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는 진화한다 - 자유의지의 진화를 통해 본 인간 의식의 비밀
대니얼 C. 데닛 지음, 이한음 옮김 / 동녘사이언스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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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의지가 “없다”고 주장하는 건 간단하다. 그 증거를 과학적으로 제시하는 일도 손쉽다. 조금만 머리를 굴려 본다면, 누구나 이 논리를 따라갈 수 있다. 우리에게는 물리학적 개념에 무지한 자유주의론자 데카르트가 있다. 이 사람의 말을 듣고 그의 주장을 물리학적으로 철저히 반박해 보자.


데카르트: 우리가 흔히 믿는 자유의지란 "외부나 과거의 결정 없이, 내 육체의 행동을 온전히 내가 주도하고 결정하는 능력"이다. 내가 원할 때 손목을 움직이거나 멈출 수 있는 바로 그 느낌이다.


하지만 신경 신호, 근육 수축이 손목 움직임의 원인이기도 하지 않은가?


데카르트: 그렇다. 그렇지만 근육 수축, 신경 신호 등등으로 원인을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손목을 움직인 '최초의 원인'에 도달할 것이다. 그 최초의 원인이 바로 비물리적인 마음--의도, 욕구, 결단 등--이다. 비물리적인 마음이 자유의지를 발휘해 물리적인 몸을 움직인 것이다.


우리의 손목과 몸은 완벽한 물리적 체계이다. '물리주의(또는 물리적 인과의 폐쇄성 원리)'에 따르면, 물리적 사건은 물리적 사건에 의해서만 발생한다. 비물리적인 마음이 물리적인 뇌나 근육에 영향을 미쳐 손목을 움직이게 했다면, 마음 또한 물리적 세계에 에너지를 개입시킨 물리적 원인이 되어야 한다. 반대로 마음이 정말로 물리적 법칙과 완전히 무관한 '비물리적 존재'라면, 그것은 물리적 세계의 일부인 몸에 아무런 영향도 줄 수 없다.


데카르트: 마음은 물리적 법칙의 결과가 되어서는 안 된다. 어떤 경우엔 나의 몸이 물리적 영향을 받아 자유의지 없이 움직이는 경우도 있겠지만, 진정한 자유의지란 마음 스스로가 '아무런 선행 원인 없이 스스로 발동하는 최초의 원인'이다.


아무런 선행 원인도 없이 갑자기 튀어나오는 사건을 우리는 '자유'라고 부르지 않고 '무작위(Randomness)' 또는 '우연'이라고 부른다. 만약 마음의 결단이 이전의 물리적 뇌 상태, 기억, 성격, 가치관과 아무런 인과적 연결이 없다면, 그것은 내가 주체적으로 선택한 것이 아니라 '원인 없는 난수(소음)가 발생한 것'에 불과하다. 내가 통제할 수 없는 무작위적 사건을 어떻게 '나의 자유의지'라고 부를 수 있겠는가?


우리는 물리주의적 결정론에 따라, 물리적 사건 이외의 원인은 존재해서는 안 되며, 그렇게 따지면 자유의지란 불가능한 개념임을 성공적으로 증명했다. 그런데 데카르트는 새로운 전략을 들고 나온다. 그는 양자역학의 창조자 에르빈 슈뢰딩거의 영향을 받아 슈뢰-카르트로 진화한다.


슈뢰카르트: 좋다. 고전 물리학의 완벽한 결정론 안에서는 내 행동의 원인이 태초의 빅뱅까지 추적되니 자유의지가 설 자리가 없다는 걸 인정한다. 하지만 현대 양자역학은 미시 세계가 본질적으로 '비결정론적(또는 확률적)'임을 증명했다. 물리주의가 꼭 결정론적으로만 이루어진 건 아니라는 걸 인정할 것이다. 뇌 신경 전달 과정 어딘가에 양자적 비결정론이 있고, 그 불확정성 덕분에 내 선택은 과거의 물리적 상태로 100% 결정되지 않는다. 이 양자적 중첩과 비결정론적 틈새야말로 마음이 결정론적 물리주의를 뚫고 자유로운 결단을 내릴 수 있는 완벽한 물리적 공간이 된다.


우리는 여기에서 양자역학이 자유의지의 구원자가 될 수 없음을 증명할 것이다.


안타깝게도 비결정론은 결정론보다 자유의지에 훨씬 더 치명적이다. 당신의 주장대로 뇌 속 미시 입자들의 양자 도약이 자유로운 결단의 순간을 만들어낸다고 해 보자. 그 양자적 사건이 일어난 원인은 무엇인가?


슈뢰카르트: 원인은 없다. 양자역학의 핵심이 바로 선행 원인 없이 일어나는 근본적 비결정론이기 떄문이다. 이 엄밀한 무작위적 틈새 덕분에 과거의 물리적 원인에 얽매이지 않는 진짜 '새로운 선택'이 가능해진다.


선행 원인이 없다는 것 역시 단지 무작위성일 뿐, 이 또한 자유의지가 아니다. 당신이 '살인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 치열하게 고민하다가 정직하게 살기로 결심했다. 그런데 이 결정을 내린 최종 열쇠가 뇌 속 미시 입자가 확률적으로 툭 튀어 오른 양자적 무작위성 때문이었다면, 그것이 어째서 '당신'의 자유로운 의지인가? 그것은 뇌 속에서 갑자기 터진 ‘주사위 던지기'나 '시끄러운 소음'에 당신의 행동이 휘둘린 것에 불과하다.


슈뢰-카르트는 양자역학의 비결정론적 물리 법칙 하에서 자유의지를 살릴 방법으로 양자역학을 도입한 철학자 로버트 케인의 이론을 결합한다. 이제 그는 슈뢰-케인-카르트로 진화한다.


슈뢰-케인-카르트: 우리는 살면서 중요한 도덕적·실천적 딜레마에 부딪히기도 한다. 예를 들어 '힘들어도 정직하게 살 것인가, 편법을 쓸 것인가' 고민하는 순간에 닥친다. 이때 우리의 뇌 안에서는 두 가지 선택지(가치관)가 충돌하며 역학적으로 불안정한 상태(혼돈)가 발생한다. 이 갈등의 과정 자체가 우리에게는 바로 어느 한쪽을 선택하려는 '의지적 노력'이다. 이 팽팽한 균형 깨짐의 순간에 비결정론적, 확률적 요소가 개입하여 한쪽으로 결정되는데, 이것이 바로 우리의 결단이다. 이 사건은 뇌 안의 무작위성으로 결정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양쪽 선택지 모두 '내가 하려고 치열하게 노력했던 결과'이기 때문에, 어느 쪽이 선택되든 그 결과는 온전히 나의 책임(Ultimate Responsibility)이 된다.


로버트 케인은 이 이론을 자기 형성 행동(SFA: Self-forming actions)이라고 이름붙였다. SFA들은 하나둘 쌓이면서 나의 성격, 가치관, 성향을 형성시키며, 비록 일상적인 선택들은 굳어진 내 성격에 따라 반쯤 결정되어 흐르더라도 그 성격의 뿌리가 되는 SFA의 순간들에 내가 최종 책임을 진다. 그렇기에 인간에게는 인간에게는 자유의지가 있다는 것이 바로 철학자 로버트 케인의 주장이다.


이제 우리에겐 대니얼 데닛이라는 저명한 철학자가 나타난다. 그는 물리주의에 입각해 의식과 진화를 성공적으로 설명해 낸 철학자이다. 그는 자유의지가 없다고 주장하는 우리에게 든든한 지원자로서 철학적이고 논리적인 힘을 보태 줄 것이다.


대니얼 데닛: 선택의 결정적인 순간에 무작위적(Random) 요소가 개입하고, 그것이 실제로 자유의지라고? 아까도 밝혔지만 결정론적이든 비결정론적이든 무작위적 요소는 자유의지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성능이 나쁜 컴퓨터의 '시스템 소음'이나 '에러'와 다를 바 없다. 의지의 결과가 소음에 의해 좌우된다는 말인데, 그 말의 뜻은 '내가 자유롭게 선택한 것'이 아니라 '순전한 운'에 의해 결정된 것과 다름없다.

그렇다. 이로서 자유의지는 없다는 것이 밝혀졌다. 고전역학적 결정론으로도, 양자적 비결정론으로도 자유의지는 허상인 것이다. 


그런데 자유의지가 허구라는 것이 내 견해란 말인가? 내 의식 이론이 함축한 의미가 바로 그것이란 말인가? 천만의 말씀이다. (p310)

데닛은 계속 입을 나불댄다. 뭔가 이상하다.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을 자세히 들어 보니, 그는 이미 자유의지는 없다는 우리의 명백한 결론과는 정반대의 주장을 펼치고 있다. 우리는 소리친다. ”저 까마귀의 입을 막아!“ 하지만 이미 늦었다.


대니얼 데닛: 오히려 완벽하게 결정론적으로 작동하는 우주라도 자유의지는 있을 수 있다. 양자컴퓨터가 아닌, 고전적으로 작동하는 알파고 바둑 AI를 보자. 이 AI는 완벽하게 결정된 알고리즘과 학습된 지식을 따른다. 하지만 상대방의 수에 따라 수백만 가지 대안을 검토하고, 최선의 선택을 내리며, 스스로 학습하여 다음 게임에 결과를 반영한다. 인간의 자유와 도덕적 책임도 이와 같다. 우리 뇌가 물리 법칙(결정론)을 따르더라도, 복잡한 진화의 결과로 '외부 자극을 피하고, 미래를 예측하며, 스스로를 통제하는 능력(Evitability)'을 갖추었다면 그것이 바로 자유의지이다.


아니, 대니얼 데닛이 주장하는 물리주의적 의식 이론에 따라, 당연히 자연스레 ‘자유의지란 허구에 불과하다’는 결론이 도출되는 것 아니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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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닛은 『자유는 진화한다』라는 책에서 오히려 자유의지는 존재한다는 주장을 한다. 이것이 바로 물리주의와 자유주의가 함께 가능하다는 양립가능론 (Compatibilism) 이다.


당신이 자신의 뇌에서 행복하게 돌아다니면서 운동겉질에 의사 결정의 화살을 쏘는 비물질적인 영혼으로부터 튀어나오는 자유의지만이 진정한 자유의지라고 생각한다면 (당신이 의미하는 자유의지에 비추어볼 때) 내 견해는 자유의지는 전혀 없는 것이 된다. 한편 당신이 자유의지가 초자연적이 되지 않고서도 도덕적으로 중요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내 견해는 자유의지가 정말로 있다는 것이 된다. (아마 당신이 생각하는 것과 똑같지는 않을 테지만) (p311)


특히 나는 대니얼 데닛의 양립가능론에 영향을 받아, 나의 소설 『엔트로피아』에서도 등장인물의 입을 빌어 결정론적 세계관 내에서도 자유의지가 양립가능함 주장했다. 그리고 그 주장은 실질적으로 내 소설의 핵심 메시지이기도 하다.


모든 미래가 결정론적으로 정해져 있고 변화하는 건 없다고? 그건 비겁한 결과론적 해석일 뿐이다. 비록 역사가 바뀌지 않더라도 난 순간순간 미래를 직접 직조해 나가고 있다. (『엔트로피아』 작중 인물인 완서준의 말)


허구의 갈림길이라도 내가 그것을 선택했다고 믿으면, 자유로운 의지를 가진 한 명의 인간이라는 감정으로 충만해지오. (『엔트로피아』 작중 인물인 장군의 말)


여전히 사람들은 데닛의 이 주장에 대해, ’하나의 편리한 대용품으로써, 우리 사회에 없으면 안 되는 법적이거나 도덕적인 문제, 예를 들어 살인자의 형량을 결정하는 일 때문에 하나의 허구로써 자유의지를 남겨 놓으려 한다‘는 식의 해석을 한다. 하지만 데닛의 주장은 전혀 그런 게 아니다. 데닛은 사랑, 돈 같은 것이 실재하는 것처럼, 자유의지도 실재한다고 주장한다. 어떤 사람이 큐피드 신화--어떤 천사 같은 신이 날아다니며 화살을 쏘아 사람들을 어떤 감정에 빠지게 하는 것--를 통해 사랑을 정의하려 한다. 우리는 그 사람에 대해 반박을 한다. “사랑에 빠진다는 감정은 큐피드 신화도, 그 작은 화살도 필요 없다. 단지 뇌 속 신경전달물질과 시냅스 같은 걸로 전부 설명할 수 있다. 그것이 바로 사랑의 정의이다.” 우리는 물리주의적으로도 성공적으로 사랑에 대한 정의를 내렸다. 우리는 물리주의에 입각해 사랑의 개념을 해체하거나 없애려 하지 않았다. 

‘돈’ 또한 마찬가지이다. 그것이 아무리 물리주의적으로 단순한 원자와 분자로 이루어진 종이나 금속이라도, 우리가 그 물질을 주고받으며 그것에 가치를 가진다고 느낀다면 그것의 가치와 힘, 권력은 실존한다. 

자유의지도 이와 같다. 진짜 문제는 자유의지가 없는데 있는 척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자유의지'라는 단어에 부여한 신비주의적, 초자연적 정의(영혼, 원인 없는 최초의 원인 등)가 틀렸을 뿐이라는 점이다. 그 잘못된 통념의 정의를 버리고 "자율적 통제 능력"이라는 과학적으로 타당한 정의로 교체하면, 우리는 거짓말을 할 필요 없이 "자유의지는 진짜로 존재한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사회적, 도덕적 정의를 내버려두지 않고 단지 결정론이냐 물리주의냐 하는 형이상학적 문제만 고집한다면, 오히려 다른 문제들이 발생할 수 있다. 우리가 정말로 형이상학적으로 무한한 자유를 가진다면, 아무런 제한 없이 모든 가능성이 우리의 눈 앞에 열려 있다면, 우리는 오히려 자유로울 수 없다. 우리는 심리학적인 충동의 노예가 될 수밖에 없다. 공부를 하려고 책상에 앉았는데 휴대폰 알림, 창밖의 소리, 냉장고 속 과자 등 모든 '기회자극'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삶이다. 데닛은 세이렌의 유혹에 맞서 싸우기 위해서 스스로를 묶어 버린 오디세우스의 예시를 든다. 주변의 모든 기회에 촉각을 세우고 있는 사람은, 장기적인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고 눈앞의 자극에 이리저리 휘둘리는 '자유롭지 못한 상태'에 빠지게 된다.

우리는 사실상 우리에게 오는 기회 중 상당수에 둔감해지는 방법을 배울 때에만 도덕적으로 적절한 의미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
데닛은 인간이 진화 과정에서 개발한 가장 위대한 자기 통제 기술 중 하나가 바로 "자신이 쓸 수 있는 선택지를 스스로 닫아버리는 능력"이라고 말한다. 마찬가지로 원칙과 도덕 같은 자유의지와 밀접히 엮여 있는 개념들은, 우리가 "아무리 돈이 급해도 남의 것을 훔치지 않는다"거나 "아무리 피곤해도 아이를 버리지 않는다"는 도덕적 원칙을 세울 때에만 발휘된다. 우리는 훔치거나 아이를 버릴 수도 있는 수많은 현실적 '기회'에 대해 아예 뇌의 고려 대상에서 제외(둔감화)시켜 버려 자유의지를 쟁취한다. 진정한 자유롭고 도덕적인 주체는 도덕에 위배되는 기회가 찾아와도 아예 '선택지 카드'로 취급조차 하지 않는 법을 배운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학적 연구 결과는 점점 ‘자유의지는 없다’는 식의 논증을 실제로 우리의 삶에 끌어들인다. 특히 법정에서 그렇다. 판결에서 ‘이 살인자는 그 당시 자유의지가 없었기 때문에 무죄’라는 식의 변호가 늘어가고 있다. 자유의지가 아닌 물리주의적 원인이 법적인 변호의 중심이 되어 가고 있다. 이 사람은 사이코패스의 유전자를 받았습니다. 이 사람의 어릴 적 환경은 불우했습니다. 이 사람은 충동적이고 참을성이 없는 ADHD를 앓고 있습니다... 과학은 판결에서 인간의 죄 자체를 결정론적 필연성으로 몰아갈 것인가? 

실제로 자유의지가 없어서, 부족해서, 당시에 의식이 없어서 살인자로 판결받기엔 억울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건 모든 물리주의적 원인을 고려하여 모든 살인 사건이 ’자유의지가 없었고 필연적으로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결정론적 사건이었기 때문에 무죄‘라는 판결로 퉁칠 필요가 없다. 여기서의 문제는 아주 간단하다. 우리는 완전히 자유의지가 없어서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을 만한 사건--예를 들어 몽유병 환자의 살인사건--과, 완전히 깨어 있는 사람이 자신의 의지로 저질러 버린 살인 사건을 구분할 수 있다. 우리는 그 중간에 선을 긋거나, 형량의 스펙트럼을 결정하면 된다. 사법 시스템이 할 일은 우주론적 자유의지의 유무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사건 당시 자기 행동을 제어하고 법적 이유를 고려할 수 있는 자율적 능력을 얼마나 갖추고 있었는지 측정하여 그에 맞는 형량과 교정책(스펙트럼)을 적용하는 것이다. 그리고 과학은 ’형이상학적으로 자유의지는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선언하며 우리의 법과 도덕 체계를 초치는 게 아니라, 판결 내에서 어느 수준의 형량이 적절한지(즉, 자유의지의 적용 범위는 어디까지인지) 선을 그어 주는 일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진정한 자유의지란, 1. 나의 장기적 목표를 위해 단기 유혹을 이겨내고, 2. 타인과 신뢰를 바탕으로 약속을 맺으며, 3. 내 행동의 결과에 대해 납득할 만한 책임을 지는 삶이다. 이제 우리는 물리학의 절대 원칙인 결정론이나 양자역학의 원칙에 신경을 쓰지 않고도, 우리의 삶에 전적으로 책임지는 의미라는 진정한 자유의지의 개념을 얻게 되었다. 우리의 삶이 무언가 달라졌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많은 이들이 살인을 저지르거나, 숏츠나 게임 중독의 유혹에 빠져 "어쩔 수 없는 호르몬"이나 "결정되어 있는 미래"를 탓한다. 그러나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도덕적이려고, 죄를 짓지 않기로 노력한다. 게임과 유튜브를 잠시 끄고 하고자 하는 일을 성취하기 위해 자신을 갈고 닦는다. 자유의지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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