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영혼의 부딪힘 - 명화로 배우는 감정의 인문학
김민성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4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고갱 <우리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김아타 <ON AIR Project> 

 

 

한때, 고갱의 <우리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와 김아타의 <ON AIR> 프로젝트로부터 매일 위안을 받았던 적이 있다. 하루 단위도 아닌 시간 단위로 마음이 급변하는 탓에 그 변화를 따라가려고 애쓰다 숨이 찰 때면 고갱이 내 마음을 달래 주었고, 집착에 목을 스스로 조르는 듯한 느낌이 들 때면 김아타의 작품이 흘러넘치는 나의 욕망을 덜어내 주었다.

 

마음은 시시각각 제 모습을 달리하기에 나는 그때그때 즐겨 찾는 그림이 다른 편이다. 조증이 아닐까 의심스러울 만큼 꿈으로 가슴 들끓던 20대 초반에는 화려한 색채의 샤갈에 열광했고, 한창 사랑에 빠져 있던 20대 중반에는 화려하고 요염한 여성이 등장하는 클림트에 집착했다. 그리고 등 떠밀려 20대 후반이 되었을 때는 제목에서부터 고뇌가 느껴지는 고갱과 붓터치에서부터 그의 숨 막히는 열정이 느껴지는 고흐에게 위로받았다. 그리고 30대가 된 지금은 샤갈이 다시 좋아지고 있다.

 

이 책 〈그림 영혼의 부딪힘〉은 그들의 인간적인 면모에 초점을 맞추고 이야기를 풀어 나간다. 한정된 페이지에 스물네 사람의 대가들을 어떻게 다 담아냈을지 책을 받아 들기 전부터 나는 궁금했다. 사실, 이들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자면 한 사람에 책 한 권을 할애해도 부족할 수 있다. 게다가 저자가 무언가를 담아내고자 하는 욕심이 많은 사람이라면, 이야기가 잘못된 길로 들어설 가능성도 있었다. 하지만 저자는 욕심 없이 담백하게 한 사람 한 사람씩 소개해 나간다. 또한, 우리가 그들의 대표작으로 한 번쯤 마주치게 되거나 화제에 오를 만한 작품을 중심으로 그것이 화가의 인생의 어느 시점에서 탄생되었는지를 설명하고 있었기에 나의 기대치를 훌쩍 뛰어넘었다.

 

미술사는 거시적 관점보다는 사람의 마음을 묶어 놓은 영혼의 역사답게 미시적 관점으로 세상을 본다. 매우 주관적이고 감정적이며 사리분별이 안 될 때도 많다. 이는 미술사를 이끄는 작가들의 영혼이 매우 주관적이고 감정적이며 사리분별이 안 될 때가 있다는 말과 같다.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이 지점이 미술사를 인문학의 기초로 삼는 이유 중 하나다. 화가들이 평범한 우리에게 작품을 통해서 인간의 감정에 관한 정보를 눈으로 확인시켜주기 때문이다. 미술사를 안다는 것은 사람을 알아간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림을 본다는 것은 열망하는 화가의 영혼의 부딪힘을 목격하는 매우 특별한 일이기도 하다.

─P5 프롤로그

 

나는 예술가란 여느 인간보다 더욱 인간답기에 예술가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감정을 내치지 않고 공평하게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 감정에 휩쓸리기를 두려워하지 않으며 설사 두렵다고 하더라도 기꺼이 뛰어드는 사람이 예술가가 아닐까. 또한 우리 모두가 예술가의 기질을 타고나지만 감정을 하나씩 억눌러 가는 것에 익숙해지며 예술가가 되기를 스스로 거부하거나 포기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곤 한다. 인간의 감정을 순수하게 그대로 지켜나가는 이들이 바로 예술가이기에 예술가란 여느 인간보다 더욱 인간다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들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하지만 작가보다 화가가 먼 존재로 느껴지는 이유는 화가의 언어는 그림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일상에서 소통할 때 사용하지 않는 도구로 그들이 우리에게 말을 건네기에 우리는 그들의 희로애락이 담긴 그림 언어를 부담스러워하는 것이 아닐까.

 

나는 이 책을 받아 들었을 때, 만나기를 애타게 기다리던 작가들을 먼저 찾아갔다. 서둘러 만나고 싶은 마음에 페이지를 넘기는 손길을 재촉하기도 했다. 나는 ‘감정의 기복이 너무 심해 힘들 때’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 고흐를 먼저 만났고, ‘밖으로 나가야만 비상구를 찾는다’는 부제가 붙어 있는 뭉크를 뒤이어 만났다. 그런 다음, 다시 첫 장으로 돌아와 한 사람 한 사람과 천천히 대화를 나누었다.

 

세상에서 가장 확실한 진리는 ‘언젠가 사람은 죽는다’는 것이다. 움베르토 에코는 인간이 죽음을 극복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유일한 두 가지가 책을 쓰는 일과 아이를 낳는 일이라고 했다. 그런가 하면 카뮈는 우리가 살아야 하는 이유라고 생각하는 것이 동시에 우리가 죽어야 하는 좋은 이유라고도 했다. 그러나 인간은 가능하면 죽음을 피하고 싶어 한다. 아니 죽음의 방문을 늦추고 싶어 한다는 표현이 더 옳겠다. 피할 수도 없고 아무리 애쓴다고 해도 반드시 맞이해야 하는 죽음. 죽음은 언제나 관망될 뿐 겪는 자의 증언을 들을 수 없으니 더욱 두렵다. 왜 사람들은 항상 때를 놓치고 후회라는 것을 할까? 밀란 쿤데라의 말처럼 정말 우리는 언제나 두 눈에 붕대를 감고 현재를 통과하는 어리석은 존재라서 그런 것일까? 왜 인간은 시간이 흘러 붕대를 벗고 과거를 자세히 들여다보면서 그제야 비로소 살아온 날들을 이해하고 그 의미를 깨닫는 뒷북치는 멍청이일까?

─밖으로 나가야만 비상구를 찾는다(신경쇠약, 환경으로부터 받은 저주: 뭉크)

 

어렸을 때, 죽음이란 실존하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연극이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다. 하지만 죽음이 내 주변에서 일어난 순간, 그것이 현실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나는 그때부터 지금까지 인간의 마지막은 왜 죽음이어야 하는지를 생각하며 일주일에 두세 번은 훌쩍이고는 한다. 왜 죽음으로 세상이 끝나야 하는 것일까. 죽음이 시작이고 탄생이 끝일 수는 없을까. 이 메커니즘이 두려우면서도 궁금한 나는 여전히 죽음에 대해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 하지만 죽음을 늘 곁에 두고 살아가면 인간은 피폐해질 수밖에 없다. 생각의 둘레에 벽이 생기고 그 벽이 좁혀져 오며 자신을 가둬 버리는 것이다. 이때, 어떤 생각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이 글의 부제처럼 자신의 마음이 밖으로 나가야 한다. 그래야만 비상구를 찾을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요즘에는 미술관을 찾을 때면 큐레이터에게 설명을 들을 수 있는 시간을 미리 확인하고 가는 편이다. 물론, 큐레이터도 관람객도 뜸한 시간을 골라서 갈 때도 있다. 그럴 때는 그림의 언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잘못 받아들이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하지만, 소통의 오해에서 오는 대화의 재미도 상당하다. 하지만 되도록 큐레이터가 있는 시간을 찾는 이유는 그들이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그림 언어를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옮겨 주는 통역가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미술 통역가인 그들 덕분에 거리가 꽤 가까워진 그림이 있었기에 나는 그들의 직업을 정말 존경한다. 사실, 이민성 큐레이터가 기획한 <클림트 전>은 내게 쓰린 기억으로 남아 있다. 클림트를 한창 좋아하던 그 시기에 외국에 머물고 있어서 전시회 소식을 기사로 접하며 마음을 달래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렇게 클림트 전을 기획한 큐레이터의 글을 읽을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감사하다. 그리고 언젠가 저자의 통역으로 그림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꼭 찾아왔으면 하는 바람이다.

 

여느 인간보다 더욱 인간다웠기에 예술가가 된 이들. 그들이 자신의 희로애락을 온전히 담아낸 그림이 지금은 인간의 감정과 삶을 논하는 근거가 되고 있다. 굳이 우주까지 범위를 넓히지 않아도 우리 자신부터가 미지의 존재이기에 인간을 연구하는 학문은 앞으로 더욱 활발해지리라고 생각한다. 그러한 점에서 그림에는 감정에 가장 솔직했던 이들이 우리에게 전하는 말들이 담겨 있기에 우리가 그들에게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다가가고자 하는 의지만 있다면 여느 학문보다 더욱 편안하게 접근할 수 있으리라고 본다. 가까이 다가가도 그들의 말이 들리지 않거나 이해가 되지 않는다면, 《그림 영혼의 부딪힘》의 저자와 같은 미술 통역사의 힘을 빌리는 것 또한 좋은 방법일 테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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