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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과 영혼 ㅣ 워프 시리즈 11
그렉 이건 지음, 김상훈 옮김 / 허블 / 2026년 3월
평점 :
이전 『내가 행복한 이유』와 『대여금고』 리뷰에서 그렉 이건의 중단편 전반에 대해 내가 느꼈던 주관적인 감상은 충분히 다루었다. 따라서 이번 『잠과 영혼』 리뷰에서는 총론을 반복하는 대신, 특별히 인상깊었던 작품 몇 가지에 집중해 보려고 한다. 내가 특별히 띄우고 싶은 작품은 「암흑 정수」이다. 이 작품이야말로 『잠과 영혼』에 수록된 작품들 중 단연 압도적인 베스트라 할 만하다.
암흑 정수(Dark Integers, 2007)
「암흑 정수」는 그렉 이건의 단편집 『내가 행복한 이유』에 실려 있는 「루미너스」 세계관을 잇는 정식 속편으로, 이번 『잠과 영혼』에 수록되었다.
그렉 이건이 「루미너스」를 구상할 때, 더글러스 호프스태터의 명저 『괴델, 에셔, 바흐』에 실린 한 장의 그림을 모티프로 삼지 않았을까 상상해 본다. 이 그림은 수학적 공리(Axioms)와 그로부터 파생되는 ‘참인 수학 명제(Theorems)’가 나뭇가지를 뻗어나가는 형태의 공간을 묘사한다. 반대 편으로는 '부정 명제(Negated Axioms)와 그 파생 부정 명제(Negations of theorems)도 그려져 있다. 이 그림에서 가장 흥미로운 지점은, 각각의 영역에서 ‘도달하지 못하는 진실’과 ‘도달하지 못하는 거짓’ 영역이 표시되어 있다는 점이다.

수학에서 ‘증명되지 않았지만 참’인 명제가 있다고 알려져 있다. 대표적으로 쿠르트 괴델의 ‘불완전성의 정리’에서 등장하는 괴델의 G 명제가 대표적이다.
G 명제: “이 명제는 증명할 수 없다.”
굳이 이렇게 특수하게 설계된, 모순을 내포한 명제가 아니더라도 애초에 인간이 증명 근처로 접근조차 해 보지 못한 미지의 명제는 셀 수 없이 무수히 많을 것이다. 그러한 명제들은 분명 인간이 저 ‘공리의 나무’를 타고 뻗어 나가다 보면 언젠가 참인지 거짓인지를 확증할 수 있겠지만, 인간이 밝혀 내기 전일지라도 참인 명제는 어쨌든 참이다. 그렇지 않은가?
아닐 수도 있을까? → 바로 이 질문에서 「루미너스」가 시작된다. 구체적인 설정은 이렇다. 명제는 참과 거짓이 확정되지 않은 상태로 존재하다고, 우주의 어떤 상태 또는 의지를 가진 수학자가 그것을 증명하는 순간에야 비로소 참 또는 거짓으로 고정된다. 즉, 누가 어떻게 연산하여 증명하느냐에 따라 같은 명제라도 참이 될 수도, 거짓이 될 수도 있다는 뜻이다. 이렇게 확정된 명제는 연쇄적으로 다른 명제의 진리값에도 영향을 미치며, 위 그림의 ‘공리의 나무’처럼 자라난다.
만약 우리가 증명해 낸 수학적 토대(공리의 나무)가, '거짓'을 토대로 자라난 이질적인 반공리의 나무와 맞닥뜨린다면 어떻게 될까? 두 세계 사이에는 매끄럽게 섞일 수 없는 치열한 밀어내기 싸움이 벌어질 것이다. 작품에서는 이 충돌의 경계선을 ‘결점’이라고 부른다.
자, 하지만 우리는 지금 소설을 읽는 거지 형식주의 메타수학 논문을 쓰고자 하는 게 아니다. 이런 골치 아픈 학문적 아이디어를 대체 어떻게 소설로 써먹을 수 있을까? 내가 「루미너스」에서 감탄했던 지점이 바로 여기다. 그렉 이건은 ‘인더스트리얼 알제브라’라는 기업이 명제 증명을 통해 세계의 수학을 변화시키고, 이를 암호 체계나 금융 시장에 적용해 부당 이득을 편취하려는 음모로 이 설정을 풀어낸다. 주인공 일행은 이 기막힌 ‘명제 땅따먹기’의 세계를 최초로 발견한 당사자로서, 음모에 맞서 더 빠르게 명제 땅따먹기 게임의 영토를 점령하기 위해 ‘루미너스’라는 슈퍼컴퓨터를 가동한다. (여기까지가 전작 「루미너스」의 개요다.)
「암흑 정수」는 전작 「루미너스」의 결말부에 등장했던 ‘외계 지성’과의 대결을 본격적으로 그린다. 이 외계 지성은 우리와는 전혀 다른 ‘반공리’를 토대로 수학적 영토를 단단히 구축한 세계다. 이들이 명제 증명을 통해 영토를 넓히는 행위는 우리 세계에 치명적인 위협이 된다. 우리의 과학 기술을 떠받치는 토대가 바로 다름 아닌 수학이기 때문이다. 만약 그들의 영토가 ‘1+1=3’이라는 공리를 참으로 인정하는 나무를 바탕으로 자라났다면, 그들의 수학 명제가 우리 영토를 덮어씌우는 순간 우리가 알던 ‘1+1=2’는 거짓으로 판명되며 현실의 물리 법칙은 붕괴하는 재앙을 맞게 될 것이다.
이 명제들의 싸움은 스치기만 해도 치명상이기 때문에, 외계 지성의 대표자(‘샘’이라 불리는 정체불명의 지성)와 이쪽 세계의 주인공 일행은 서로의 경계선을 ‘증명으로 침범하지 않겠다’는 아슬아슬한 협약을 맺고 비밀리에 두 세계의 평화를 수호한다. 그러던 와중에 지구의 이름 모를 수학자 한 명이 새로운 논문을 발표하면서 주인공 일행은 엄청난 충격에 빠진다. 이 논문에 따르면, 서로의 경계를 맞대고 확장하는 기존의 증명 방식 대신, 아예 다른 세계의 영토 한가운데로 명제를 ‘내려꽂는’ 방식의 증명이 가능하게 되었다. 이 기괴한 수학이 성립함이 밝혀지자, 지구 측은 저쪽 세계가 미처 방어할 수 없는 끔찍한 비대칭 침략 무기를 손에 쥔 위치에 오르게 된다.
「루미너스」에서도 느꼈던 거지만, 「암흑 정수」를 읽으며 내가 또다시 경악한 지점은 이토록 허무맹랑해 보이는 메타수학적 개념을 대체 어떻게 소설의 서스펜스와 갈등으로 완벽하게 치환해 냈는가 하는 점이다. 그렉 이건은 그 어려운 일을 두 번씩이나 해냈고, 이 작품을 상상력과 서사적 치밀함을 모두 갖춘 마스터피스로 빚어내고야 말았다.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상상은 자유라지만, 때로는 어떤 상상은 극도로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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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밖에 『잠과 영혼』에서 읽어볼 만한 작품들에 대한 짧은 리뷰들.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This is Not the Way Home, 2019)
허블에서 출시한 『SFnal 2021』이라는 모음집에 켄 리우, 테드 창 등의 쟁쟁한 작가들의 작품과 함께 수록되어 있던 작품. 우주 엘리베이터를 다루는 아서 클라크의 『낙원의 샘』처럼, 우주선 없이 우주로 진출하는 기술인 ‘스카이훅’을 다루는 소설이다. 『마션』처럼 홀로 남은 인물이 스카이훅을 이용해 탈출한다는 내용을 담은 탈출기인데, 그렉 이건 답지 않게 극한의 고립에 처한 주인공이 배 속의 아기를 의식하며 홀로 살아남으려 분투하는 내용은 꽤 짙은 감수성을 느끼게 한다. 흔히 알려진 우주 엘리베이터가 아닌 스카이훅을 소재로 삼았다는 점이야말로 이 작품의 독특한 면이라고 할 수 있어서, 그런 점에서 개인적으로 높은 평가를 주고 싶은 작품.
크리스탈 나이트 (Crystal Night, 2009)
괴짜 IT 억만장자가 인공지능을 창조하기 위해 진화 자체를 시뮬레이션하는 이야기. 사실 ‘시뮬레이션 속에 사는 문명’이라는 소재는 이 시대엔 좀 진부하다고 생각이 들고, 나에게 있어서 이런 소재의 최고작은 스타니스와프 렘의 「논 세르비암」(1971)이다. 이건의 소설은 피조물들이 과학 지식을 발전시켜 컴퓨터 밖으로 웜홀을 뚫고 도망친다는 식의 다소 전형적인 결말이다. 「논 세르비암」에서 렘이 보여준 깊은 인식론적 고민을 먼저 봐 버린 상황에서 이 정도의 전형적인 결말은 좀 아쉽다.
너 혼자서? (You and Whose Army? ,2020)
서로의 기억을 매일 동기화하는 네 쌍둥이의 이야기. ‘기억’을 공유하거나 조작하는 SF는 많지만, 그 소재를 하드하게 다루려면 어떤 식으로까지 설정을 매만져야 하는지에 대해 고심한 흔적이 엿보이는 훌륭한 작품.
꿈 공장 (Dream Factory, 2022)
고양이의 뇌 안에 침습적 전극을 삽입해 고양이를 가지고 노는 세태에 짜증을 느낀 주인공이, 고양이가 꾸는 꿈을 볼 수 있도록 하는 앱을 출시해 고양이의 주인들이 더 이상 고양이를 괴롭히지 못하도록 유도한다. 하지만 주인공의 선한 의도와는 반대로 자신의 고양이가 꾸는 꿈을 보기 위해 멀쩡한 고양이에게 전극을 심는 수술을 단행하는 고양이 주인들이 늘어 난다. 꿈도 희망도 없는 슬픈 결말.
잠과 영혼 (Sleep and the Soul, 2021)
주인공은 의식을 잃은 후 죽은 줄 안 가족에 의해 무덤에 매장당한다. (이 세계관의 설정 자체가, 잠을 포함해 의식을 잃는 즉시 죽음으로 판정한다) 무덤에서 깨어나 탈출한 주인공은 의식을 잃어도 죽은 게 아니라는 사실을 설파한다. 무덤이라는 소재와 고딕SF적인 분위기를 보아하니 분명 『프랑켄슈타인』 같은 소설을 쓰고 싶었던 것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