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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에 빠진 아이 구하기 - 어떻게 세계의 절반을 가난으로부터 구할 것인가
피터 싱어 지음, 함규진 옮김 / 산책자 / 2009년 7월
평점 :
절판
피터 싱어는 쉬운 철학자다. 철학이란 게 뭔가? 한 쪽에선 노자니 장자니 하는 호호할배들의 구절들을 줄줄히 암기하고 있지 않으면 안될 것같은 분위기이고, 또 어디선 '에피스테메'니 '기관 없는 신체'니 하는 말 그대로 정신나간 정신분열적 얘기들을 두서없이 떠들고 하는 와중에, 쉬운 철학자란 게 있을 수나 있나? 칼빵 깨나 꼽아본 조폭이 이제부터 좀 착하게 살아보고 싶어서 그나마 유명하고 '쉬워 보이는' 칸트 정도 참고한다고 해도 뭔 의지의 준칙이 주관적인 동시에 보편적인 법칙이 어쩌구 해대는데 이게 도통 뭔 소린지 알게 뭔가. 피터 싱어는 고기를 먹지 말라 아니면 돈을 내놓고 기부를 해라 식으로 딱부러지게 말해주니 얼마나 좋은가.
하지만 쉽다고 얕보면 안 된다. 그의 쉬운 실천철학에 앤간한 내공으로는 반박할 수 없는 논리의 흐름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 하늘에 계시가 내려와 간음하지 말고 네 이웃의 물건을 탐하지 말라고 하셨던 종교의 여러분들께서는 네발 달린 짐승이야 하늘에 계신 우리(니네) 아버님이 내려주신 선물이니 감사히 먹고으면 되지 뭔 채식주의같은 요상한 좌빨스러운 주장을 하는 사람들을 향해 쯧짯짯 혀나 차겠지마는, 그런 종교적 도그마 없이 던져진 현존재분들이 착하게 살고 싶다고 피터 싱어의 논리를 하나하나 접해나가다 보면 기존에 배웠던 관습적 윤리관이 그의 논리적 결론 앞에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것을 보고 아연실색하게 된다. 고기를 먹으면 나쁜 놈이라고? 기부를 안 하면 나쁜 놈이라고? 낙태를 한다고 그렇게 나쁜 놈은 아니라고? 그런데 그 논리를 반박할 수가 없잖아!
쉽게 말하자면 피터 싱어의 스타일은, 당연한 걸 당연하게 생각하고, 그걸 끝까지 논리적으로 밀고 나가서 당연해 보이지 않은 것도 당연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만드는 것이다. 번역서 제목으로 쓰인 '물에 빠진 아이 구하기'가 가장 쉬운 예이다. 아이가 물에 빠졌다. 넌 구할 거야? 물론. 이 당연한 윤리적 실천이 단어만 조금 바뀐다고 해서 가치가 달라지진 않겠지? 물론!! 그렇다면, 지금 당장 아이가 가난 때문에 죽을 것 같애. 그러므로 넌 그 아이를 살려야 해. 아니 이럴 수가!
논리라는 게 뭔가. 일관성을 말하는 것이다. 내가 기독교적 도그마에 따라 살 것이라고 결심했으면, 남의 간음을 불륜이라 비판하면서 내 간음을 로맨스라 칭하면 안 되는 것이다. 내가 이 세상의 모든 생명체의 고통의 총량을 감소시킨다는 공리주의적 입장을 가진다면, '논리적으로 당연하게도' 일관적으로 인간에서부터 닭, 소, 돼지 등의 동물에까지 그 기준을 적용시켜야 한다. 아동 폭력에 눈물흘리면서 동시에 삼겹살을 구우면 안 되는 것이다. 피터 싱어는 이런 사람을 종차별주의자라 칭한다. 유신론자보다도 논리적 일관성이 떨어지는 사람이다.
윤리적으로 사는 데 논리가 무슨 상관이야! 라고 어떤 사람이 외친다. 사실, 이 사람은 지금까지 자기가 남부끄럽지 않게 선한 삶을 살아왔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특별히 기부를 하거나 채식을 하거나 한 건 아니지만(사실 그는 고기를 무척 좋아한다!) 지금껏 살아온 대로 지하철에서 노인들에게 자리를 적극적으로 양보하거나, 어려움에 처한 이웃을 팔소매를 걷어부치며 활발히 도와줄 정도로 훌륭한 심성을 가진 사람이다. 그런데 피터 싱어에 의해, 그는 졸지에 나쁜 사람이 되었다. 고기를 많이 먹고, 아프리카의 죽어가는 아이를 모른 체 했기 때문에. 정말로 윤리에, 도덕에 논리가 무슨 상관인가?
정말로 고민이 되는 순간은 이 때이다. 피터 싱어의 말대로 자신의 윤리관에 논리적 일관성을 추가하여 생활방식을 대대적으로 뜯어고칠 것인가, 아니면 지금껏 살아온 대로 착하게 살지만 고기도 먹고 기부도 안하는 위의 어떤 사람같은 종차별주의자로 살 것인가. 이것은 자신의 선택이다. 누가 뭐라 하지 않는다. 다만, 내 경우엔 논리적 일관성을 지켜 내 윤리관을 수정한 것이 맘 편했다. 내가 어릴 적부터 이상했던 점은, 인간들은 인간이든 식용이 아닌 동물이든간에 고통 반응을 보이면 불쌍하게 생각하고 생명을 빼앗는 행위에 대해 큰 죄책감을 가지는 반면, 소와 닭과 돼지에 관해선 '먹는 거니까 어쩔 수 없어'라고 하며 죽임에 대한 아무런 죄책감도 가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기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나는 이제 '남을 돕지 않는 것은 나쁜 것이다'라는 주장에 대해 반박을 할 수 없는 입장에 도달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효과적인 논박이 떠오르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마음 편히 먹고 기부를 하기로 했다. 현재 나는 다달이 얼마를 기관에 기부하고 있다. 특별히 아프리카의 아이들이나 점심을 굶는 결손 가정의 아이들이 불쌍하다고 느끼는 건 아니다. 그냥, 논리적 비일관성이 참을 수 없는 것이다.
이 책을 읽는 여러분들도 무언가 반박거리를 찾아 보라. 물론 몇 가지 반박에 대한 피터 싱어의 대답이 책에 실려 있기도 하다. 그 질문을 피해서 독창적인 반박을 생각해 보라. 논리적 일관성을 갖추면서 기부하지 않아도 될 정당한 이유를 찾아내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현재 세계적으로 가장 논쟁적이고 유명한 윤리철학자를 이긴 사람이 된다. 그렇게 된다면, 기부를 하지 않아도 좋다. 그게 아니라면, 웬만하면 기부할 기관을 한 번 찾아 보고 기부를 시작해라. 책에 나와 있는 웹싸이트 http://thelifeyoucansave.com에 한 번 가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뭔가를 시작할 시간이다. 겨우 논리적 일관성을 지키는 것만으로 세상이 아름다워 지는 것을 느껴 보라.
※ 이 글은 책에 나와 있는 대로 '나의 기부 사실을 널리 알리기'를 실천하기 위해 쓰여진 글이다. 일련의 심리학 연구에 의하면, 기부하는 행위를 널리 드러내면, 다른 사람들의 기부액도 같이 올라갈 수 있다. 말하자면, 기부한다는 사실을 겸양떨어 숨기지 말고, 만천하에 드러내서 자랑하라는 것이다. 나야말로 원래 인생의 모토가 겸손인 사람이지만, 이번만은 예외적으로 한 번 나의 위대함을 자랑해 본다. 나는 내 소득의 일부를 기부하는 훌륭한 사람이다! 그러므로 여러분들도 함께 하는 게 어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