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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의 서사시 - 괴테의 <파우스트>에서 마르케스의 <백년의 고독까지> 근대 문학 속의 세계체제 읽기
프랑코 모레티 지음, 조형준 옮김 / 새물결 / 200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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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코 모레티
 

우연적이고 다양한 문학적 진화로의 진입


1. 작업적 가설로서의 ‘서사시’

 

  "근대의 서사시"라, 프랑코 모레티의 이론적 작업을 읽으면서 드는 생각은 “도대체 문학(문학이론)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란 의문이다. 일찍이 헤겔과 루카치는 근대의 서사시란 말로 ‘소설(novel)’을 설명하였다. 그러나 헤겔과 루카치가 사용하고 있는 ‘서사시’란 정확히 말해 문학 장르를 지칭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총체성’에 대한 은유적인 표현일 뿐이다. 그러나 모레티는 은유로서의 ‘서사시’가 아니라 문학 장르로서의 서사시를 말하고 있다. 그것도 ‘근대’의 서사시를.

 

 모레티에게 있어 서사시란 “ꡔ파우스트ꡕ, ꡔ모비 딕ꡕ, ꡔ니벨룽겐의 반지ꡕ, ꡔ율리시즈ꡕ, ꡔ칸토스ꡕ, ꡔ황무지ꡕ, ꡔ특성 없는 남자ꡕ, ꡔ백 년의 고독ꡕ”과 같은 정확한 분류가 불가능한 작품들을 지칭하는 개념이다. 이러한 텍스트들을 서사시로 규정하는 이유는 그것에 “머나먼 과거와 결합시켜주는 많은 구조적 유사성”이 있고, 또한 “‘거대한 세계’를 종횡무진 휘젓고 다니며 인류와 하나가 되겠다는 바람을 큰 목소리로 외치는”(35쪽) ꡔ파우스트ꡕ의 주인공처럼 총체성을 개인의 내면에 구현하려는 야심 찬 시도들을 작가들이 하고 있기 때문이다. 불행히도 모레티는 근대 서구의 중요한 텍스트들을 ‘서사시’로 명명하는 이유를 더 이상 들고 있지 못하다. 그 자신도 이러한 범주가 결점을 가지고 있다고 지적하며 그것을 “하나의 작업 가설”(19쪽)이라고 고백한다. 이러한 결점 때문에 그는 “이상적으로 보자면 이 글은 한꺼번에 통독해야 한다”(27쪽)고 말한다. 그러나 이 “한꺼번에 통독해야”하는 “작업 가설”은 대단히 흥미롭고 생산적인 이론들의 장을 펼쳐 보인다.

 

  세상에 대한 성스러운 해석으로 모든 인식론들을 통합시켰던 중세의 시대가 저물고, 근대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새로운 시대’인 근대가 시작된 곳은 ‘아메리카’와 같은 신대륙이 아닌 유럽이었다. 유럽은 결코 자신을 짓누르고 있는 과거의 역사에서 자유로운 곳이 아니었다. 비록 중세처럼 그것에 의해 지배받지 않는다고 해도 유럽의 ‘현재’ 속에 그것은 살아있었고, 지속적으로 살아갈 것이었다. “새로운 시대가 실로 공간적․시간적 역설에 매인 채 낡은 시대 속에서 생겨나는 셈”이었다. 바야흐로 시대는 근대적 자본주의 체제로 진입하고 있는 데 유럽은 이러한 이행을 설명하거나 이해할 수 있는 문학적, 문화적 토대를 가지고 있지 못했다는 것이 모레티의 설명이다. 이러한 정치사회학적 근대에 대한 대응으로 등장한 문학의 상징적 형식이 ‘소설’과 ‘서사시’이다. 문학사를 “수사적인 혁신과 사회적 선택의 뒤엉킴”(25쪽)으로 설명하고 있는 모레티에 따르자면 문학은 “거대한 사회적 변화를 따라가며” 항상 뒤에 오며, “역사가 제기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오는 것”(26쪽)이다. 역사의 진행이 제기하는 거대한 사회적 변화는 견고한 과거와 유동적이며 미완인 현재의 간극에서 발생한다. 문학은 이러한 간극을 “좀더 잘 이해할 수 있게 해주고 또 좀더 받아들이기 쉬운 것으로 만들”(26쪽)어 준다. 유럽이라는 공간을 놓고 봤을 때 ‘소설’은 영국과 프랑스 같은 근대적 자본주의 체제가 비교적 빨리 정착된 곳에서 주도적인 문학적 형식으로 자리잡는다. 이에 비해 독일과 같은 주변국에서 등장하고 있는 것이 ‘서사시’이다. 모레티의 이론적 작업을 염두에 둔다면 ‘근대’ 문학의 상징적 형식인 ‘소설’과 ‘서사시’를 설명해주는 키워드는 ‘성장소설(교양소설)’과 ‘모더니즘’이다. 그는 기존의 모더니즘이라는 개념이 “너무나 많은 것을 포함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용 불가능한 것이 되었다”(21쪽)고 말한다. 그리고 ‘모더니즘’을 ‘서사시’로 대체하면서 “서사시라는 개념이 모더니즘 전체를 포괄할 수 없더라도 이것은 새로운 분류법의 결점이 아니라 오히려 이 개념의 ‘존재 이유’”라고 설명한다.

 

  모레티가 범주화하고 있는 ‘근대의 서사시’의 또 다른 특징은 그것이 대학 교육이라는 제도와 밀접하게 관련을 맺고 있는 “아주 길고, 또 지루”(23쪽)한 텍스트라는 사실이다. 게다가 그것은 “결함이 있는 명작”(23쪽)일 뿐이다. 그는 근대의 서사시가 지니고 있는 이러한 불완전성을 다윈주의라는 진화론적 모델을 통해 설명하고 있다. 그가 문학에 도입하고 있는 진화생물학적인 개념들은 ‘근대의 서사시’라는 가설을 가능하게 하는 이론적 토대로 작용한다. 이에 대한 선행적인 이해가 없다면 그의 가설을 이해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먼저 그가 사용하고 있는 진화생물학적인 개념들을 고찰하고 그의 이론으로 들어가자.


 

2. 문학의 진화는 진보가 아니라 다양성의 증가이다

 

  ꡔ근대의 서사시ꡕ 곳곳에서는 문학적인 수사가 아닌 진화생물학적 수사들을 찾을 수 있다. 가령 “무작위적인 변이와 필연적인 선택”이라는 다윈의 개념을 통해 문학사를 “수사적 혁신과 사회적 선택”으로 설명하는 방식이나, “유럽 문화의 유전자 코드”(302쪽) 등과 같은 수사는 인문학적인 전통에서 생각하자면 대단히 낯선 것들이다. 그렇다고 모레티가 사용하고 있는 진화생물학적인 수사들을 속악한 다윈적 개념으로 이해한다면 그것은 그의 “가설”에 대한 심각한 오해를 가져온다. “ꡔ근대적 서사시ꡕ의 비판적 소개”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유희석의 「자본주의 세계체제와 근대성」이라는 글을 잠시 보자. 이 글의 필자는 “그(모레티―인용자)가 규정하는 자본주의 근대는 삶의 모든 가능성이 진화론적 패러다임―사회적 필연과 적자생존―으로 발견되는 모험의 시대”라고 정의한다. 여기서 그는 “무작위적인 변이”를 “적자생존”이라고 이해하고 있다. 이러한 속악한 진화생물학적 편견은 유럽의 문학사적인 진행을 ‘교양소설’(19세기)에서 ‘근대의 서사시’(20세기)로의 이행으로 간단하게 정리하는 오류를 범하게 하는 근본적 원인이 된다. 게다가 그는 자신의 상식에 대한 점검 없이 “도대체 그런 자연과학적 설명모형을 사실 이상의 것을 다루는 문학에 그대로 적용함으로써 엄밀한 ‘과학적’ 설명력을 얻을 수 있다는 발상 자체가 과학의 환상이 아닌가”라는 부끄러운 진술마저 하고 있다.

 

  그렇다면 “과학적 설명력”과 “과학적 환상” 사이의 간극을 살펴보는 것으로 모레티가 사용하고 있는 진화생물학적 이론에 대한 고찰을 시작해보자. 다윈은 ꡔ종의 기원ꡕ(1856)에서 ‘진화(evolution)’라는 단어를 그 책의 결말에 가서야 단 한 번 사용하고 있다. 그는 책의 전반에서 ‘변이를 수반한 유전(descent with modification)’이라는 말로 ‘진화’라는 단어를 대체하고 있다. 그것은 이미 ‘진화’가 당대에 ‘점진적인 발달 개념’을 함축하고 있는 일상어로 사용되고 있었다는 사실 때문이다. 게다가 더욱 중요한 것은 ‘진화’가 당대의 역사철학적인 발전 모델을 설명하는 학술적 용어로 사용되었다는 점이다. 즉 ‘진화’는 이미 역사적인 ‘진보’의 관념을 설명하는 용어로 사용되고 있었다. 이러한 다윈의 ‘세심한 배려’에도 불구하고 그의 이론은 제국주의의 사회진화론과 맞물려 속악하게 ‘적자생존’과 같은 말로 오해가 되었다. 그러나 다윈의 이론에 따르자면 진화란 진보가 아니라 다양성의 증가이다.  

 

  모레티가 서사시에 대한 헤겔을 이론을 평가하면서 그의 관점이 지닌 진정한 새로움을 “분석 내용보다는 서사시를 무자비하게 역사화하는 태도”(33쪽)라고 정리하는 대목에 주목한다면 그가 역사철학의 진행 방향과 문학의 진행 양상을 동일한 궤적으로 바라보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모레티에게 있어 문학은 ‘변이를 수반한 유전’을 통해 다양성을 증대하며, 우연히 선택된 하나의 형식에 의해 진화한다고 주장한다. ‘우연히 선택되는 하나의 형식’, 이것을 설명해주는 것이 스티븐 제이 굴드의 ‘단속평행설(punctuated equilibrium)’이다. 그는 진화는 새로운 종이 점진적으로 다른 종으로 변하는 것이 아니라, 오랜 기간 변하지 않다가 갑자기 짧은 기간 동안 변화가 일어난다며 ‘단속평행설’을 주장했다.

 

  모레티에 따르자면 “문학사의 진짜 주인공”은 “문학 장르”(126쪽)이며, “문학 장르는 동물의 종과 유사한 속성을 띤다.”(22쪽) 그리고 이러한 문학 장르를 이루는 것은 개별적인 텍스트가 아니라 그 텍스트에 포함되어 있는 ‘장치’들이다. 그는 ‘다성성’이라는 ‘서사시’의 장치를 역사적으로 고찰하면서 그것의 궤적이 원만한 상승 곡선이 아니라 갑자기 상승하고 하강하는 “파동 곡선”을 그린다는 사실을 지적하며, 이것이 “굴드와 엘드리지가 ‘중단된 균형들(punctuated equilibria)’이라는 이론과 함께 제시한 개념과 비슷하다”(127쪽)고 말한다. 또한 ‘장르와 장치’가 시간적 변화에 따라 그리는 궤적을 그것이 유럽의 주변부(독일, 러시아)와 중심(영국, 프랑스)에 다가갈수록 상승과 하강의 뚜렷한 곡선으로 설명하며 이것이 “진정학 문학 지리학의 가능성”(128쪽)을 나타낸다고 주장한다.

 

  간략하게 말하자면 모레티는 문학사의 진행 양상을 역사철학적인 관점과 변별해서 인식하였다. 헤겔이 그의 역사철학에 의해 과거의 것으로 역사화 한 ‘서사시’가 모레티에 의해서 ‘발견’되는 것은 그가 기대고 있는 진화생물학적인 문학사 이해를 전제하지 않고서는 설명되지 않는다. 또한 문학사의 진화는 다양한 수사적 실험 속에서 등장한 ‘변이’를 통해 우연하게 이루어지는 것이다.


 

3. 문학의 진화, 비동시대성, 세계 텍스트

 

  모레티가 ‘지도’를 통해 지리학적으로 세계 문학을 고찰하고 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그는 ‘지도’가 “형식과 역사 간의 마찰과 긴장”을 보다 잘 보여주며, 그것의 “조화가 결코 완벽할 수 없다”는 사실과 ‘일정한 패턴’을 알려준다고 한다. ‘지도’에 대한 모레티의 견해를 참조한다면 한 텍스트의 목차를 이론적 배치의 지도라고 상정하는 것이 결코 터무니없는 소리는 아닐 것이다. 그리고 ꡔ근대의 서사시ꡕ의 목차를 본다면 ‘서사시와 역사 간의 마찰과 긴장’이 어떠한 주제로, 어떠한 시간에 일정한 패턴으로 반복되고 있는가를 쉽게 알 수 있다. ꡔ근대의 서사시ꡕ는 크게 ꡔ파우스트ꡕ(19세기, 독일)를 다루는 1부와 ꡔ율리시즈ꡕ(20세기, 아일랜드)를 다루는 2부, 그리고 ꡔ니벨룽겐의 반지ꡕ(19세기, 독일)와 ꡔ백 년의 고독ꡕ(20세기, 콜롬비아)을 다루는 이행과 에필로그로 구성되어 있다. 여기서 「문학의 진화」는 1부에서 두 번, 2부에서 한 번, 「세계 텍스트」는 1부와 2부에서 각 한 번, 「비동시대성」, 「결백의 수사학」은 1부와 에필로그에서 각 한 번씩 반복되고 있다. 이것들이 반복되는 텍스트의 시간적, 공간적 배경을 생각하며 반복의 궤적을 떠올린다면 그가 말하는 문학적 지리학을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반복의 궤적을 좀더 상세히 살펴보자. 먼저 ‘문학적 진화’. ꡔ파우스트ꡕ의 첫 번째 문학적 진화는 ‘메피스토펠레스’의 창조이다. ꡔ파우스트ꡕ는 모레티의 말처럼 “영웅 없는 서사시”이며, 자신의 내면에 모든 것을 포괄하려는 수동적 주인공을 가지고 있다. 파우스트가 달성하려는 총체성은 기껏해야 “반쪽짜리 총체성”, “일차원적인 총체성”(40쪽)이다. 이런 파우스트에게 행동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메피스토펠레스’이다. 괴테는 파우스트의 파트너로 “비극에 친숙한 사악한 자문역”을 등장시키려다 포기하고 그것을 “악마”로 대체한다. 이것은 어떠한 필연성도 없는 단순한 “우연”(무작위적 변이, 다양성의 증가)이다. 이것은 괴테의 ‘브리콜라주(bricolage)’적인 조합에 의해 형성된 것이다. “그런데 자문역과 달리 메피스토펠레스는 한 가지 이상의 일을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그는 기능을 바꿀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결정적인 특징이다. 왜냐하면 문학의 진화는 통상 새로운 주제나 새로운 방법들을 느닷없이 고안하는 방식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고 있는 것들을 위한 새로운 기능을 발견하는 식으로 진행되기 때문이다.”(44~45쪽)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이 말하는 ‘재기능화’이자, 다윈 이론의 핵심적인 생각이라고 말하는 브리콜라주의 등장이 ‘서사시’에서 등장하는 첫 번째 ‘문학의 진화’이다. 모레티에 의하자면 브리콜라주는 문학적 완전함을 추구하는 기술적 결합보다 나은 개념이다. 왜냐하면 문학은 결코 완전해질 수 없기 때문이다. “브리콜라주는 도달할 수 없는 최종적인 해결책을 꿈꾸는 것이 아니라 근대 세계 체제에 내재하는 이질성을 받아들이기 때문이다.”(296쪽)

 

  ꡔ파우스트ꡕ에 등장하는 두 번째 ‘문학의 진화’는 ‘다성성’의 개념과 깊은 연관을 가지고 있다. 미하일 바흐찐에 의하자면 서사시란 민족의 ‘절대적 과거’로 충만한 세계이다. “그것은 하나의 사실, 하나의 개념, 하나의 가치로서 이미 완성되고 완결된 불변의 것이다.” 서사시가 이렇듯 종결된 장르라면 소설은 “세계사의 새로운 시대에 들어와서 태어나고 양육되었던 유일한 장르”이다. 그것은 미완결된 형식이며, 지속적으로 성장하고 있는 ‘새로운 세계’의 장르이다. 바흐찐은 이러한 서사시와 소설의 차이를 언어를 통해 설명한다. 그에 따르자면 서사시란 독백적이고, 단성적(單聲的)이고, 단종적(單種的)인 단일 언어와 근대적 통합 이데올로기에 따른 언어․이념적 사고(담론)의 중심화이다. 대조적으로 소설은 대화적이고, 다성적(多聲的)이고, 이종적(異種的)인 언어와 이에 따른 언어․이념적 사고의 탈중심화이다. 그러나 모레티는 이것이 18세기까지의 유럽문학을 설명하는데는 도움이 되지만 그 이후의 문학을 설명하는데는 별 쓸모가 없다고 말한다. 오히려 19세기의 소설은 “다성성을 조장하기보다는 이것을 철저하게 축소해 각각의 새로운 세대마다 좀더 간결하고 동질적인 ‘말과 이데올로기의 세계’을 낳”(100쪽)는다고 지적한다. 오히려 이것은 “바흐찐에게는 결례이지만(Pace Bakhtin) 간단히 말해 근대 서구의 다성적인 형식은 소설이 아니라 오히려 정확히 말해 서사시”이며 “이 서사시는 특히 세계 체제의 이질적인 공간을 전문으로 다루며 따라서 이 공간의 다양한 많은 목소리들을 위해 무대를 마련해주는 것”을 배워야 한다고 모레티는 말한다. ꡔ파우스트ꡕ 중 「발푸르기스의 밤」은 괴테가 쓴 최초의 다성적인 장이다. 이것은 ꡔ파우스트ꡕ 2부의 다른 다성적 장면의 모델이 되고 그 후의 ‘근대의 서사시’에 등장하는 다성성의 참조점이 된다. 그러나 이러한 19세기의 다성성은 멜빌과 휘트먼의 작업 속에서 반복되지만 결국 그것은 ‘독백주의’로 변모하게 된다. 모레티의 설명에 의하자면 “민주주의의 등장”이 “독백론적 경향을 조장”한 것이다. 이제 역사는 무수한 다양성과 이종의 언어들보다는 단일하고 공동의 문화를 조성하는 민주주의로 진행된다.     

 

  ꡔ율리시즈ꡕ에서 ‘문학의 진화’는 ‘의식의 흐름’에서 ‘다성성’으로 진행되는 텍스트의 흐름에 의해 말해진다. 이러한 ‘다성성’으로의 전환은 “ꡔ율리시즈ꡕ에서 가장 실험적인 동시에 가장 덜 성공적인 부분”(285쪽)이다. 그러나 이러한 실패한 실험은 문학의 진화란 것이 다윈의 설명처럼 우연을 통한 “무작위적인 변이”로 진행된다는 진화론적 모델의 타당성을 확인해준다. 

 

  또한 ꡔ근대의 서사시ꡕ에서 시간적, 공간적으로 반복되고 있는 중요한 개념에는 ‘비동시대성’이 있다. 이것은 ‘세계 텍스트’라는 “인식론적 메타포”(19쪽)와 함께 설명하는 것이 좋을 듯 싶다. 모레티는 에른스트 블로흐에게서 ‘비동시대성’이라는 개념을 빌려온다. ‘비동시대성’이란 시대적으로는 동일하지만 문화적, 정치적 관점에서 볼 때는 서로 다른 시대에 속하고 있는 상태를 지칭한다. 이것은 19세기의 독일이 영국과 프랑스와 변별되는 이유이다. 영국과 프랑스는 자본주의적 근대 체계로의 성공적 진입을 한 반면 독일은 아직도 과거의 전통이 혼재된 ‘현재’에 머물러 있었다. 영국과 프랑스에서 동질적이고 단성적인 문화를 지향하는 ‘소설’이 강력한 문학적 형식으로 자리잡고, 유럽의 주변국인 독일에서 ‘이질적’이고 혼종적인 ‘서사시’가 등장하는 것은 이것과 관련이 깊다. 게다가 ꡔ파우스트ꡕ 2부가 고대 그리스, 로마의 신화와 역사를 전유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는 것은 상징적이다. 영국과 프랑스처럼 식민지를 갖고 있지 않던 독일에서 과거는 식민지를 대신해서 정복당한다. 정복당한 과거에 의해 ‘현재’는 공고해지고, ‘미래’인 근대 체계를 위협할 수 있는 것은 없어진다. 유럽에서 근대 체계는 자본주의가 요구하는 복수의 정치 체제로 구성되어 진다. 세계를 정복하려는 파우스트적인 욕망은 이제 “세계를 합병하는”(81쪽) 것으로 전환된다. 이질적인 시간을 정복한 ‘서사시’는 “수많은 작고 독립적인” 공간에 대한 욕망을 감추지 못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ꡔ파우스트ꡕ는 ‘독일적이지’ 않다. 마치 ꡔ율리시즈ꡕ가 아일랜드적이지 않고, ꡔ백 년의 고독ꡕ이 ‘콜롬비아적’이지 않듯이. 이것들은 모두 세계 텍스트(World Text)이다. 이것들의 지리학적 참조 틀은 더 이상 민족 국가가 아니라 훨씬 더 넓은 실체, 즉 대륙 또는 전체로서의 세계 체제이다. 이제부터 소설에게 요구되는 민족 정체성의 구성은 이리하여 서사시의 경우 이보다 훨씬 더 큰 지리적 야망, 즉 전지구적 야망으로 대체된다.”(89~90쪽) ꡔ율리시즈ꡕ가 등장할 당시에는 이러한 전지구적 야망(식민지 정복)이 이미 종결된 후이다. 세계는 좁아지고 예견 가능한 상투적 대상으로 전환된다. 여행은 새로운 것과의 낯선 만남이 아니라 세계 텍스트적 관점에 의해 알려진 사실의 재확인에 불과하다. 세계는 예견 가능한 좁은 공간에 불과하고, 이렇게 축소된 전체는 개인의 내면에서 언제든지 호명될 수 있는 상투어로 변해버린다. 괴테의 야심 찬 기획―개인의 자아를 온 인류의 자아로까지 확대하려는―은 완성된다. 비록 그것이 세계의 축소, 공간의 상투화로 이루어지는 것이지만.

 

  1960년대 이후 공식적으로 서구의 제국주의적 야심은 끝나고 만다. 유럽은 균등하고 동질한 국민국가의 종합으로 정착된다. 더 이상 유럽에서 ‘서사시’를 가능하게 하는 시간적이고 공간적인 ‘비동시대성’은 사라졌다. 그리고 콜롬비아에서 ꡔ백 년의 고독ꡕ이 등장한다. 그곳은 “충분히 이해될 정도로 유럽적(‘라틴’)이며 비평적으로 충분히 예견되지 않을 정도로 이국적(‘아메리카적’)인”(380쪽) 시․공간을 가지고 있다. ꡔ백 년의 고독ꡕ에 등장하는 ‘마콘도’의 “역사는 끊임없이 다른 역사들, 즉 유럽, 아시아, ‘콜롬비아’, 라틴 아메리카 그리고 미국에서 시작된 과정에 의해 교차되고 굴절”되는 “세계 체제의 광범위하고, 이질적이며, 복합적인 지리”(372쪽)를 가지고 있다.


 

4. 결백의 수사학과 유럽중심주의, 그리고 장엄한 문학적 진화

 

  브리콜라주에 의한 메피스토페레스의 우연한 등장은 파우스트에게 무한한 행위를 가능하게 하였다는 기능 외에 새로운 수사학적인 가능성을 추가한다. 그것은 모레티가 ‘결백의 수사학’이라고 부르는 요소이다. 파우스트는 악마와 계약을 맺는다. 그것은 신의 의도된 행동의 결과이다. 신에 의해 유혹 당한 파우스트와 그의 욕망을 대행하는 메피스토펠레스의 관계는 “폭력을 자신의 외부로 투사”(52쪽)하는 구조적 관계를 형성한다. 또한 파우스트가 과거를 정복하는 방식은 “야만으로부터의 해방”이라는 방식을 취한다. 제국주의적 욕망을 행하지 않고 단순히 꿈꾸고, 정복을 해방으로 치환하는 파우스트의 방식은 “결백한 계약”에서 기인된 “결백한 욕망”이 된다. 결국 ꡔ파우스트ꡕ에 등장하는 주인공은 “서양의 보편적 지배”(65쪽)라는 욕망에 기초한 인물이다.

 

  이러한 사실은 세계 텍스트가 단순한 세계의 문학이 아니라 제국주의의 문학임을 알려준다. 19세기에 이미 유럽의 주요 나라들은 유럽 이외의 지역에 방대한 공간의 식민지를 건설한다. 그리고 유럽은 백화점, 박물관, 카탈로그, 관광 안내서, 문학 작품 등을 통해 식민지에 대한 백과사전적 조사를 실행한다. 20세기로 접어들면서 제국주의적인 확장은 전지구적으로 확장, 종결되고 대도시는 세계를 백과사전 안의 상투적인 항목으로 변환시킨다. 모레티의 지적처럼 “많은 모더니즘 작품에 담긴 진정한 의미에서 서사시적이고 세계사적인 시야는 사실 유럽의 세계지배 덕분에 가능”해졌다. 모더니즘적인 인식의 전환은 전적으로 제국주의적인 인식의 확장에서 기인한다. ꡔ율리시즈ꡕ의 블룸은 ‘벨파스트 오리엔탈 차 판매회사’의 간판을 통해 자신의 사유를 극동으로 자유롭게 이동시킨다. 지극히 수동적인 ꡔ율리시즈ꡕ의 인물들에게도 세계는 열려있는 가능성의 공간이다. 전지구적인 욕망이 가능해졌다. 단지 공상하고 자유롭게 연상하는 것으로 나타나지만 그것은 지극히 가능한 욕망이다. ꡔ파우스트ꡕ에서 출발한 서구의 근대적 자아는 시간적으로는 과거와 신화를 정복하고, 공간적으로는 전세계를 정복한다. 모더니즘이 제국주의는 물론 과거의 신화와 역사를 전유하는 파시즘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은 근대적 자아의 확장된 상상을 가능하게 하는 결백의 수사학에 의해 그들의 욕망이 순진하고 결백하게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모레티에 의하자면 “결백의 수사학”은 식민지였던 라틴 아메리카에서 다시 등장한다. 지난 19세기 다성성에서 독백주의로 이동했던 ‘장르와 장치’의 파동 곡선은 20세기 조이스에서 마르케스로의 이동에서도 반복된다. 그러나 모레티는 ꡔ백 년의 고독ꡕ에 나오는 문체를 분석하며, 그것이 19세기와 같은 민주주의의 등장과 같은 동질적이고 집단적인 문화의 등장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님을 지적한다. 그 문체의 특징은 “다성성 없는 글쓰기, 아이러니 없는 글쓰기, 어느 맑은 여름 아침처럼 투명한 글쓰기”(377쪽)라고 모레티는 말한다. 이것은 “한 사건을 원인과 결과의 세속적 세계에서 해방시켜, 아주 풍부한 원형의 상징적 세계”로 편입시키는 서사를 가능하게 하는 문체이다. 여기서 등장하는 마술은 엄밀히 말해 서구의 기술 문명이다. 파우스트에게 있어 ‘현재’의 우월함을 증명하던 기술 문명은 마콘도에서 경이롭고 온화한 마술의 역할을 한다. 마술은 마콘도의 모든 관계들―식민지와 피식민지라는 관계까지도―을 재주술화하며 풍부한 원형의 상징적 세계로 만든다. 모레티의 말에 의하자면 희생자로부터 주어진 사면권은 또 다른 “결백의 수사학”이다. 그것은 “ꡔ백 년의 고독ꡕ의 강요된 근대화”를 “참으로 독특한 즐거움을 주는 이야기”로 변환시키며, 그곳을 누구나 한번쯤 살고 싶어하는 공간으로 인식하게 한다.

 

  그러나 식민지에서 반복되는 “결백의 수사학”은 좀 의심스럽다. ꡔ백 년의 고독ꡕ에 부가된 또 다른 해석적 고리는 그것은 식민지배에 대한 거대한 알레고리로 읽는 것이다. “1001명의 아이들”이 가지고 있는 “1001가지 가능성”은 동시에 “1001가지의 종말”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모레티는 자신의 말처럼 “지난 30년간 정치적으로 거의 아무런 사건도 일어나지 않았”던 “비교적 안정되어 있어서 미학적인 차원이 어떤 위협이 되지 않는 체제”에서 살았던 사람이다. 그는 진정한 의미의 “교양 있는 유럽 독자”(377쪽)이다. 그가 ꡔ백 년의 고독ꡕ에서 희생자가 건네주는 사면의 수사를 읽었다는 진술은 그리 유쾌하지 않은 새로운 “결백의 수사학”을 형성하는 것인지 의심스럽다. 그리고 작금의 폭력적인 세계 체제와 주변부의 경제적 몰락은 그런 의심이 옳을 수도 있다는 강한 심증을 준다.

 

  이런 심증에도 불구하고 모레티가 펼치고 있는 이론의 ‘서사시’적 전개는 대단히 흥미롭고 재미있다. 그것은 문학의 진행 방향을 역사철학으로 전유하는 것이 아니라 이질적이고 우연성에 가득 찬 다양성으로 안내하고 있기 때문이다. 앞에서도 잠깐 언급한 것처럼 다윈은 ꡔ종의 기원ꡕ의 결말에 가서야 ‘진화’란 단어를 쓰고 있다. 모레티와 다윈이 맺고 있는 이론적 친연성을 감안한다면 ꡔ종의 기원ꡕ의 결말을 ꡔ근대의 서사시ꡕ가 들려주는 이론적 결론에 대한 또 다른 화답으로 보아도 좋지 않을까?


  이러한 생명관(문학관―인용자)에는 장엄함이 깃들어 있다. 정해진 중력의 법칙을 따라 이 행성이 끝없이 회전하는 동안, 아주 단순한 시작으로부터 너무나 아름답고 너무나 경이로운 무한한 생물종이 진화해 왔고, 진화하고 있고, 진화해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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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한 열정
수잔 손택 지음, 홍한별 옮김 / 이후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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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과 열광

 


시녀들-벨라스케스


  내 앞에는 스페인 화가 벨라스케스 작품 「시녀들」처럼 끝없이 순환하는 시선의 이미지가 하나 놓여 있다. 그것은 ꡔ우울한 열정ꡕ에서 거론하고 있는 예술가들의 제단에 때론 환호로, 때론 차가운 경멸로, 때론 우울한 매혹으로 글을 올리는 수전 손택과 그녀를 추억하며―아, 누군가에 대해 이렇게 말하는 것은 얼마나 슬픈 일인가. 그녀는 2004년 12월 28일에 자신에 몸에 새겨진 백혈병이란 ‘은유’를 안고 세상을 떠났다―서평을 쓰고 있는 나 자신, 그리고 손택의 책을 읽고 그녀가 우울하게 더듬는 예술가들의 삶을 되짚어 갈 ‘당신’이 만들어내는 끝없이 반복되며 갈라지는 이미지이다.

 

  다른 이미지 하나를 더 허락한다면, 나는 감히 글을 쓰는 손택의 옆―그녀 자신의 묘사에 따르자면 그녀는 “파리에 있는 작은 방 안에서, 등나무 의자에 앉아 정원이 내려다보이는 창 앞에 놓인 타자기로 이 글을 쓰고 있다.”(p15)―에 한나 아렌트를 앉히고 싶다. 평생 전체주의와 지적인 투쟁을 펼친 한나 아렌트의 비명(碑銘)에 ꡔ어두운 시대의 사람들ꡕ(문학과지성사, 1983)이 있다면, 미국에 살며, 이에 저항하고, ‘해석으로 복수’를 가한 수전 손택의 비명엔 ꡔ우울한 열정ꡕ(시울, 2005)이 있다. 놀랍도록 비슷한 두 책은 하나의 거울이며, 이 구분할 수 없는 내면과 외면에 등나무 의자에 앉아 글을 쓰는 손택과 쇼파에 기대어 낮고 우울한 명상에 잠긴 아렌트가 서로를 바라보고 있다.

 

  텍스트 바깥을 맴도는 사유를 멈추고, 내부로 들어가 보자. 원래 이 책의 원제는 책에 수록된 벤야민에 대한 글의 소제목인 「토성의 영향 아래(Under the Sign of Saturn)」이다. “나는 토성의 영향 아래 태어났다. 가장 느리게 공전하는 별, 우회와 지연의 행성……”이라는 벤야민 자신에 대한 주석을 표제로 선택하고 있다는 점에서 수전 손택의 집필 의도를 알 수 있다. 그녀는 한 사람의 지적 흐름을 쫓아가며 이에 대한 과학적인 비판과 해석을 내리기 보다는, 그 사람을 사로잡은 문학적 열정과 생을 가득채운 비의(秘意)적 기질을 통해 접근하고 있다. 이 때문에 이 책에 담긴 일곱 편의 에세이들은 각기 하나의 키워드로 설명될 수 있다. 벤야민에게 ‘우울’은 폐허로 상징되는 그의 공간을 탐색하는 이정표이며, 바르트에게 있어 ‘주이상스(jouissance)’는 삶과 문학에 대한 그의 태도였다. 그리고 아르토의 ‘광기’는 문학에 대한 자신의 자세이다. 그녀는 자신이 바라보는 대상의 삶에 대한 깊은 통찰을 통해 그 사람의 기질을 읽어내고 이를 다시 글로 적어가고 있다. 적어도 이 점에서 그녀는 그녀 자신이 아르토에게 내린 정신의 여행을 가능케 하는 “영매”(p236)라는 표현 아래 놓여 있다.

 

  이 책은 정확하게 일곱 명의 예술가에 대한 에세이이다. 서평의 예절을 따라 친절하게 설명하자면, 그들은 1960~70년대 미국의 사회정치사상에 큰 영향을 미친 작가 폴 굿맨, <올림피아>와 <의지의 승리>라는 기록영화를 통해 히틀러 시대의 파시즘 미학을 구현한 레니 리펜슈탈, 너무나도 유명한 발터 벤야민, <히틀러, 독일영화>라는 영화를 통해 현대의 역사를 고발하는 한스-위르겐 지버베르크, 벤야민보다 유명하지만 벤야민만큼 광범위한 컬트팬을 확보하지 못한 롤랑 바르트, 1981년 노벨상 수상으로 한국에 잠깐 번역되었다 사라진 ꡔ군중과 권력ꡕ(한길사, 1982)의 저자 엘리아스 카네티, 잔혹연극론으로 유명하지만 이해의 영역에서 “지독하게 멀리 있는, 도무지 흡수할 수 없는 목소리”(p238)인 앙토냉 아르토이다.

 

  손택은 “30페이지의 에세이를 쓰기 위해 수 천 페이지를 써야했고 매 페이지마다 30~40개의 초고”(p1)가 필요했을 만큼 언어를 고통스럽게 가공하며 대상들에 접근하고 있다. 각기 다른 예술가들에 대해 글을 쓰고 있기 때문에 단호한 어조의 한 문장으로 설명할 순 없지만, 나를 매혹시킨 손택의 글은 폴 굿맨에 대한 열광적인 조사(弔詞)와 파시즘을 향한 그녀의 차가운 냉소, 그리고 아르토를 향한 주목할 만한 ‘다가감’이다. (아쉽지만 아르토에 대한 손택의 접근은 분량을 고려하여 생략하겠다)

  먼저 파시즘에 대한 신랄한 냉소를 보자. 손택은 리펜슈탈의 사진집 ꡔ누바족의 최후ꡕ를 통해 원시적인 것에 대한 찬미를 넘어서는 파시즘적인 미학의 향연을 읽어 낸다. 파시즘 미학은 “절제, 복종적 행동, 과장된 노력, 고통의 인내”를 통해 “복종을 찬미하고, 무정신의 상태를 찬양하고 죽음을 미화한다.”(p46) 이를 통해 만들어지는 것은 이상주의를 향해 돌진하는 눈먼 “공동체의 서사시”이다. 또한 손택은 리펜슈탈의 작업들이 재평가되고 있는 상황을 지적하며 오늘날에도 사라지지 않고 있는 파시즘적인 이상―“예술로서의 삶, 아름다움에 대한 숭배, 용기에 대한 물신주의, 공동체의 황홀경 속에서 소외의 해소, 지식인 배격, 남성 중심 가정”―을 비판한다.

 

  손택이 보여주는 냉소의 절정은 그녀가 리펜슈탈의 사진집과 함께 ꡔSS 제복ꡕ이라는 책을 거론하는 부분이다. (‘SS’는 히틀러가 만든 친위대(Schutzstaffel)의 약자이다) 이 책은 새도매저키즘 섹스를 즐기는 사람을 위해 기획된 “포르노그래피” 서적이다. ꡔSS 제국ꡕ을 리펜슈탈의 작품들과 함께 거론하는 손택의 의도는 명백하다. 즉 “두 책은 정신적 근원, 추구하는 바를 공유”(p55)하고 있는 것이다. 손택은 파시즘과 변태성욕을 동시에 거론하며, 리펜슈탈의 작업을 포르노그래피로, 그녀에 매혹되는 대중을 포르노그래피를 정신없이 바라보는 얼간이로 신랄하게 비판한다. 하지만 파시즘을 통한 환상의 결과는 “죽음”뿐이다.

 

  다시 앞으로 돌아가자. 이 책은 폴 굿맨의 부고를 접한 수전 손택의 애잔한 조사(弔詞)로 시작한다. 손택은 말한다. 폴 굿맨은 “나에게 작가가 된다는 것의 가치를 정립하게 해준 작가, 그리고 그 사람의 글을 내 글을 평가하는 판단 기준으로 삼은 작가”이며, “지난 20여 년 동안 그의 책 대부분이 다 갖추어지지 않은 집에서는 한 번도 산적이 없”다고. 조사는 죽은 자들을 위한 산자의 넋두리다. 이젠 허락을 받을 순 없지만, 그 헌사를 다시 손택에게 보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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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서여, 안녕
김종광 지음 / 문학동네 / 200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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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예작가 김종광의 첫 작품집 <경찰서여, 안녕>은 무엇보다 얘기를 이끌어가는 말들로 가득한 소설이다.

작가의 고향인 충청도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사투리의 입심은 읽는 이들을 사로잡기에 충분하다. 표제작 '경찰서여, 안녕'은 이 작품집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작품이다. 작가의 개인적 경험(전경 혹은 의경)으로 읽혀지는 경찰서 생활의 풍경은 하나의 낮선 공간을 독자들에게 던져준다.

주인공인 '강수'는 자칭 천재적인 도둑질의 재능을 소유한 소년이다. 그는 일찍이 조실부모하고 나이 많은 형에게 천덕꾸러기 대접을 받는, 어느 누구도 환영하지 않는 소년이다. 그가 경찰서에서 사환역할을 하며 생활하게 된 까닭은 형의 양육에 대한 책임회피와 그를 보며 자신의 과거를 생각하는 유형사의 배려아닌 배려 덕분이다. 하지만 그는 자칭 천재적인 도둑답게 항상 경찰서로부터 달아날 궁니만 하고있다.

그는 자신을 끊임없이 달아나게 하는 힘의 원동력을 집에서 기르던 개, 검둥이로 비유해 설명하고 있다.

'그 검둥이는 쇠줄만 풀어 주면 나를 버리고 들판을 향해 달아났었다. 아무리 때려도, 아무리 구슬려도 쇠줄만 풀어 주면 미련도 없는지 또다시 달아났었다. 들판에 뭐가 있기에. 바라보기에 좋은 불빛만 가득하고, 바람만 요란하게 볼 뗀데. 저를 반겨 줄 것이라고는 고작 해야 집 잃은 개, 아니면 보신탕 좋아하는 인간들이 다면서 뭐가 그리 좋은지 큰 귀를 펄럭이면서 뛰어갔었다. 그래, 들판에는 아무것도 없을지 몰라. 아무것도.'

연신 달아나는 개 검둥이에 빗대어 자신의 도주를 설명하는 이 구절은 기존의 국내 소설에서는 볼 수 없었던 하나의 모티브를 던지고 있다. 역사적인 성숙한 부성이 부재한 한국소설에서 성장소설은 '편모슬하의 성장'으로 기존의 연구자들에게 특징지워져 왔다. 그것은 단순한 나이먹기가 아니라 개인에겐 모험이면서 동시에 기댈 곳없는 역사적 사회적 상황의 상징적 제시였다.

그러나 김종광의 '경찰서여, 안녕'은 아버지에 이어 어머니마저 존재하지않는 왜곡된 현실 속에서 일종의 성장통을 앓고 있는 주인공을 제시한다. 주인공의 성장통은 사람들에 대한 불신과 동시에 강한 그리움을 내포한다. 역사도 없고 현실도 없고 고향도 상실한 20세기 말엽의 인간들 그 속에서 작사가 제시하는 행동은 오직 하나, '도주' 뿐이다.

지향점 없는 도주, 소실점을 잃어버린 질주, 갈 곳 없고, 머물 곳 없는 인간들에게 남은 것은 제자리에 주저앉아 끊임없이 과거를 변주하는 행위와 보이지 않는 심연을 향해 빠르게 달려가는 것 뿐이다. 비록 그 곳에 아무것도 없을 지 몰라도......

자신의 핸드폰에 'pro 작가'라고 적고 다닌다는 김종광에게 한가지 아쉬운 점은 그의 소설 속에는 너무 많은 말들만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그의 장점으로 이 글의 시작 부분에서 지적했던 사항들은 모순되게도 그의 가장 큰 단점이다. 그것은 아마도 많은 말에 비해 상대적으로 부족한 무엇인가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 무엇인가는 사상이나 생각, 혹은 인생을 가로지르는 이탈과 같은 말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직 김종광은 신인 작가이다. 그에게 독자들이 소설을 읽게하는 모두 요소의 충족을 요구하는 것은 무리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의 작품집 '경찰서여, 안녕'은 읽는 독자들에게 그에 대한 좀더 많은 기대를 가질 수 있게 한다. 그것이 그가 가진 '충청도의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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