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한 열정
수잔 손택 지음, 홍한별 옮김 / 이후 / 2005년 11월
평점 :
품절


우울과 열광

 


시녀들-벨라스케스


  내 앞에는 스페인 화가 벨라스케스 작품 「시녀들」처럼 끝없이 순환하는 시선의 이미지가 하나 놓여 있다. 그것은 ꡔ우울한 열정ꡕ에서 거론하고 있는 예술가들의 제단에 때론 환호로, 때론 차가운 경멸로, 때론 우울한 매혹으로 글을 올리는 수전 손택과 그녀를 추억하며―아, 누군가에 대해 이렇게 말하는 것은 얼마나 슬픈 일인가. 그녀는 2004년 12월 28일에 자신에 몸에 새겨진 백혈병이란 ‘은유’를 안고 세상을 떠났다―서평을 쓰고 있는 나 자신, 그리고 손택의 책을 읽고 그녀가 우울하게 더듬는 예술가들의 삶을 되짚어 갈 ‘당신’이 만들어내는 끝없이 반복되며 갈라지는 이미지이다.

 

  다른 이미지 하나를 더 허락한다면, 나는 감히 글을 쓰는 손택의 옆―그녀 자신의 묘사에 따르자면 그녀는 “파리에 있는 작은 방 안에서, 등나무 의자에 앉아 정원이 내려다보이는 창 앞에 놓인 타자기로 이 글을 쓰고 있다.”(p15)―에 한나 아렌트를 앉히고 싶다. 평생 전체주의와 지적인 투쟁을 펼친 한나 아렌트의 비명(碑銘)에 ꡔ어두운 시대의 사람들ꡕ(문학과지성사, 1983)이 있다면, 미국에 살며, 이에 저항하고, ‘해석으로 복수’를 가한 수전 손택의 비명엔 ꡔ우울한 열정ꡕ(시울, 2005)이 있다. 놀랍도록 비슷한 두 책은 하나의 거울이며, 이 구분할 수 없는 내면과 외면에 등나무 의자에 앉아 글을 쓰는 손택과 쇼파에 기대어 낮고 우울한 명상에 잠긴 아렌트가 서로를 바라보고 있다.

 

  텍스트 바깥을 맴도는 사유를 멈추고, 내부로 들어가 보자. 원래 이 책의 원제는 책에 수록된 벤야민에 대한 글의 소제목인 「토성의 영향 아래(Under the Sign of Saturn)」이다. “나는 토성의 영향 아래 태어났다. 가장 느리게 공전하는 별, 우회와 지연의 행성……”이라는 벤야민 자신에 대한 주석을 표제로 선택하고 있다는 점에서 수전 손택의 집필 의도를 알 수 있다. 그녀는 한 사람의 지적 흐름을 쫓아가며 이에 대한 과학적인 비판과 해석을 내리기 보다는, 그 사람을 사로잡은 문학적 열정과 생을 가득채운 비의(秘意)적 기질을 통해 접근하고 있다. 이 때문에 이 책에 담긴 일곱 편의 에세이들은 각기 하나의 키워드로 설명될 수 있다. 벤야민에게 ‘우울’은 폐허로 상징되는 그의 공간을 탐색하는 이정표이며, 바르트에게 있어 ‘주이상스(jouissance)’는 삶과 문학에 대한 그의 태도였다. 그리고 아르토의 ‘광기’는 문학에 대한 자신의 자세이다. 그녀는 자신이 바라보는 대상의 삶에 대한 깊은 통찰을 통해 그 사람의 기질을 읽어내고 이를 다시 글로 적어가고 있다. 적어도 이 점에서 그녀는 그녀 자신이 아르토에게 내린 정신의 여행을 가능케 하는 “영매”(p236)라는 표현 아래 놓여 있다.

 

  이 책은 정확하게 일곱 명의 예술가에 대한 에세이이다. 서평의 예절을 따라 친절하게 설명하자면, 그들은 1960~70년대 미국의 사회정치사상에 큰 영향을 미친 작가 폴 굿맨, <올림피아>와 <의지의 승리>라는 기록영화를 통해 히틀러 시대의 파시즘 미학을 구현한 레니 리펜슈탈, 너무나도 유명한 발터 벤야민, <히틀러, 독일영화>라는 영화를 통해 현대의 역사를 고발하는 한스-위르겐 지버베르크, 벤야민보다 유명하지만 벤야민만큼 광범위한 컬트팬을 확보하지 못한 롤랑 바르트, 1981년 노벨상 수상으로 한국에 잠깐 번역되었다 사라진 ꡔ군중과 권력ꡕ(한길사, 1982)의 저자 엘리아스 카네티, 잔혹연극론으로 유명하지만 이해의 영역에서 “지독하게 멀리 있는, 도무지 흡수할 수 없는 목소리”(p238)인 앙토냉 아르토이다.

 

  손택은 “30페이지의 에세이를 쓰기 위해 수 천 페이지를 써야했고 매 페이지마다 30~40개의 초고”(p1)가 필요했을 만큼 언어를 고통스럽게 가공하며 대상들에 접근하고 있다. 각기 다른 예술가들에 대해 글을 쓰고 있기 때문에 단호한 어조의 한 문장으로 설명할 순 없지만, 나를 매혹시킨 손택의 글은 폴 굿맨에 대한 열광적인 조사(弔詞)와 파시즘을 향한 그녀의 차가운 냉소, 그리고 아르토를 향한 주목할 만한 ‘다가감’이다. (아쉽지만 아르토에 대한 손택의 접근은 분량을 고려하여 생략하겠다)

  먼저 파시즘에 대한 신랄한 냉소를 보자. 손택은 리펜슈탈의 사진집 ꡔ누바족의 최후ꡕ를 통해 원시적인 것에 대한 찬미를 넘어서는 파시즘적인 미학의 향연을 읽어 낸다. 파시즘 미학은 “절제, 복종적 행동, 과장된 노력, 고통의 인내”를 통해 “복종을 찬미하고, 무정신의 상태를 찬양하고 죽음을 미화한다.”(p46) 이를 통해 만들어지는 것은 이상주의를 향해 돌진하는 눈먼 “공동체의 서사시”이다. 또한 손택은 리펜슈탈의 작업들이 재평가되고 있는 상황을 지적하며 오늘날에도 사라지지 않고 있는 파시즘적인 이상―“예술로서의 삶, 아름다움에 대한 숭배, 용기에 대한 물신주의, 공동체의 황홀경 속에서 소외의 해소, 지식인 배격, 남성 중심 가정”―을 비판한다.

 

  손택이 보여주는 냉소의 절정은 그녀가 리펜슈탈의 사진집과 함께 ꡔSS 제복ꡕ이라는 책을 거론하는 부분이다. (‘SS’는 히틀러가 만든 친위대(Schutzstaffel)의 약자이다) 이 책은 새도매저키즘 섹스를 즐기는 사람을 위해 기획된 “포르노그래피” 서적이다. ꡔSS 제국ꡕ을 리펜슈탈의 작품들과 함께 거론하는 손택의 의도는 명백하다. 즉 “두 책은 정신적 근원, 추구하는 바를 공유”(p55)하고 있는 것이다. 손택은 파시즘과 변태성욕을 동시에 거론하며, 리펜슈탈의 작업을 포르노그래피로, 그녀에 매혹되는 대중을 포르노그래피를 정신없이 바라보는 얼간이로 신랄하게 비판한다. 하지만 파시즘을 통한 환상의 결과는 “죽음”뿐이다.

 

  다시 앞으로 돌아가자. 이 책은 폴 굿맨의 부고를 접한 수전 손택의 애잔한 조사(弔詞)로 시작한다. 손택은 말한다. 폴 굿맨은 “나에게 작가가 된다는 것의 가치를 정립하게 해준 작가, 그리고 그 사람의 글을 내 글을 평가하는 판단 기준으로 삼은 작가”이며, “지난 20여 년 동안 그의 책 대부분이 다 갖추어지지 않은 집에서는 한 번도 산적이 없”다고. 조사는 죽은 자들을 위한 산자의 넋두리다. 이젠 허락을 받을 순 없지만, 그 헌사를 다시 손택에게 보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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