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은 왜 중요한가
폴 골드버거 지음, 윤길순 옮김 / 미메시스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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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은 왜 중요한가를 읽고
한국 번역시 제목을 자꾸 이상하게 바꾸는 출판사들이 있는데, 이건 안바꿔서 천만다행이다. 의문문인 이 제목은 읽기도 전에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건축은 왜 중요한가? 비바람을 막아줘서 중요하다고 말한다면, 우산도 중요해야 한다. (물론 출근길에 비온다는 예보를 듣지 못하고 나갈 때 우산은 무척 중요해지긴 한다만)

내가 건축에 흥미를 느끼기 시작했을 때, 그때가 언제냐면 미국 동부 여행을 하고 있을 땐데, 르 코르뷔지에니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니 미스 반 데어 로에니 하는, 말하자면 대가들의 빌딩들을 열심히 찾아다닐 생각을 했다. 시그램 빌딩(미스 반 데어 로에), 구겐하임 미술관(프랭크 로이드 라이트) 등을 돌아다니며 직접 보는 영광을 누렸지만, 그것은 나에게 하나의 조각물 이상으로서 다가오진 못했고, 물론 역사적인 맥락을 (조악하게나마) 파악하고 여행길을 오르긴 했지만 사람들이 극찬해 마지많는 비례미니 조형성이니 하는 것들을 온몸으로 느꼈냐 하면 그건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서울시 종로구에도 시그램 빌딩이랑 똑같이 생긴 삼일빌딩도 있었거든.

물론 건축물을 하나의 예술작품으로서 바라보는 관점도 있을 수 있고, 실제로 건축가들이 예술가처럼 유명하거나, 그렇게 행동하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전 세계의 모든 인구가 집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생각해 볼 때, 도시나 교외의 모든 건물들을 이런 예술가들이 전부 다 지을 수는 없는 일이다. 이럴 때는 그냥 집장사나, 공공기관이나, 아파트 회사나, 심지어는 건물을 살 사람 스스로가 집을 만드는 수밖에 없으며, 이러한 건축은 예술품보다는 공예품에 가까워 보인다.

물론 공예품이 예술적이지 않다는 말은 아니다(고려청자의 예로 볼 때). 다만 거들먹거리는 예술-건축가들보다는 일반인이나 장사꾼에 좀 더 가까운 사람들이 집을 지을 경우, 고유의 예술적 성취나 도전적 취향보다는 일반적 유형이나 시대 정신이 진하게 우러나오며, 우리는 이런 건축(때로는 조금 싼티나는)을 받아들이고 우리의 것으로 만들 수밖에 없다.

그래서 뉴욕과 시카고, 보스턴에서 느낀 것은 웅장하고 예술적인 랜드마크보다는 도시의 구석구석에서 보이는 저렴한 건물이나 낡고 활기찬 거주구역이 더 재미있다는 거였다. 그리고 사실 이것이야말로 누구나 누리고 즐기고 있는 여행의 참목적이지 않은가. 대단한 걸 깨달은 건 아니고 그냥 뭐 보잘것 없고 쪼잔한 인생의 경험이거니 한다.

우리는 해외로 떠나는 도시여행에서 유명한 건축물들을 보는 루트로 다니곤 하지만, 사실상 큰 건물에서 무엇을 느낄 것인지를 정하긴 쉽지 않다. 역사성? 조형성? 장엄미? 관광객만 득시글거리는 거대한 옛날 공간에서 관광 안내 책자에 있는 알듯 모를듯한 구절 몇 줄 읽고 아 그렇구나 하면서 사진이나 찍고 다니진 않는지? 아는 만큼 보인다는 얘기도 있지만 진짜 알아야 할 것은 거대한 건축물의 소개글보다는, 주변의 일반적인 도시 건축물의 구성 안에서 그 특별하고 예술적인 건축이 어떤 역할을 했고, 또 지금 어떤 역할을 하는 지이다. 문화란 상대적인 비교의 틀 안에서 작용을 하는 것이라, 또한 우리의 것도 제대로 알아야 한다(지금 내가 "우리의 것은 소중한 것이야"라고 말하는 거 아니다.) 내가 살았던 건축과 도시와 문화의 특성을 제대로 알아야 다른 나라의 사람들이 왜 이런 건물과 도시에서 사는지를 비교하며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다.

평범하고 일상적인 건축물들은 이렇게 문화와 예술로서 작용하지만, 거기 가까이 사는 사람들은 오히려 그것들을 잘 깨닫지 못한다. 서울 사람이 남산타워 잘 안가듯이 말이다. 보존과 철거의 대립 문제는 우리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다만 뉴욕 사람들이 경험이 조금 더 많을 뿐이다. 뉴욕 시민들이 사랑했던 펜실베니아 역사를 철거하고 거대하고 투박할 뿐인 메디슨 스퀘어 가든을 지었던 경험은 아픈 기억으로 남아 있으며, 그 경험으로 그들은 그랜드 센트럴 터미널을 지켜 냈다. (여긴 나도가봤다. 터미널 내부의 크고 널찍한 공간의 경험은 매우 특별했다.) 실수와 이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는 깨달음의 역사가 서울에서 현재 진행되고 있는 논쟁과 판박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뭐 어딜 가나 사람들이 생각하는 건 비슷하다고 느껴진다. 우리는 피맛길이나 한옥마을 같은 것들을 잃었으며, 서울 구시청사 같은 근대 유물들도 계속해서 잃어 가고 있다. 거기서 더 좋은 건물들이 나오면 좋겠지만, 실제로 지금 지어진 건 크고 높기만 할뿐인 상업빌딩이거나, 그냥 휑한 아파트단지였다. (그리고 쓰나미 서울시청이었다) 선유도공원처럼 보존과 개발을 동시에 달성한 경우도 있지만, 우리는 거의 대부분 둘 중 하나만 선택해야 한다. 그리고 언제나 보존이 옳지만도 않다. 종로 세운상가는 보존이 좋을까 철거가 좋을까? 동대문 창신동은 보존인가 재개발인가?

각자의 재산권이 걸려 있어서 매우 민감한 문제이긴 하지만 어쨌든 뭔가 성숙한 시민의식과 뭔가 민주적 투표권 행사로 옳은 길을 찾을 수 있길 빈다. 책은 매우 재밌었고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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