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 생각의 출현 - 대칭, 대칭의 붕괴에서 의식까지
박문호 지음 / 휴머니스트 / 2008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한때, 나는 뇌과학이나 인지과학에 관심을 가지고 어떤 책이라도 읽어보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뇌, 생각의 출현"만은 절대 읽지 말라고, 이 책은 희대의 쓰레기라고 말하고 다닌 적 있다. 이제 와서 생각을 정리하고자 다시 한 번 책을 읽어 보았는데, 내가 사실상 잘못을 저지른 것 같다. 이 책이 그정도의 취급을 받을 이유는 없다고 느껴진다. 


희대의 쓰레기 정도의 오를 책들은 다음과 같다. "물은 답을 알고 있다", 이 책은 물에다가 칭찬을 해 주면 물의 원소 배열이 변해 좋은 물이 되고 욕을 하면 나쁜 물이 된다고 하는 내용의, 꽤나 화제가 되었던 그 책이다. 완전히 근거 없는 사이비과학이며, 사람들에게 과학에 대한 잘못된 인상과 과학과 윤리학의 잘못된 뒤섞임을 동시에 주입시키는 개쓰레기 책이다. "다윈의 블랙박스", 그 유면한 지적설계론자 마이클 베히의 책으로, 사이비과학의 결정체이자 베스트인 창조론에 대한 내용이다. 이 책의 잘못된 점은 순전한 기독교인들과 죄없는 과학자들까지 완벽하게 쓸모없는 영성의 전쟁으로 끌어들인다는 점이다. "환단고기", 사이비 역사의 최고봉. 우리나라가 고대에 세계를 지배했다는 잘못된 사실을 대중들에게 주입시켜, 심지어 각종 정치인, 지식인, 대중들에게까지 물들어버려서 대중역사관, 통일정책, 외교, 행정정책에서까지 환뽕이 묻어나게 만든 대표적인 개쓰레기책이다.


이런 책들에 비한다면야, "뇌, 생각의 출현"은 개쓰레기 책이라고 부르기엔 저 책들한테 미안해진다. 이 책은 그냥 못쓴 책일 뿐이며 개쓰레기라고까지 평가받을 이유는 없다. 적어도 이 책은 거짓말은 안하지 않는가. 내가 과거에 이 책에 대한 부적절한 평가를 내린 것은, 당시 이보다 더 잘쓴 뇌과학 책이 묻히면서 이렇게 못쓴 책이 베스트셀러에 오르고 심지어 이 책이 마치 뇌과학의 바이블인양 회자되었기 때문이다. "무슨 소린지 모르겠지만 대단한 책입니다 ㅠㅠ"라는 식으로 얘기하는 많은 교양과학 독서가들에게 약간 짜증이 난 나머지 나도 모르게 과민반응을 한 모양이다. (물론 "내가 써도 이보단 더 잘 쓰겠다" 하는 심리와 함께 베스트셀러가 되자 사촌이 산 땅 때문에 배가 아픈 심리까지 복합적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나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었었다. 당신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책이 잘못된 것이다. 당신은 베스트셀러라는 헛된 명성에 휩쓸려 이만오천원을 소비한 가련한 희생자일 뿐이다.


애초에 베스트셀러에 오르지 않았다면 소리소문없이 사라질 재미없는 책이었다만, 결국엔 이 책이 베스트셀러에 올랐으므로 우리에겐 이 책에 대한 객관적이고 정당한 평가를 다시 한 번 부여해야 할 이유가 생겨버렸다. 게다가 출간된 지 6~7년이나 지나버렸으므로 마음을 가라앉히고 과거에 대해 차갑고 객관적인 평가를 내릴 최적의 시기이다. 나는 수많은 교양과학책 독서가 중 한 사람으로서 오늘 여기에서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단 하나의 리뷰를 남길 뿐이지만, 이 책을 읽고 멘붕에 빠졌지만 다른 사람들이 외치는 "최고의 책!"의 물결에 휩쓸려 이 책을 이해 못한 자기자신의 무식함을 탓하고 "좋아요"를 눌러 버린 안타까운 사람들에게 다른 관점도 있다는 사실을 주지시키려 한다.


이 책이 재미없는 책인 이유 1. 설명의 부재

우리는 궁금한 점을 해소하기 위해 교양과학책을 읽는다. 예를 들어 상대성이론이 궁금해 어떤 책을 읽을 떄, 상대성이론은 빛의 속도가 일정하고 모든 운동은 관측자에 대해 상대적이고 그에 따라 시간이 줄어들거나 늘어나거나 질량이 에너지와 등가거나 하는 등의 설명을 듣고 궁금증을 해소한다. 이 책은 "의식"을 부제목으로 삼고 있는 의식에 대한 책인데, 의식은 엄청나게 많은 궁금증이 있고, 심지어 그 궁금증의 목록은 아직도 현대과학이 다 밝혀내지 않았다. 다만 상대성이론이 뭔지 모르는 사람이 그에 대한 질문을 할 수 없듯이, 의식이 뭔지조차 모르는 사람이 의식에 대한 궁금증을 가질 리 없으므로, 의식에 대한 궁금증을 해결하려면 정의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책에서 의식을 서술하는 식을 보자. 228페이지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정신분석학자 마크 솜즈에 따르면 의식에는 의식의 상태뿐만 아니라 의식의 내용이 있습니다". 


좋다. 이정도면 의식을 정의하는 좋은 출발점이 될 수 있다. 아니, 있었다. 우리는 궁금증이 생겼지만, (의식의 상태란 무엇인가? 의식의 내용이란 무엇인가?) 글은 다음과 같이 넘어간다.


"의식의 내용은 대뇌피질의 여러 신경세표 연합체에서 외부의 감각 입력을 처리하여 만들어지죠."


이것은 의식의 내용에 대한 설명이 아니다. 이 구절은 우리의 궁금함을 해결해주는 데 실패했다. 책의 모든 구절들은 이렇게 설명이 부재되어 있으며, 나머지 내용엔 그냥 뇌의 부분들에 대한 명칭, 뇌의 부분들이 어떻게 이어져 있는지를 지루하게 나열할 뿐이다.


다른 주제도 다를 바 없다. "본다"란 무엇인가? p255에 "'본다'는 현상"이라는 소제목과 함께 장장 3페이지에 걸쳐 무언가를 설명하는데, 정작 '본다'는 현상에 대한 정의는 없다. 이런 식이다.


"눈의 앞쪽에는 홍채 앞 비어있는 공간인 동공이 있고 동공의 바깥에 공막이라는 흰색 층, 맨 안쪽에 상이 맺히는 망막, ...."


마찬가지로 이것도 설명이 아니다. 구조의 명칭만 지루하게 나열하고 있을 뿐이다.



이 책이 재미없는 책인 이유 2. 레퍼런스의 빈곤함


이 책의 주요 레퍼런스는 에델만과 이나스이다. 특히 에델만의 20년전 이론인 "Neural Selection Theory"를 강조하고 있는데, 문제는 20년이면 뇌과학 분야에선 강산이 변하다 못해 뒤집어지는 세월이다. Neural Selection Theory가 가장 중요한 의식이론이라고 하는데, 의식에 관해 나름 열심히 팠다고 자부하는 내가 들어보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물론 내가 배움이 부족해 이 이론에 대해 못들어봤을 수도 있다. 문제는 이 이론에 대한 "설명이 부재"해 있기 때문에, 내 생각이 맞는지 틀렸는지를 판단할 기준이 안 선다는 것이다. 


모름지기 과학책이라면, 특히 2000년 이후의 과학책이라면 인용하는 문장 하나하나마다 reference가 달리고, 그 논문이나 책의 제목은 책 뒤에 정리되어 있어야 한다. 그것은 교양과학책이라도 예외는 없다. 왜냐햐면 그것은 이 얘기가 맞는지 틀렸는지를 확인할 수 있게 해 주고, 추가로 궁금한 점을 찾을 수 있도록 해 주는 연결링크이기 때문이다. 저자가 분야에 대해 완전히 전지해서 모든 이론을 최신의 상태로 유지하지 않을 바엔엔 적어도 업데이트되지 못한 옛날의 틀린 이론이 몇 개는 나오기 마련이다. 그 때 우리는 reference를 따라 들어가 논문을 읽어 보거나, 적어도 연도정도라도 확인해 보고 이론의 수용도를 능동적으로 결정한다. 이 책은 reference 링크가 없고, 뒤쪽엔 그냥 저자가 읽은 책의 목록만 나와 있을 뿐이다.


이 책이 재미없는 책인 이유 3. 전문가가 아님


서두에도 밝히고 있지만, 저자는 전자공학박사이다. 같은 이공계라 그냥 쉽게 넘어가는 경향이 있는 것 같지만, 나에게 이것은 매우 이상해 보인다. 저자는 뇌의 전문가가 아니다. 전자공학의 전문가일 뿐이다. 뇌에 관련된 석사나 학사같은 학위도 없다. (박사까진 안 바란다) 심지어 저자는 논문도 읽지 않는다. (reference 목록엔 교양과학책 목록 뿐이다) 그냥 저자는 교양과학 서적만 읽고 책을 썼다. 과학책은 소설이나 에세이가 아니다. 어느 정도는 전문성이 담보되어야 책의 내용에 신빙성이 갈 텐데, 그런 것 없이 마치 전문가인 양 책을 쓰고 있으니 내용이 맞는지 틀린지는 둘째 치고 내용을 믿을 수가 없다. 책을 쓰기 위해 학위까지 밟길 바라는 거냐고? 아니다. 그냥 최신 논문 몇십 개 정도만 제대로 싸이트 해 놓기만 바랄 뿐이다. 제대로 reference를 구축하고, 전문가 정도는 아니지만 전문가에 준하는 지식과 실력을 자랑할 수 있음을 형식적으로 제대로 보여주길 바랄 뿐이다.


전문가가 아닌 사람이, 전문가인 척 하면서, 교양과학을 썼는데, 내용은 없고, 용어만 엄청 어렵다. 우리나라가 아무리 번역 불모지라 해도 이 책보다 더 재밌고 전문적이면서 내용이 신빙성 가는 좋은 뇌과학 책이 수없이 많이 번역되어 있다. 안타깝다.


이 책이 재미없는 책인 이유 4. 우주는 별로 관련 없고 불교도 별로 관련 없다.


초반과 후반에 우주와 물리학 얘기를 하는데, 뭐 딱히 연결고리를 찾자면 못찾을 건 아니지만 사족의 느낌이다. 중간중간 하는 불교 얘기들도 이상하고 뜬금없다. 아마도 전문가가 했으면 신빙성이 갔겠지만 전문가가 아니니까 아는 척 하는 느낌이라 별로다.


물론 저자는 강연도 많이 다니고 다른 책도 많이 썼는데 책 하나만 가지고 저자를 까는 것은 잘못된 일임을 인정한다. 이 글이 저자를 깐다기보단 책 자체를 까는 글로 읽히길 바라며 논쟁을 가까스로 피하길 바라본다. 혹시 모르지, 강연 한 번 들어보고 저자의 전문성을 인정하게 될지도. 아니면 다른 책을 읽어 보고 전문성의 형식을 갖추지 않은 이유가 저자의 의도 때문이 아니라 출판사의 문제나 강연 형식을 빌린 책의 기획의 문제일 인 것을 깨달을 수도.


그래도 이 책이 대단하다고 생각되는 사람이 있다면, 호아킨 푸스테르의 "신경과학으로 보는 마음의 지도"를 한 번 읽어보길 바란다. 전문용어가 많아 좀 어렵지만 매우 좋은 책이고, "뇌, 생각의 출현"의 저자도 이 책을 추천했으니 아마 영향도 어느 정도 받아서 책의 주제도 비슷할 것이니 더 잘 맞을 것이다. "뇌, 생각의 출현" 정도로 신세계를 경험했다면, 이 책으로는 아마 인생이 송두리째 바뀌는 대단한 경험을 하게 될 지도 모른다. 건투를 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