그 영화를 함께 보던 감독인 나조차 욕을 하며 뛰쳐나가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이 책의 저자는 에센셜리스트에 대한 정의와 본질적인 소수를 구분해내는 방법과 비본질적인 것을 어떻게 버릴 것인지를 차례대로 말한다. 책을 읽다 떠오른 궁금증을, 다음 페이지를 넘기면 저자가 기다렸다는 듯 바로 해소해 줄 만큼 그가 읽는 이의 생각의 흐름까지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즉, 저자는 궁극의 에센셜리스트다운 면모를 이 책에서 확실히 드러낸 것이다.

 

 

사실, 나는 자계서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머리로는 십분 이해하지만 행동으로 어찌하지 못하는, 이른바 몸과 마음이 따로 노는 내 현실이 책에 확인사살당하는 듯한 느낌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책 《에센셜리스트》는 마치 나를 위한 맞춤형 자계서처럼 나조차 이해할 수 없었던 내 행동의 이유를 정확하게 꼬집어주는 듯해서 이 책을 읽는 동안 정신없이 밑줄을 그어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책을 덮을 쯤에는 수십 개의 플래그잇이 붙어 있기도 했다(실제로 책을 읽는 동안, 이러다 처음부터 끝까지 밑줄을 긋고 플래그잇을 붙이는 게 아닌가 하고 살짝 걱정했다). 그만큼 인생에 도움이 되는 알찬 문장들로 구성된 책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수많은 문장이 내가 에센셜리스트로서 한 발자국 내딛는데 혼란을 초래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런 나를 위해 저자는 짧은 문장으로 내 염려를 말끔히 해소해 주었다.

 

 

“나는 선택할 수 있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모든 것을 다 해낼 수는 없다.” 이 세 가지 단순한 진실을 받아들일 때 우리는 정말로 중요한 것들을 추구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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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자의 딸들
랜디 수전 마이어스 지음, 홍성영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4년 9월
평점 :
절판


 

 

두 자매 룰루와 메리는 가해자의 딸이자 피해자의 딸이다. 하지만 세상은 왜 두 사람을 가해자의 딸이라는 시선으로만 보았을까. 그리고 두 사람은 왜 피해자의 딸이 아닌 가해자의 딸로 인생을 살아야만 했을까. 이 작품의 제목부터가 그녀들이 겪어왔을 마음의 고통을 그대로 담아내는 듯해서 마음이 짠했다.

 

 

차라리 타인이었다면 평생 용서하지 않아도 용납될 일이 가족이라는 이유로 용서를 강요받을 때가 있다. 가족이기 때문에 가해자와 피해자를 가리는 일이 쉽지 않은 가정폭력. 《살인자의 딸들》에 등장하는 룰루와 메리는 가정폭력의 가장 큰 피해자임에도 온전히 피해자로 살아갈 수 없었다. 주변 사람들은 이 두 사람을 아버지의 손에 어머니를 잃은 가여운 아이들이 아닌 살인자의 딸이라는 시선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열 살을 앞둔 룰루는 아버지를 집으로 들이지 말라는 어머니의 말을 어기고 아버지에게 문을 열어 준다. 룰루의 악의 없는 그 판단이 그녀를 평생 동안 괴롭히게 될 사건의 시작이었다. 한순간의 분노로 어머니를 찌르고 다섯 살이던 동생 메리마저 죽이려 시도하다 실패한 아버지. 아버지를 말려줄 사람을 부르러 갔던 룰루는 가족들의 피로 난장판이 된 집 안과 맞닥뜨린다. 이 날을 경계로 아버지를 향한 두 사람의 태도는 극명하게 나뉜다. 하지만 상황에 반응하는 방식만 달랐을 뿐, 두 사람이 마음에 품고 있던 슬픔과 두려움은 같았으리라고 생각한다. 두 사람은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늘 대립하고 신경을 곤두세웠지만, 자신을 진심으로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서로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기에 서로의 손을 놓지 못한 것이 아닐까. 그 후, 메리는 아버지에 대한 두려움과 자신을 낳아준 부모이기에 버릴 수 없다는 연민으로 아버지가 수감된 교도소를 꾸준히 방문하고, 룰루는 자신이 아버지에게 문을 열어 주었기 때문에 끔찍한 사건이 벌어졌다는 죄책감과 아버지에 대한 증오로 자신의 인생에 아버지는 원래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양 철저히 새로운 인생에 집중한다. 그리고 세월이 흐를수록 두 사람의 생각의 차이로 인한 갈등은 심해지고, 그 갈등은 아버지의 출소가 결정되자 극으로 치닫게 된다.

 

 

《살인자의 딸들》은 두 자매의 시점에서 번갈아 서술하는 형식을 취한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두 자매는 나이를 먹어갔지만 정신적으로는 여전히 성장하지 못한 채 그 자리에서 맴돌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나마저 이 두 사람을 재촉하고 비난할 수는 없었다. 아버지를 용서하고 모두가 행복해지는 드라마틱한 결말은 바라지도 않았다. 책을 덮을 때까지 이 두 사람이 그 사건에서 정신적으로 조금도 벗어나지 못해도 괜찮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이 작품은 전체적으로 담담하다. 두 사람의 감정이 폭발할 듯하면서도 절대 극으로 치닫지 않는 모습이 여느 현실보다 더 현실적이었기에, 오히려 내가 사는 현실이 소설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결말 또한 조금은 희망을 주는 듯하면서도 또렷하지는 않았다. 그렇기에 답 없는 갈등이 계속 되리라는 작가의 메시지가 확실히 전해져 오는 것 같았다.

 

 

가끔은 아침에 일어나 내가 두 딸의 엄마이자 남편이 있는 아내라는 사실에 화들짝 놀라곤 한다. 장롱이나 방 안에 틀어박히려고 하는 고아가 아니라 아늑한 침실에서 잘 정돈된 지하실까지 돌아다닐 수 있는 엄마라는 사실이 놀라웠다. 이 집에서 엄마와 아내로 십 년을 넘게 살았지만 아직도 내 세상의 모든 모퉁이까지 성큼성큼 나아갈 방법을 알지 못했다.

덫에 갇혀 있으면서도 나는 메리가 바로 옆집에 산다는 사실 때문에 마음이 편안해지곤 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지만, 내게 두 딸이 있다는 현실과 뉴욕 주 교도소에 숨겨진 아빠가 있다는 사실이 때때로 마음속에서 천둥이 치듯 충돌했다. 엄마는 내 어린 시절의 아름답지만 화를 내는 모습으로 여전히 내 마음속에 살아 있었다. 나는 엄마와 나의 관계를 내 딸들에게 감추어야 했다. 그리고 더 서글픈 건, 좋은 엄마가 되는 방법을 생각해 보고 모성애가 무엇인지 생각해 볼 때 엄마와의 기억이 아무 소용도 없다는 사실이었다.

-p283 마흔 무렵의 룰루

 

 

동생 메리의 시선에 언니 룰루는 그 일을 깨끗이 잊고 성공과 행복을 다 가진 것처럼 보였지만, 룰루는 여전히 그 시간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현실과 과거가 분리된 인생을 살고 있었다. 그 결과 자신의 두 딸들에게 할아버지는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는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었고, 그로 인해 메리와의 충돌은 더해갔다. 하지만 어떤 사건을 계기로 할아버지가 할머니를 술김에 살해하고 교도소에 들어갔다는 사실을 알게 된 두 딸은 그들만의 방식으로 그 현실을 받아들인다.

 

 

루비는 고개를 들지도 않고 오목한 그릇에 담긴 팝콘을 한 움큼 집으며 말했다. “그냥 게임하면 안 될까요?”

언니와 난 거짓말로 인해 생긴 혼란을 풀어내려고 함께 노력했지만, 아이들은 모든 거짓말을 다시 봉합하려는 것 같았다. 아이들은 우리가 제안하는 모든 걸 거부했다. 오랫동안 자동차 사고로 죽은 줄 알았던 외할아버지가 외할머니를 살해한 죄로 교도소에 복역 중이라는 얘기가 해리 포터를 읽는 것보다 흥미로울 리 없었다. -p446 메리

 

 

이 장면에서 나는 제2의 룰루와 메리를 보는 것 같았고, 그 사건은 룰루와 메리의 고통만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룰루의 두 어린 딸들은 앞으로 그 일을 어떤 식으로 받아들이며 살아갈까. 엄마인 룰루가 했던 거짓말을 여전히 고집하며 할아버지는 하늘나라에 갔다고 스스로에게 세뇌시킬 수도 있을 것이며, 이모인 메리처럼 할아버지에 대한 두려움과 핏줄이라는 정에 이끌려 가족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을 것이다.

 

 

고통의 농도는 그 순간에서 멀어져가는 시간만이 희석시켜 줄 수 있다. 하지만 그 고통의 원인이 나의 가족이라면 고통의 농도가 옅어지는 일은 영원히 없다는 뜻일까. 피해자의 딸이자 가해자의 딸인 그 두 사람의 끝나지 않을 고통이 제목에서부터 느껴져서 나는 이 작품을 감상하는 동안 《살인자의 딸들》이라는 제목에 집착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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