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홀 전쟁 - 양자 역학과 물리학의 미래를 둘러싼 위대한 과학 논쟁 ㅣ 사이언스 클래식 19
레너드 서스킨드 지음, 이종필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11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최근 일반 상대성 이론을 공부하며 레너드 서스킨드의 『물리의 정석: 일반 상대성 이론』을 교재로 삼았다. 전에도 말한 대로,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은 최소한의 이론적 설명과 필수적인 수식만으로 상대성 이론의 정수만을 최소한의 난이도로 풀어낸다는 데 있다. 『물리의 정석: 일반 상대성 이론』은 총 10개의 챕터 중 무려 세 챕터를 블랙홀에 할애한다. 내게는 이것이 퍽 낯설었는데, 왜냐하면 블랙홀이란 관측조차 극도로 어려운 특수하고 예외적인 천문학적 대상에 불과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이전까지 나는 블랙홀이라는 주제에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던 터라, 서스킨드의 교재에서 블랙홀을 그렇게 깊이 파고들어야 한다는 점에 짜증마저 일었다. 내가 알고 싶었던 건 블랙홀이 아니라 아인슈타인의 장 방정식 그 자체였으니까.


그러나 레너드 서스킨드는 다음과 같이 말하며 블랙홀이 일반 상대성 이론에서 핵심적인 주제임을 강조한다.


블랙홀을 잘 이해하는 것은 일반 상대성 이론을 이해하기 위한 전제 조건이다. 그 이유는 블랙홀이 가장 간단하며 이상적인 형태의 무거운 물체이기 때문이다. 블랙홀의 질량은 점에 집중되어 있다. 블랙홀은 상대성 이론에서 뉴턴 물리학의 점입자와 동등한 것이다.

서스킨드가 전하려는 바는 명확했다. 뉴턴의 만유인력 법칙을 넘어 아인슈타인 장 방정식의 극한에 가까운 중력 법칙을 이해하려면, 평범한 질량체가 아니라 고도로 응축되어 있으면서도 완벽한 대칭성을 지녀 계산이 가능한 대상이 필요하다. 물리학에서 블랙홀이란 신비로운 천문학적 관측 대상이 아니라 아인슈타인 장 방정식의 해 중 풀이가 가장 단순하고 보편적인 물리학적 연습문제인 셈이다.


때마침 출간된 브라이언 콕스와 제프 포셔의 『블랙홀』을 읽었다. 이 책은 아인슈타인 장 방정식 자체를 깊이 파고들지 않고도 펜로즈 다이어그램이라는 직관적인 도표를 통해 블랙홀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다. 중반부까지는 이 다이어그램을 통해 블랙홀의 상대성 이론을 짚어나가는데, 그림을 충실히 따라가다 보면 전반적인 메커니즘은 웬만큼 납득이 갈 정도로 이해시켜 준다. 하지만 수식을 통한 정밀한 이해와 견주어 보면 여전히 근본적인 이해의 영역에 온전히 도달하지 못한다는 인상을 받는다. 다이어그램을 통한 직관적 이해는 자칫 수식이 전달하는 본질을 건너뛰고도 다 이해된다는 착각에 빠지게 할 위험이 있다. 그런 점에서, 여전히 좋은 솔루션은 레너드 서스킨드의 『물리의 정석』을 병행하는 것이다.


콕스와 포셔의 『블랙홀』은 전반부를 할애해 아인슈타인 장 방정식의 대표적인 엄밀해들을 다룬 뒤, 후반부로 접어들어 완전히 색다른 측면을 다루기 시작한다. 바로 스티븐 호킹이 촉발한, 엔트로피와 정보 문제를 둘러싼, 물리학의 근본 원리에 위기까지 초래해서 서스킨드가 ‘블랙홀 전쟁’이라고까지 칭했던 블랙홀 정보 역설이다. ‘블랙홀 전쟁’이란, 호킹이 던진 도발적인 정보 소멸 주장에 맞서 서스킨드를 비롯한 물리학자들이 양자역학의 기본 법칙을 수호하고자 수십 년에 걸쳐 치열하게 벌인 지적 격돌이자, 서스킨드가 이를 기록한 책의 제목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나는 콕스와 포셔의 『블랙홀』을 읽은 후 자연스럽게 서스킨드의 『블랙홀 전쟁』으로 물흐르듯 넘어갔다. 콕스와 포셔의 책이 블랙홀 이론의 태동기(즉,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부터 책이 나오기 직전(2025년)의 최신 이론까지를 연대기순으로 조망하기에 더없이 훌륭하지만, 때로 불거지는 센스 없는 물리학자들의 과한 개그 욕심이 약간 거슬리는 단점이 있다. 반면에 서스킨드는 굉장한 달필가라서 『블랙홀 전쟁』은 물리학적 이론이 난도와 무관하게 글을 읽는 재미 자체가 크다. 치밀한 이론적 공방뿐 아니라 학자들 사이에 흘렀던 팽팽한 긴장감과 지적 대립을 생생하게 풀어내어 시종 흥미진진하게 몰입하게 만든다.


다만 『블랙홀 전쟁』이 2008년에 출간된 책이라 이후 진전된 최신 블랙홀 연구 성과를 담지 못했다는 점은 한계다. 서스킨드는 책 말미에 호킹에 대항해 ‘블랙홀 전쟁에서의 승리’를 선언하지만, 콕스와 포셔의 책이 짚듯 2012년 AMPS 그룹이 제기한 ‘화염벽(firewall) 역설’로 인해 서스킨드의 상보성 원리는 또 한번 거센 반격을 맞았다.(책에서는 ‘방화벽’이라 번역되었지만 이론에서는 불을 막는 벽이 아니라 불의 벽이므로 ‘화염벽’으로 번역되어야 한다) 진정한 결론은 2019년 페닝턴, 알메이리, 엥겔하트 등이 주도한 ‘아일랜드(Island) 공식’이 등장하면서 비로소 마련되었다. (물론 이 아일랜드 공식 역시 물리학의 유구한 역사 속에서 완전무결한 종착지라 단정하기엔 이르다) 따라서 서스킨드의 『블랙홀 전쟁』 한 권만으로는 블랙홀의 최신 흐름을 온전히 조망하기 어렵다. 바로 이 지점을 콕스와 포셔의 『블랙홀』이 채워주기에, 두 책을 나란히 교차해 읽기를 권한다.


블랙홀 정보 이론의 연대기 지금까지의 이야기만으로는 대체 호킹이 무엇을 주장했기에 서스킨드가 이 호들갑을 떨고, 블랙홀에 도대체 무슨 치명적인 문제가 숨어 있는지 와닿지 않았을 것이다. 이에 『블랙홀 전쟁』과 『블랙홀』 두 책을 바탕으로, 현대 물리학의 판도를 뒤흔든 블랙홀 정보 이론의 연대기를 짚어보고자 한다.


1. 스티븐 호킹의 ‘블랙홀은 그다지 검지 않다’ (1974년)

아인슈타인의 일반 상대성 이론에 의하면 블랙홀은 빛조차 빠져 나오지 못하는 완벽히 검은 천체여야 했다. 그러나 여기에 양자역학(정확히는 양자장론)을 들이댄 사람이 바로 스티븐 호킹이었다. 그의 발견인 ‘호킹 복사’에 따르면, 사건지평선 바로 바깥에서 쌍생성된 두 입자 중 하나가 블랙홀 안으로 떨어지면, 다른 입자는 우주 공간으로 탈출한다. 외부 관찰자의 눈에는 블랙홀이 마치 열을 뿜어내며 스스로 질량을 잃어가는 것처럼 보인다. ‘열’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블랙홀을 열역학적 엔트로피를 지닌 물리 계로 편입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2. 스티븐 호킹의 블랙홀 정보 역설 (1976년)

호킹은 여기서 더 나아가 현대 물리학의 근본을 뒤흔드는 무시무시한 역설을 던진다. 그가 계산한 호킹 복사는 블랙홀 속으로 빨려 들어간 물질의 고유한 정보를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완전한 무작위적 열복사였다. 이 현상은 양자역학의 근본 원칙인 '유니타리성'을 위반한다. 유니타리성이란, 양자역학에서 일어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의 확률을 다 더하면 시간에 상관없이 항상 100%여야 한다는 원칙, 즉 우주의 정보는 결코 사라지거나 새로 생겨나지 않고 완벽히 보존된다는 법칙이다. 유니타리성을 위반한다는 말은, 미래의 상태가 과거를 전혀 확정할 수 없음을 뜻한다. 레너드 서스킨드는 호킹이 블랙홀 정보 역설을 통해 물리학계에 ‘선전포고’를 감행했고 비로소 ‘전쟁’이 시작되었다고 말한다. 서스킨드는 호킹의 블랙홀 비유니타리성이 양자역학 자체를 폐기해야 할 만큼 심각함을 인지했기 때문이다.


3. 서스킨드의 블랙홀 상보성 (1993년)

서스킨드가 날린 첫 번째 반격은 일반인의 눈에는 호킹의 주장보다 훨씬 더 기괴하게 들린다. (솔직히 유니타리성이 깨지든 말든, 보통 사람에게 그것이 왜 재앙인지 직관적으로 와닿기나 할까?) 닐스 보어의 양자역학 상보성 원리—입자와 파동은 본질적으로 하나의 실재를 이루지만, 어떤 실험에서도 둘을 동시에 관측할 수는 없다는 원리—에서 이름을 따온 것만 보아도 서스킨드의 의중을 짐작할 수 있다. 서스킨드에 따르면 사건의 지평선을 넘어 떨어지는 물질의 정보는 그와 함께 떨어지는 관찰자 A, 그리고 외부의 관찰자 B에게 완전히 다르게 관측된다. 지평선을 넘어 자유낙하하는 사람 A는 아인슈타인의 등가원리대로 아무런 충격 없이 부드럽게 경계를 통과하며, 그에게 지평선은 그저 평범한 빈 공간일 뿐이다. 반면 외부 관찰자 B가 볼 때는 A는 지평선 바로 위의 극심한 열기에 부딪혀 재가 되어 흩어지는 것으로 관측된다. 서스킨드는 A에 대한 두 배타적인 운명들이, 모두 명백한 물리적 실재라고 말한다. 하나의 사건을 두고 양립할 수 없어 보이는 두 개의 역사(미래)가 펼쳐지는 셈이다.


4. 홀로그래피 원리(1993~5년)

네덜란드의 물리학자 헤라르뒤스 토프트와 레너드 서스킨드는 블랙홀 상보성을 포괄하는 근본적인 기하학 원리를 창안한다. 2차원 필름에 레이저를 쏘아 3차원 입체상을 맺히게 하는 기술에서 착안해 ‘홀로그래피 원리(Holographic Principle)’라는 이름을 붙였다. 3차원 공간 내부에서 일어나는 모든 물리 현상과 정보는 그 공간을 둘러싼 2차원 경계면 표면에 온전히 기록되어 있다는 이론이다. 이는 국소적인 블랙홀뿐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3차원 공간, 나아가 우주 전체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따라서 블랙홀 내부는 3차원 공간처럼 보이지만 실재하는 물리적 정보는 2차원 지평선 막에 펼쳐져 있으므로, 정보가 특이점에 갇혀 영원히 소멸할 이유가 없다. 이는 “블랙홀의 정보 수용량(엔트로피)은 부피가 아니라 사건의 지평선 표면적에 비례한다”는 베켄슈타인과 호킹의 발견을 자연스럽게 뒷받침한다. 이 원리로 블랙홀 상보성을 해석하자면, 외부 관찰자가 보는 지평선 표면의 2차원 양자 상태야말로 원본 데이터이며, 블랙홀 안으로 부드럽게 떨어지는 관찰자의 경험은 그 2차원 데이터들이 고도로 얽혀 만들어낸 3차원적 홀로그램, 즉 환상에 가깝다.


5. 후안 말다세나의 반 드 지터 공간과 AdS/CFT 대응 (1997년)

후안 말다세나는 음의 우주상수를 지닌 ‘반 드 지터(AdS)’ 시공간을 배경으로 홀로그래피 원리를 정밀한 수학적 대응 관계로 구체화한다. ‘AdS/CFT 대응'이란 이 중력이 작용하는 5차원 AdS 시공간 내부에서 일어나는 모든 물리 현상은, 그 바깥을 감싸는 4차원 평평한 경계면 위에서 정의되는 중력 없는 양자장론(등각장론, CFT)과 수학적으로 100% 동등하다(이중성을 이룬다)는 뜻이다. 4차원 경계면의 양자장론은 일반적인 양자역학 법칙을 따르므로 시간 변화에 따라 유니타리성이 완벽히 보존된다. 따라서 이와 동등한 5차원 내부 블랙홀의 형성 및 증발 과정에서도 정보가 결코 소멸할 수 없다는 강력한 증거가 확보되었다.


후안 말다세나의 연구를 토대로 스티븐 호킹은 패배를 인정하게 된다. 그러나 콕스와 포셔의 『블랙홀』에서는 관련 이야기가 계속해서 이어진다.


6. AMPS 그룹의 화염벽 역설 (2012년)

알메이리와 폴친스키 등(AMPS 그룹)은 양자 얽힘의 특성을 고려할 때, 정보가 호킹 복사로 빠져나오려면 지평선에 무한한 고에너지를 지닌 거대한 ‘화염벽(Firewall)’이 생겨나야 하며, 이는 아인슈타인의 등가원리를 정면으로 파괴한다는 사실을 밝혔다. 이 역설은 현대 물리학을 지탱하는 다음 세 가지 대원칙이 결코 동시에 양립할 수 없음을 폭로한다.

1. 양자역학의 유니타리티: 정보는 결코 소멸하지 않는다 (호킹 복사로 정보가 나온다).

2. 국소적 양자장론: 지평선 바깥의 물리는 우리가 아는 표준적인 물리 법칙을 따른다.

3. 아인슈타인의 등가원리: 사건의 지평선은 특별한 벽이 아니며, 자유낙하하는 관찰자는 아무런 장벽 없이 부드럽게 통과한다.

결국 정보 보존을 지켜 내려던 서스킨드의 상보성을 관철하려면 3번(등가원리)이 깨져 지평선에 치명적인 화염벽이 생겨나고, 거꾸로 3번을 지키려 들면 1번(유니타리성)이 깨져 호킹의 비극적인 정보 소멸 주장이 되살아나는 삼자택일 딜레마 상황이 생긴다.


7. 말다세나와 서스킨드의 ER=EPR (2013)

화염벽 역설을 반격하기 위해 말다세나와 서스킨드는 ER = EPR 가설을 제안한다.

EPR (양자 얽힘): 아인슈타인-포돌스키-로젠이 제시한 미시적인 양자 얽힘.

ER (웜홀): 아인슈타인-로젠이 유도한 거시적 시공간의 연결 다리(아인슈타인-로젠 다리, 즉 웜홀).

미시적으로 최대로 얽힌 두 대상(EPR) 사이에는 시공간의 웜홀 다리(ER)가 필연적으로 형성된다. 즉, 양자 얽힘과 웜홀은 같은 것이다. 호킹 복사가 진행되면서 지평선 밖으로 탈출한 막대한 양의 ‘과거 복사들’은 블랙홀 내부 상태와 얽히며 웜홀을 완성한다. 이 웜홀 다리 덕분에 과거 복사들은 지평선 안쪽의 파트너 입자와 사실상 ‘하나의 물리적 덩어리’로 직결된다. 결국 방출되는 복사 입자는 두 대상에 양다리를 걸친 것이 아니라, 웜홀로 묶인 단 하나의 단일 계와 1:1 얽힘을 맺는다. 얽힘의 ‘일부일처제 원칙’은 깨지지 않으며, 지평선에 무시무시한 화염벽이 생길 이유도 사라진다.


8. 아일랜드 공식: ER = EPR의 수학적 실체화 (2019년)

2019년에 등장한 ‘아일랜드 공식’은 ER=EPR의 직관을 엄밀한 수학으로 실체화하며, 호킹의 원래의 계산, ‘블랙홀 정보 역설’ 논문의 계산이 어디서 빗나갔는지 짚어낸다. 블랙홀 수명의 전반부에는 내부에 ‘섬(Island)’이라 불리는 영역이 나타나지 않아 엔트로피가 지속해서 증가한다는 호킹의 계산이 잘 맞아떨어진다. 그러나 블랙홀이 절반쯤 증발한 시점(돈 페이지의 연구를 딴 ‘페이지 타임’)을 지나면 지평선 내부에 ‘섬’이 출현한다. 이 섬은 기하학적으로는 분명 블랙홀 내부이지만, 정보론적으로는 외부 복사계에 속하는 ‘내부 안의 외부’ 영역이다. 늙은 블랙홀로 뛰어든 우주인의 정보는 특이점에서 영원히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이 아일랜드 영역(얽힘 쐐기)에 흡수되어 복제 웜홀을 통해 밖으로 흩어진 과거 복사들을 이용해 원격으로 완벽히 재구성된다.


수학적 판타지, 블랙홀 정보 이론

이 모든 연대기와 물리학적 개념들이 전혀 이해되지 않더라도 괜찮다. (솔직히 나도 어떻게든 내용을 써 보았지만 여전히 많은 부분들이 이해가 안 된다. 『블랙홀 전쟁』은 『물리의 정석』과 달리 수식을 통한 본질에서 꽤 많이 떨어져 있도록 쓰여졌기 때문이다.) 호킹의 기습적인 선전포고로 물리학의 근본이 무너질 위기에 처하고, 서스킨드가 블랙홀 상보성이라는 기괴한 현상을 실제라고 억지를 부리며 반격하는 장면, 우주가 사실 홀로그래피일지도 모른다는 엄청나고 대담한 가설들이 제시되고, 호킹이 결국 패배를 인정하는 결정적인 순간, ‘화염벽 역설’이라는 2차전의 시작, 서스킨드의 양자 얽힘이 사실은 웜홀일 지도 모른다는 또 다른 대담한 가설을 제기하고, 아일랜드 공식으로 최종적으로 전쟁의 승패가 결정되는 순간들, 그러한 픽션같은 반전과 재반전, 승패의 순간만 따라가도 충분히 재미있다. 


여기서 출현한 여러 가설들이 현대 물리학의 지평을 꽤 넓히게 되었으니, 홀로그래피 원리(또는 AdS/CFT)나 ER=EPR 같은 서스킨드가 주도한 가설들은 어쩌면 단순한 블랙홀 방어 논리를 넘어, 100년 넘게 미완으로 남아 있던 ‘양자 중력’과 ‘모든 것의 이론(TOE)’을 향한 결정적 도약대 역할을 하게 될 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 아인슈타인의 일반 상대성 이론에서 예측했던 ER(아인슈타인-로젠) 다리, 일명 ‘웜홀’은 아인슈타인이 양자역학을 그토록 거부하며 내놓은 EPR(아인슈타인-포돌스키-로젠) 역설과 실제로 같은 현상임을 제기하며 상대성 이론과 양자역학의 연결고리를 짓는다.


그러나 냉정하게 보면 이 이론들에 큰 한계가 존재한다. 홀로그래피 원리의 가정은 AdS/CFT라는 결정적인  수학적 성과를 통해 뒷받침되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실제 우주는 ‘반(-)’ 드 지터가 아닌 ‘정(+)’ 드 지터 공간이다. (정) 드 지터 공간 역시 홀로그래피 원리를 충족시키는지는 누구도 성공적으로 증명한 적이 없다. 


결국 몇십 년 간의 ‘블랙홀 전쟁’을 통해 도출된 물리학적 이론들은 실험적 관측이나 반증 가능성에 대해 전혀 신경쓰지 않고 재미있는 수학적 장난감 우주를 이리저리 만져 보며 휘갈겨 써 댄 거대한 유희적 판타지에 불과해 보인다. 실제로 몇몇 물리학자들은 이에 대해 내 생각과 똑같이 비판하고 있다. 『수학의 함정』이라는 책을 쓴 자비네 호젠펠더(Sabine Hossenfelder)는 이렇게 말했다.


이러한 해법들은 모두 수학적으로 일관성이 있다. 다만 우리는 그중 어느 것이 정답인지 모를 뿐이다. 왜 그럴까? 바로 블랙홀 증발 현상을 관측할 수 없기 때문이다. (...) 데이터가 없는 상황에서 문제는 ‘어떤 해법이 옳은가’가 아니라 ‘어떤 해법을 가장 선호하는가’가 되어버린다. 물론 누구나 자신이 제시한 해법을 가장 좋아하기 마련이므로, 물리학자들 사이에서 단일한 해법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지는 일은 지금도, 그리고 100년 뒤에도 없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블랙홀 정보 손실 문제가 ‘해결 국면에 접어들었다’는 식의 헤드라인이 터무니없게 느껴지는 이유다.


진짜 문제는 너무 많은 이론 물리학자들이 물리학이 수학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리학은 과학이다. 자연에 대한 이론은 일관성이 있어야 하지만, 일관성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 데이터가 필요한데, 데이터가 없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바로 이 때문에 블랙홀 정보 손실 문제는 사실상 해결 불가능한 것이다.


서스킨드는 초끈 이론의 초기 주창자 답게, 『블랙홀 전쟁』에서 상당 부분을 초끈 이론과 블랙홀 정보 이론과의 연결고리를 짓는 데 할애한다. 사실 나로서는 가장 이해 안되고(왜냐하면 초끈 이론 자체를 수식으로 이해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쓸모 없다고(왜냐하면 초끈 이론은 여전히 물리학에서 하나의 거대한 가설이기 때문에) 생각한 부분이었다. 초끈이론에 대해 “틀린 것조차 아니다”라며 신랄한 평가를 내렸던 물리학자 피터 보이트는 블랙홀 정보 이론에 대해 이런 이야기를 한다.


조지 머서의 기사(링크 참조)는 여러 가지를 명확하게 해 주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눈에 띄는 점은 다음과 같은 소식이다. “연구진은 초끈 이론과의 연결고리를 완전히 끊어버렸다.” 내가 이해한 바로는, (블랙홀 정보 이론에 대해) AdS/CFT에 기반한 모든 토대가 사라지고 현재 논의되고 있는 내용은 순전히 준고전적인 접근 방식이라는 뜻인 것 같다. 이 새로운 준고전적 계산이 정확히 무엇인지, 그리고 정보 역설이 해결될 것이라는 낙관적인 주장이 타당한지 잘 모르겠다.


솔직히 말해 『블랙홀 전쟁』은 재미있었다. 서스킨드의 필력도 물리학자의 글치곤 괜찮았고, ‘전쟁’이라는 표현이 아깝지 않을 정도로 물리학자들의 지적 격돌은 흥미진진했다. 그리고 SF 작가로서 내 시선에서도 블랙홀에 관련한 이러한 소재들은 매력적인 SF 아이디어의 원천이 된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피터 보이트나 자비네 호젠필더 같이, 이론 물리학의 최신 조류를 날카롭게 비판하는 학자들의 의견에 귀기울일 필요는 있다. 그것은 바로 물리학은 수학이 아니라 과학이라는 사실이다. '블랙홀은 양자역학의 근본 원리를 뒤엎는다'는 주장이나 ‘우주는 사실 홀로그램이다’라는 주장이 아무리 경이로운 발상의 전환이라 한들, 그 기발함만으로 스티븐 호킹이나 레너드 서스킨드는 ‘천재’가 될 수 없다. 


이 지점에서 나는 아인슈타인을 다시금 떠올린다. 그가 서스킨드와 달리 위대한 세기의 천재로 기억되고 인정받는 이유는, 그가 주장한 거의 모든 가설들이, 당시에는 서스킨드의 상상만큼이나 기괴하고 비현실적으로 보였던 그의 가설들이 끝내 전부 관측되어 실재하는 법칙임이 증명되었기 때문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