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밥상 - 농장에서 식탁까지, 그 길고 잔인한 여정에 대한 논쟁적 탐험
피터 싱어.짐 메이슨 지음, 함규진 옮김 / 산책자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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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엔 가끔씩 '개고기'의 찬반에 대한 이슈가 기사의 형태로 제시되고, 거기에 여러 네티즌들의 댓글이 달린다. 보통 패턴은 이렇다. 기사는 개고기를 반대하는 동물보호단체 또는 애견인들의 시위에 대한 내용이고, 댓글은 그들을 비판하는 내용이 주류를 이룬다. 또한 비판성 댓글의 주류는 '개만 동물이냐', '그렇다면 불쌍한 돼지나 소는 왜 먹냐' 는 식으로, 왜 그들은 다른 식용동물들의 권리는 주장하지 않으면서 유독 개의 권리만을 옹호하는지를 반문하는 글이다(심지어 어떤 사람은 '상추도 불쌍하다, 콩나물도 불쌍하다'는 식으로 억지춘향을 부리는 사람이 있다.)

사실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시키기 위해선 정말로 소나 돼지를 먹지 않는 소위 '채식주의자'여야만 한다. 저녁때 쏘주 한 잔에 삼겹살을 먹고 와서 '불쌍한 돼지는 먹어도 되고, 왜 개는 먹으면 안 되냐?'라고 주장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건 당연한 건데, 개고기를 먹는 것을 반대하지 않는 열혈 네티즌 중에 진짜로 소와 돼지를 먹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는 듯하다. 돼지와 소를 먹으면서 개까지 먹고 싶은 사람들은, '돼지와 소가 불쌍하다'는 식의 발언을 삼가야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시킬 수 있다. 아니면 정말로 채식주의를 하던지.

우리가 무언가 윤리적인 문제를 주장할 때, 우리는 당연히 그 주장에 모순되지 않는 삶을 살고 있어야 한다. 무심코 내뱉은 말 한 마디의 무게는 천금이고,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는 올바른 삶은 까마득히 높은 나무 위의 열매이다. 떳떳하고 훌륭하게 말 한 마디를 하기 위해 우린 배워야 하고, 알아야 하고, 찾아다니면서 깨우쳐야 한다. 아무 생각도 없이 사는 것은 정말로 어리석은 짓이다. 우리가 아무 생각도 없이 사는 동안 우리의 밥상에서는 고통스럽게 죽어간 돼지와 소와 닭이 (어떨 때는 개가) 올려져 있을 것이다.

누군가를 불쌍히 여기는 것, 긍휼히 여기는 것이 시작일지언정, 이것이 다가 아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과 피를 나눈 가족 친지만을 생각한다. 어떤 사람은 같은 나라 사람만을 생각한다. 어떤 사람은 같은 인종만을 생각한다. 어떤 사람은 자신과 같은 종족인 '인간'만을 생각한다. 전부 다 잘못되었다. 말하자면 윤리적 명제에 대한 기준이 결여되었다. 왜 누구는 불쌍히 여기고 누구는 불쌍히 여기지 않아도 되는 지에 대한 기준이 없는 것이다. 왜 그들은 '불쌍히 여김'에서 소외되었는지에 대한 정당한 기준이 없는 것이다. 결국 이 사람들의 주장도 삼겹살을 좋아하면서 돼지를 불쌍히 여기는 네티즌의 주장과 다를 바 없다. 뜬구름에 불과하다.

'갈은 인간(혹은 가족, 나라, 민족, 인종)이니까'라는 생각은 명확한 기준이 될 수 없다. 그것보다도 더 깊은 수준의 기준이 필요하다. '고통'이라는 기준은 훌륭하다. 고통은 누구나 알고 있듯이, 정말 나쁜 것이다. '환경'이라는 기준도 매우 좋다. 환경이 나빠져 우리의 후손들이 살지 못하게 된다면, 그것은 나쁘다. 명확한 기준은 단순히 '누군가를 불쌍히 여겨, 그를 괴롭히거나 심지어 죽이는 것은 나쁘다'라는 단순한 관념에서 더 나아갈 수 있게 해 준다. 불쌍히 여기는 누군가에 대한 집합을 완성하는 것이다.

그 후로는 당연히 지킬 일만이 남았다. 고통을 느끼는 동물이 존재하지 않도록 고기를 먹지 않는 것. 누군가가 고통을 받지 않고 살 수 있도록 상품을 정당한 대가로 지불하는 것. 환경을 파괴하는 공장식 농장을 반대하여 유기농 식품을 먹는 것. 이것들을 지키기 위해선 많은 고난과 열정이 요구된다. 하지만 할 것은 해야 한다. 말 그대로 우리는 인간이 아닌가. 왜 잘못된 일에, 하면 안 되는 일들에 눈을 피하는가?

이 책은 그에 대한 지침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채식주의가 너무 부담스럽다면 책에 제시한 '양심적인 잡식주의자'의 삶을 살아도 좋다. 이 방식은 아무 생각 없이 사는 것보다 확실히 더 도움이 된다. '완벽한 채식주의'를 지키는 것은 어려울뿐더러 하다가 말면 그것이 더 손해다. 책의 말미에 제시된 대로, 엄격한 윤리주의자보다는 자신의 욕망을 허용하는 수준에서 적당한 선을 제시하는 것도 좋다. 중요한 것은 '윤리적 삶을 살겠다고 하는 의지' 그 자체이다. 하나의 완성된 인격체로서 말이다. 그래야만 한 줄의 양심적인 댓글을 달 자격이 생긴다. 우리는 종교적 교리를 지키는 것이 아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미국이나 유럽에 비해 이런 것에 '아무 생각 없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나는 느끼고 있다. 책에 소개된 '프리건'이라는 신념에 대해 나는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그들은 자신의 윤리적 신념에 따라 쓰레기에 버려진 식품들을 주워 먹는다. 그들은 식품에 잠재되어 있는 자본주의적 시스템을 반대하고, 돈을 지불하고 비윤리적인 상품을 사는 대신 아예 그런 상품을 거부하는 쪽에 선다. 우리나라에서 이런 삶을 살 수 있을까? 일단 채식주의 자체가 그것을 배우지 않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일'로 치부되기 십상이다.

'나 혼자가 이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라는 걱정이 있을 것이다. 나도 그렇다. 나 하나가 고기를 먹지 않는다고 과연 몇 마리의 돼지가 행복한 삶을 살게 될 것인가? 이에 대해 여러 사람들의 생각이 있겠지만, 나는 좀 다른 생각을 주장하고 싶다. 역시 중요한 것은 얼마나 양심적으로 떳떳한 삶을 사는가다. 내 생활방식이 이 세상에 얼마나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지는 중요한 게 아니다. 단지 한 줄의 떳떳한 댓글을 달 수 있을 정도로 나의 삶이 양심적이라면, 그것은 내게 있어서 정말로 좋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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