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지금 지리학인가 - 수퍼바이러스의 확산, 거대 유럽의 위기, IS의 출현까지 혼돈의 세계정세를 꿰뚫는 공간적 사유의 힘
하름 데 블레이 지음, 유나영 옮김 / 사회평론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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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원제는 'Why Geography Matters'이다. 생각해 보니 예전에 읽은 「건축은 왜 중요한가」의 원제도 'Why Architecture Matters'였다. 아마 미국에서 'Why X Matters'라는 제목으로 출간되는 시리즈인 것 같다. Why Architecture Matters라는 책의 번역인 '건축은 왜 중요한가'는 무척이나 섹시한 느낌의 제목일 뿐만 아니라 표지 디자인도 꽤 그럴 듯하고 내용도 괜찮았던 기억이 난다. 물론 '왜 지금 지리학인가'라는 제목 자체는 구판이었던 '분노의 지리학'보다 한결 정돈되고 나아진 느낌을 주지만, 「건축은 왜 중요한가」보다는 조금 아쉬운 느낌을 지울 수는 없다. 특히 '지금'이라는 단어가 그렇다. '지금' 이 순간 지리학이 중요해 진 거라면 과거에는 지리학이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단 말인가?


지금, 지리학은 황금기가 아니다. 지리학의 황금기란 포르투갈과 스페인과 그 밖의 여러 서유럽 모험가들이 대양을 항해할 수 있는 선박을 만들어 세계 곳곳을 쑤시고 다니던 바로 그 때였다. 낭만의 항해와 모험의 시대가 끝난 바로 직후 비극의 제국주의와 식민지 시대가 시작되긴 하지만, 과학의 발전을 통해 핵무기가 나온 것 때문에 과학 자체를 싸잡아 매도할 수 없듯이 지리학의 위대한 황금기에다가 비윤리적인 근대적 제국주의의 혐의를 덧씌울 수는 없을 것이다. 유럽의 모험가들은 세계 여러 곳을 돌아다니면서 땅을 탐험하고 동물과 식물을 분류하고 민족들을 조사하고 언어와 문화를 기록했는데, 그 기록들은 현대에 이르러 여러 학문의 꽃을 피웠고 (생물학, 인류학, 언어학 등) 우리가 여가와 휴식을 위해 하는 활동인 소위 '여행'이라는 것의 방법론과 컨텐츠를 만들어 주었다. 사실 우리가 여행을 하는 방식과 여행에서 보고 듣는 모든 것들이 과거 모험가가 했던 활동들의 좀 더 '안전한' 버전일 뿐이지 않는가? 내가 모르는 문화권에 가서 음식을 즐기거나, 사람들과 만나서 친구가 되거나, 협곡을 보거나 등산을 하는 여러 여행 활동들은 과거 모험가들이 투창을 맞을 걱정을 하거나 조난을 당할 걱정을 하면서도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기쁨을 누리기 위해 돌아다녔던 탐험과 행태적으로 다르지 않은 것이다. 때문에 지리학의 황금기는 지났지만, 지리학을 영원히 모르고 살 수는 없다.


책을 읽고 느낀 것은 지리학은 내가 생각한 것보다 더욱 광범위한 학문이었다는 것이다. 마치 역사학이라는 학문이 그렇듯이 말이다. 역사학이 '왕사'나 '제국사' 등만들 다루는 거시적인 학문이 아니라 '교통수단의 역사', '음료의 역사', '노래의 역사' 등 온갖 시시콜콜한 주제에 대해 다룰 수 있듯이, 지리학도 공간적인 모든 주제에 대해 얘기할 수 있다. 자연 (나무와 식생의 분포, 지역에 따른 기후, 동물의 진화, 인류의 발자취 등), 지형 (산맥, 화산, 호수, 바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있게 해 준 판구조) 인문 (민족의 이동과 갈라짐, 언어의 분포, 인구밀도), 정치 (국가와 지정학, 국경의 특성과 군대의 배치, 영해와 섬의 소유권 싸움), 경제 (선진국과 개발도상국의 분포, 무역의 이동) 등등...공간의 특성과 그에 영향을 받는 모든 주제의 분포에 대해 다룰 수 있으니 다루는 것들도 많아지고 또 주제들간에도 복잡하게 얽혀 있어 다뤄야 하는 것들의 상호작용도 조합적으로 많아진다. 예를 들어, 판구조에 따라 몇억년 전에 만들어진 거대한 산맥이 사람의 왕래를 불가능하게 하여, 바로 국경을 맞대고 있는 중국과 인도는 완전히 다른 문화와 민족과 언어를 가지게 되었는데, 20세기에 이르러 원래 사람이 살기 불가능했던 이 높은 산맥이 결국 영토 분쟁으로 이어지게 된다. 이런 복잡한 주제들 간의 상호작용이 지리학을 거대하고도 중요한 학문으로 만들어 준다. 역사를 공부하면서 묻게 되는 사소한 질문들, 예를 들어 "이 민족들은 왜 하나의 나라가 되지 못하고 갈라지게 되었나?" 혹은 "이 나라는 이렇게 큰 영토를 가질 수 있었나?"하는 질문들은 누구에게 묻기도 쉽지 않은데, 의외로 이런 것들 중에 지리학이 답해줄 수 있는 것들이 꽤 많다.


하지만 여전히 지리학은 마이너한 학문이다. 미국인들이 세계인들에게 '멍청하다'고 놀림당하는 큰 이유 중의 하나는 미국이 세계의 여러 나라들에 대해 놀랄 만치 무지하다는 사실 때문이며 (구글에 the world according to Americans라고 검색하면, 세계 여러 나라들에 대한 미국인의 편견 혹은 '무지함'을 잘 알 수 있는 지도가 많이 나온다.), 이는 저자의 말대로 미국인들이 지리학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뉴욕 타임스퀘어에 굳이 찾아가서 지나가는 미국인을 붙잡고 "Do you know Korea?" 혹은 "Do you Know Kimchi?"라고 물은 다음, 그 미국인이 하는 멍청한 대답에 대해 경악할 필요가 없다. 미국인의 지리에 대한 무관심에 대해 우리가 "알지 못했던 것" 자체도 역시 우리의 지리학에 대한 무지일 뿐이며, 한국인 역시 저자의 말마따나 미국인들과 손잡고 지리학을 공부할 필요가 있다. 지구상에 모든 자연지리와 인문지리가 탐험되어 더 이상 발견될 곳이 없다 하지만, 여전히 지리학은 중요하다. 지리학이란 탐험하고 기록하는 것 그 자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지리학은 공간적 상호작용에 대한 학문이고, 그 복잡성은 시시때때로 변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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