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천윤리학
피터 싱어 지음 / 철학과현실사 / 1991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1969년에 젠센은 '우리는 IQ의 학문적 성취를 얼마나 높일 수 있는가'라는 논문을 발표하였는데, 그 논문의 결론은 다음과 같이 매우 제한적이고 모호한 진술로 끝내고 있다.

“우리는 여러 갈래의 다양한 증거들을 가지고 있으나, 그 중 어느 한 갈래의 증거도 그것만으로는 결정적이지 못하다. 그것들을 한꺼번에 고려해 보면, 유럽계 미국인과 아프리카계 미국인간의 평균적인 지능 차이에는, 유전적인 요소가 강력하게 작용하고 있다는 가정이 불합리한 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 내 의견으로는 엄격한 환경적 가설보다는 유전적 가설과 일치하는 증거들이 우세하다. 물론 유전적 가설들이 환경의 영향이나 유전적 요소와 환경적 요소의 상호작용을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 논문의 함의는 대중신문에 왜곡된 형태로 보도되었고, 젠센은 인종차별을 과학적으로 합리화시킨다는 명분으로 대중들에게 거센 비방을 받았다. 그는 비방자들의 반대로 인해 강의를 하지 못했고, 학생들은 그를 대학에서 쫒아낼 것을 요구했다. 그는 심지어 히틀러에 비유되기까지 했다.

유전학으로 인종적 차이를 밝혀내는 데 따른 정치적인 해석은 극명하게 둘로 나뉘는데, 한쪽은 이 과학적 발견이 실제로 잘못되었고 또 연구자의 정치적 의도가 분명하게 깔려 있으므로 거부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또 한쪽은 과학적 사실은 분명히 진실이며 그에 따라 우리의 행위도 그에 발맞추어 따라야 한다고 주장한다. 내 생각엔 두 주장 모두 틀렸으며 우리는 윤리적으로 올바른 길을 가기 위해 두 주장 모두를 강력히 거부하는 입장에 서야 한다고 생각한다.

첫 번째의 주장에 대한 반론은 간단하다. 그들의 결론 자체는 윤리적으로 정당하지만 그들에게 잘못된 점이 있다면 주장을 지키기 위해 과학에 대한 무리한 불신감을 표출하였다는 것이다. 과학이론은 과학자 사회 내에서 계속해서 다듬어지고 깎여져 나가며, 혹독한 반증에 대한 절차를 겪어야 살아남을 수 있다. 과학자의 개인적인 정치적 견해가 섞인 이론은 결국 폐기될 수밖에 없다. 살아남은 과학 이론은 그것이 정치적으로 그릇된 주장에 대해 힘을 실어줄 수 있다 해도, 과학 자체로 존중받아야 한다(이따가 보겠지만, 사실 이런 걱정은 기우에 지나지 않는다.)

두 번째의 주장은 현대인이라면 누구나 상식적으로 잘못되었다고 느끼고, 마땅이 윤리적으로 단호히 거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주장은 특별히 현대 사회에서만 거부되는 입장이고, 인류 역사를 돌이켜볼 때 매우 짧은 현대시대를 제외한 인류의 모든 역사에 광범위하게 받아들여졌던 주장이다. 많은 사람이 이 주장을 반대할 만한 뚜렷한 논증을 찾지 못하고, 인류의 대부분의 역사 동안 이 주장이 받아들여졌으며 현대 사회에만 유난히 거부되었다는 사실에 이상함을 느끼며, 과학이 이 주장을 뒷받침한다는 (일단 그 과학이론이 옳은가 그른가를 떠나) 사실에 배신감을 품고 허둥지둥하거나 망설이게 된다(그리고 일부는, 과학이 처음부터 잘못되었다는, 첫 번째의 주장으로 돌아서게 된다.)

이 글은 과학이 어떠한 사실을 밝혀내더라도 그것이 정치적 주장을 위해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밝히는 글이다. 또한 인종차별이나 성차별 등을 합리화하는 차별주의자들에게, 과학적 이론을 자신들의 주장에 대한 근거로 함부로 사용하는 것에 대한 비판과, 그들을 반대할 수 있는 주장에 대한 마땅한 근거를 제시하고자 함도 목표로 한다. 우선 인종간에 유전적 차이가 정말로 존재한다는 것을 가정하자. 특별히 논란이 되는 주제를 일부러 선택하여, 유전적 차이를 '지능'이라고 가정하자. 이 가정은 말 그대로 '가정'이며, 실제로는 현대의 과학은 아직 지능과 인종간의 어떠한 명확한 과학적 결론도 내릴 수 없다는 것을 명심하자. 나의 이 당부는 과거의 젠센의 경우에서처럼 내가 불합리하게 인종주의자로 몰릴 수도 있을 가능성을 미리 막고자 함이다.

일단 첫 번째로 지적하고 싶은 점은, 유전적 차이에 대한 과학적 사실은 '평균에 대한' 사실일 뿐이라는 것이다. 백인이 흑인보다 지능이 우월하다 할 지라도 가장 뛰어난 흑인이 가장 못난 백인보다도 지능이 떨어진다는 뜻은 아니다. 백인의 평균보다도 지능이 더 뛰어난 많은 흑인들이 '지능'을 근거로 차별을 받는다면, 지능이 떨어지는 백인들은 왜 지능이 뛰어난 흑인에 비해 더 나은 대우를 받는지에 대한 근거를 주지 못한다.

또한 반대로, 백인 집단 안에서도 지능에 대한 다양한 유전적 변인이 존재하며, 인종주의자가 그들의 주장을 성실히 수행하려면 백인 집단 안의 다양한 지능 분포에 대해 일일히 차별을 적용해야 한다는 당연한 사실에 대해서는 깨닫지 못한다. 단적인 예를 들자면, 아인슈타인은 그 엄청난 지능을 소유한 덕분에 수많은 백인을 노예로 부릴 권리를 가져야만 했을 것이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은 그렇게 하지 않았고, 어떠한 백인도 이 주장을 정당하다고 말하지 못한다.

두 번째로 지적하고 싶은 것은 좀 더 근본적인 이유이다. 예를 들어 어떤 집단에서 인종간에 지능의 차이가 존재한다는 과학적 사실을 근거로 '흑인종과 백인종은 다른 대우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고 하자. 그런데 또 다른 집단에서는 이 과학적 사실을 근거로 '부족한 지능을 보충하기 위해 흑인종이 백인종보다 조금 더 나은 대우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중립적인 입장에 서 있는 사람에게 두 주장의 옳고 그름을 판별하게 해 보자. 그는 어떠한 결론도 내리지 못할 것이다. 두 주장 다 언뜻 생각해 보면 옳은 것 같기도 하고, 다르게 생각해 보면 서로의 주장 때문에 틀린 것 같기도 하다.

문제는 두 주장 다 '평등'을 주장하고 있으면서(인종차별주의자는 흑인종에 대한 차별을 하면서 백인종 내의 평등을 주장한다. 인종'역'차별주의자는 백인종과 흑인종의 지능에 대한 불균형을 맞춰 평등하게 하기 위해 흑인을 역차별해야 한다고 말한다.) 평등에 대해 과학적 사실을 근거로 내세웠다는 데 있는데, 과학이 서로 상반되는 두 가지의 주장을 동시에 뒷받침할 수 있다는 위의 이상한 예시는 결국 '과학이 어떠한 윤리적 주장에도 근거로 제시될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으로 보인다. 결국 문제는 두 주장 모두 평등에 대한 어떠한 근거도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평등에 대한 근거를 어디서 찾아야 하는가? 피터 싱어가 제시한 '이익 평등 고려의 원칙(The principle of equal consideration of interests)'이라는 원칙이 가장 현대적이고 적절한 평등의 근거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람은 누구에게나 다른 사람이 '고통'을 느낄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으며, 고통을 경감하는 행위가 그 사람에게 좋은 일이라는 사실 또한 알고 있다. 즉, 고통은 바람직하지 못한 것이고, 고통을 경감하는 행위는 바람직한 행위이다. 바람직한 행위, 즉 윤리적 행위를 추구하기 위해선 나뿐만 아니라 고통을 느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는 모든 '의식을 가진 생명체'들의 고통의 총합이 최소한이 되도록 행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관점에서는 인종은 아무런 상관이 없다. 흑인이 고통을 느낄 수 없거나 백인보다 덜 고통을 느끼는 생명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성의 차이, 키의 차이, 부, 권력, 정치적 지위, 지리적 위치 또한 아무런 관계도 없다.

이익 평등 고려의 원칙을 충실히 지키기 위해선 많은 '비상식적 절차'가 따른다. 우선, 고통을 느낄 수 있는 모든 '사람이 아닌 동물' 또한 윤리적 대상으로 포함해야 한다. 이 말은, 우리는 윤리적으로 살기 위해 육식을 금하고 채식주의로 살아가야 한다는 말이다(식물은 일반적으로 고통을 느끼지 않는다고 알려져 있다). 또한 더 힘들고 비상식적인 일은, 낙태와 안락사와 심지어 유아살해 마저 특수한 상황에서는 허용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일이 비상식적이고 심지어 '역겨운' 일로 느껴지는 것은 우리가 결국 '종차별주의(인간 집단 안에서만 평등을 행해야 하며 다른 종에 대해서는 차별을 행사해도 된다는 입장)'라는 커다란 굴레에 묶여 있다는 뜻이다. 나는 인종차별주의와 마찬가지로, 종차별주의 또한 근거를 찾을 수 없는 이상한 윤리적 입장이기 때문에 결국엔 배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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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lgma 2009-06-30 03: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보기 드문 훌륭한 서평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