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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여금고 ㅣ 워프 시리즈 6
그렉 이건 지음, 김상훈 옮김 / 허블 / 2024년 2월
평점 :
장편소설 『쿼런틴』은 그렉 이건의 가장 잘 알려진 작품이다. 하지만 단편집 『내가 행복한 이유』나 이 책 『대여금고』를 읽어 보면, 그렉 이건의 최상의 독서 경험은 단편소설들의 시리즈를 연속으로, 끊김 없이 읽는 순간 발휘된다는 걸 느낄 수도 있다. 『쿼런틴』에서 양자역학과 의식에 의한 작용 하나의 아이디어만으로 펼쳐지는 장대한 하드보일드 이야기를 즐기는 것도 대단히 좋지만, 30분 정도면 읽을 수 있는 작품들을 끊임없이 돌려 보면서, 갖가지 기상천외하고 기발한 아이디어들을 속도감 있게 즐길 때 내 머리가 꾹꾹 눌러담아 터져나갈 듯한 경험의 밀도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짜릿하다. 물론 이런 과밀한 사고 과정을 즐기는 유별난 독자에게만 추천하는 경험이지만.
그렉 이건의 『대여금고』는 『내가 행복한 이유』와 비슷한 시기에 완성된 작품들의 모음집이다. 주제의식과 스타일은 대동소이하다. 특히 인간성에 대해, 뉴런의 연결망이나 유전 정보로 생성되는 인간성의 본질에 대해 탐구한다. 이번 책에서 특히 인상적이었던 주제는, ‘타인 되어보기’를 다루는 작품들이다. 「유괴」, 「대여금고」, 「산책」, 「우리 사이의 간극」, 「피를 나눈 자매」가 이를 다룬다. 그리고 그 결말은 비극적이거나 허탈하다. 유전공학의 윤리성도 빠질 수 없는 주제다. 「유진」이나 「큐티」, 「고치」가 그랬고, 「대여금고」도 이 주제의식을 일부 공유한다. 물리학과 수학의 가상적인 설정을 극한으로 활용한 「어둠 속으로」는 『내가 행복한 이유』에 실렸던 「무한한 암살자」처럼 나만 좋아할 것 같은 느낌이 드는, 내 안의 홍대병 말기를 북돋아주는 작품이다. 의식의 신비를 다루는 몇몇 작품―「대여금고」, 「이행몽」, 「시각」, 「결정하는 자」, 그리고 「스티브 피버」―또한 내가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작품들이다.
결말을 미리 읽고 싶지 않은 분은 (스포일러 주의) 라고 쓰여 있는 부분을 넘기시기 바랍니다.
유괴 (A Kidnapping, 1995) (스포일러 주의)
한 남자가 아내를 인질로 몸값을 요구하는 전화를 받는다. 그는 그 동영상이 저질 합성 영상이라는 걸 알게 되고, 실제로 아내도 대수롭지 않게 넘긴다. 하지만 남자는 의문이 생긴다. 이 믿기지도 않는 저질 협박 메시지는 대체 자신으로 하여금 무엇을 이끌어내기 위한 것일까? 한편 그는 돌아가신 어머니의 스캔본을 가상 현실에서 만난다. 그는 그 어머니의 감정과 인격을 존중하여 어머니에게 외로움에 대해 여쭤본다. 그녀는 스캐닝 기술이 개발되기 전에 돌아가신 아버지의 기억을 통해, 아버지가 여전히 그녀의 마음 속에서 살아있다고 말한다.
그는 어머니의 대화를 바탕으로 협박 동영상의 충격적인 실체를 깨닫는다. 그 동영상은 실제의 아내를 납치했다고 속이고 몸값을 받아내려 하는 목적이 아니었다. 그 동영상의 아내의 모습은 남자의 스캔 데이터의 기억으로부터 추출한 기억 속의 아내를 시각화한 것이다. 그의 아내가 스캐닝에 반대하는 입장이라, 남자가 나중에 죽어서 그의 어머니처럼 가상현실에서 살아가게 된다면 그는 아내와 영원히 재회하지 못한다는 것을 안 납치범은 기억 속의 아내를 인질로 잡고 남자와 협상한다. 남자가 몸값을 지불하면 아내의 환영은 가상현실에서 충분히 아내의 역할을 할 것이다. 남자는 기꺼이 몸값을 지불한다.
이 소설의 대단한 점은 결말이다. 기억 또한 실체라면, 스캐닝 데이터의 환영을 인격이라고 인정할 수 있다면? 그는 아내가 스캐닝하길 바랬었으나, 아내는 완강히 거부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그녀를 설득하는 상상을 한다. 그녀를 인정하는 것처럼 그의 기억 속의 그녀의 그림자도 인정하고 싶다고. 그녀는 "그의 상상 속에서" 그의 말을 이해해준다. 이로서 그는 만족한다. 에셔의 「손을 그리는 손」처럼, 기억은 실체가 되어 기억 바깥의 실체에게 만족감을 준다. 평범할 수 있었던 소재는 이렇게 결말로서 위대한 단계로 도약한다.
유진 (Eugene, 1990) (스포일러 주의)
복권으로 갑부가 된 부부는 그들의 재산을 총동원하여 유전자 조작을 통해 뛰어난 자식을 낳기를 원한다. 그런데 그들을 상담한 의사는 뛰어난 자식을 넘어 인류의 발전에 이바지할 수 있는 천재를 만들어준다고 호언장담한다. 그들은 고민하지만 그들이 무엇을 고민하는지, 왜 고민하는지조차 알지 못한다. 그러던 중, TV에서 그들의 자식의 환영이 나타난다. 부부는 그들이 아이가 너무나 천재적이라 시간여행을 한 것이라 생각했지만, 아이는 이렇게 얘기한다.
“컴퓨터에 배아 유전자 프로필을 입력하고, 그 컴퓨터가 인간으로 성장한 해당 배아의 모습을 시뮬레이션하는 광경을 떠올려 보세요. 그런다면 굳이 시간 여행을 동원하지 않아도 외삽을 통해 실현 가능한 미래상들을 알아낼 수 있잖아요? (...) 현재가 아닌 잠재적인 미래에 존재하는 경우에도 그와 똑같은 일이 일어날 가능성이 존재한답니다.”
이런 식의 설명은 들어본 적도, 읽어본 적도 없다. 미래의 잠재적인(즉 실현되지 않은) 존재가 현실의 가능성에 영향을 끼친다. 전무후무한 SF적 설명이다. 억지처럼 들리기도 하지만, 억지를 이렇게까지 그럴 듯하게 쓰는 것도 능력이다.
‘실현되지 않은’ 존재라는 말은 결말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는데, 그 환영의 아이는 곧이어 부부의 모든 계좌에 들어있는 돈을 인출해 기부해 버리고, 그의 유전자 조작된 아이, 즉 ‘자신’을 아예 태어날 수 없는 가능성의 존재로 만들어 버린다.
대여금고 (The Safe-Deposit Box, 1990)
하루에 한 번씩, 한 도시 내의 다양한 사람 중 한 명이 되어 눈을 뜨는 사람이 있다. 요새 말로 표현하자면 '빙의'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웹소설 장르의 빙의물과 수준의 차이를 느끼는 설정은, 그는 거의 아기 때부터 그런 '하루에 한 명씩' 빙의되는 일을 반복했다는 점이다. 매번 부모와 집과 인간관계, 그리고 '나 자신'이 바뀌는 경험을 하는 이라면, 이름조차 없이 매번 다른 사람으로 지내는 일을 반복한다면, 다른 사람들 또한 그렇게 살아가는 게 당연하다고 여길 것이다. 그게 당연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는 일은 플롯상에 매우 세심한 설계를 필요로 한다. 어린아이였던 그가 그 사실을 깨달은 건, 며칠 전 '자기 자신이었던' 친구의 집이 실제로 존재하고, 거기에 찾아갈 수 있고, 또 자신의 엄마였던 그 여인을 실제로 보게된 순간이었다.
이건 깊이 있는 설정놀음이다. 이 재미난 설정놀음에 너무 깊이 빠진 나머지 작품 분량의 절반 이상을 써 버렸지만, 난 괜찮다. 나머지 절반 미만의 짧은 분량으로도 그렉 이건은 이 남자의 출생의 비밀을 충분히 깊이 있게 묘사할 수 있었다. 결말은 통계와 데이터에 대한 시각화된 분석을 바탕으로 주인공이 통찰을 얻는 장면으로 끝나는데, 회의주의적이고 과학적인 시각이라 멋지다.
큐티 (The Cutie, 1989)
끔찍한 유전공학과 남성 임신, '소비재적인' 아기에 대한 이야기. 다만 바라는 건 이 이야기를 소위 '인셀(Incel)'이라는 부류와 관련된 최신의 진흙탕 논쟁으로 엮어 작가와 작품을 매도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이 작품은 1980년대 말에 쓰인 이야기니까.
어둠 속으로 (Into Darkness, 1994)
도시에 종종 랜덤하게 생겨나는 웜홀 내부에서는 그 중심부 쪽으로만 "물리적으로" 이동 가능하다. (그러므로 ㄱ자형 벽의 모서리에 갖힌 사람은 탈출이 불가능하다.) 주인공은 웜홀에서 사람들을 탈출시키는 특수 훈련을 받은 전문가로서, 사람들을 웜홀의 중심으로 안내하는 역할을 하기 위해 잠입한다. 평범한 제목에, 믿을 수 없을 만큼 기발한 하드 SF 소재.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소재를 정말로, 끝도 없을 정도로 집요하게 말이 되게 만드는 디테일함. '한 방향으로만 물질과 정보를 이동시킬 수 있다'는 설정을 누군가가 생각해 냈다 해도, 그 설정이 파급하는 물리학적 현상과 이야기를 그렉 이건만큼 자세히 그려낼 수 없을 것이다.
피를 나눈 자매 (Blood Sisters, 1991)
쌍둥이는 서로의 생각을 공유한다는 얘기가 있다. 주인공과 그녀의 쌍둥이는 생각을 공유하다못해 너무 똑같이 생각하고 대화하는 뻔한 경험을 못견디고 결국 대화를 단절한다. 다른 작품에 비한다면 '순한 SF'지만, 여러 작품들과 일맥상통하는 '타인 되어보기'라는 주제의식 속에 있다. 그리고 그 결말이 비극적이라는 것도 공유한다.
이행몽 (Transition Dream, 1993)
만약 어떤 디지털적인 계산 과정이 그 자체로 고통을 유발한다면, 그것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그것은 복제될 때, 재생될 때, 실행될 때마다 그것의 소유자를 고통스럽게 한다. 악몽이 디지털이 된다면, 그리고 디지털 정보의 복사 과정 자체가 악몽이라면, 조사하고 연구하고 들여다보고 분석하는 모든 과정은 그 악몽을 단지 늘리기만 할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을 해결하는 방법은 아무 것도 없다.
우리 사이의 간극 (Closer, 1992)
『내가 행복한 이유』에 포함되어 있었던 「내가 되는 법 배우기」라는 작품과 '보석'이라는 소재를 공유한다. 하지만 여기서 그 보석은 단지 소재일 뿐이다. 서로의 마음을 뒤바꿔서 상대방의 입장을 엿볼 수 있다면, 그건 좋은 일일지 나쁜 일일까?
그것을 실행하는 방법은 기괴하며, (웹소 빙의물 같은 걸 생각했다면, 그것보다 훨씬 기괴하다) 그 실행 방법에 대한 묘사는 풍부하다. 주인공과 연인은 보석을 이용해 서로의 평균값을 산출한다. 그리고 완벽히 동일해져 버린 자아의 정보를 두 로봇에 동시에 장착한다. 초기값이 같기에, 두 로봇은 분명히 완벽히 동일하게 움직이기 시작할 것이다. 그들이 상대방에게 전화를 걸고 싶다면 완전히 동일한 시각에 수화기를 들어 번호를 누를 것이다. 그들은 '너'와 '나'가 구분없이 뒤섞인 기억의 도서관에서 상대방(이며 동시에 나)의 기억을 열람한다. 결말은 「유괴」와 비슷한 정서를 공유한다. 그리고 그만큼의 깊은 깨달음을 준다.
플랑크 다이브 (The Planck Dive, 1999)
읽어보았던 그렉 이건의 전 작품을 통틀어 가장 읽기 힘들었던 작품인데, 그 이유는 양자 중력에 대한 시각적 도해를 꽤 많은 분량을 할애해 말로 풀어서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등장인물들 모두 시뮬레이션과 실제 세계를 넘나들고, 배경도 지구도 아니고 먼 우주 저편에, 갑자기 원래 인물의 클론이 나눠져서 이야기가 진행되니 어렵지 않을 수가 없다. 하지만 마지막에 증명했다던 양자중력의 신비에 대해서는 가상의 증명이기에 허망했고 그 이론을 이해하는 게 스토리에 크게 필요하지 않았기에 그 어려운 양자 중력을 장황하게 설명했던 읽기 버거웠던 파트 또한 불필요한 노동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고대 그리스를 떠올리도록 하는 여러 장치들(폴리스, 등장인물의 이름들)이 있는데, 내가 장강명의 소설 「아스타틴」을 통해 정의내렸던 '그레코로망 펑크'의 예시가 또 하나 실증되는 것을 보니 반갑다.
고치 (Cocoon, 1994)
만약 어떤 유전공학 기술을 통해 선천적인 동성애자나 트랜스젠더가 태어나지 않도록 하면 어떨까? 이 치명적인 윤리적 딜레마에 대한 질문은 듣는 즉시 독자를 곤란하게 만든다. 이 작품의 주인공은 탐정으로서, 동성애자로서 그러한 유전공학 기술을 개발한 제약회사의 테러 사건을 수사한다. 저 윤리적 딜레마과 관련한 질문에 대해서는 명쾌한 해답을 내리지 않고 회피했다는 점이 한 가지 아쉬운 점이었지만, 결말만 보자면 매우 잘 짜여진 탐정 소설이다.
시각 (Seeing, 1995)
총을 맞고 깨어나게 된 남자, 그는 유체 이탈을 경험한다. 문제는, 의식이 제대로 돌아왔는데도 불구하고 시각이 유체 이탈의 시점으로 고정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즉, 그는 스스로의 정수리를 바라보는 시점으로 계속 살아가게 된다.
이 놀랍도록 독특한 소재를 보라! 그 누구도 이런 게 이야기가 될 거라고 믿지도, 이런 이야기를 쓰고 싶어하지도 않을 것이다. 심지어 이야기를 쓰고 싶어해도 이정도까지 디테일에 집착해 쓸 수 없을 테다. 이 작품의 디테일은 인지시각심리학과 인지신경과학에서 나온다. 그가 스스로의 정수리를 보는 시점으로 살아간다고 해도, 그는 실제로는 그의 안구를 이용해 세계의 상을 그린다. 그렇다면, 그의 정수리 위에 새가 날아와 앉았는지, 머리가 까지고 있는지를 어떻게 아는 것일까? 그것이 그의 뇌가 하는 역할이다. 그는 '추측'을 통해 눈이 보지 못하는 그의 정수리 모양을 그려 의식을 담당하는 전두엽으로 보낸다.
결말은 약간 아쉬웠는데, 내 머리속에 그렉 이건이 낸 결말보다 더 기발한 결말이 문득 떠올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그 결말을 이용한 비슷한 표절작 또는 오마주 작품을 내지 않는 이상) 이 소설은 최고의 독특함과 재미를 보장한다.
결정하는 자(Mister Volition, 1995)
주인공이 누군가에게서 빼앗은, 눈에 장착하는 기기는 자아가 생각할 때의 신경 발화 패턴을 시각화하여 보여주는 장치다. 말하자면 일종의 '뉴로 피드백'이다. 자기가 생각하는 것을 보면, 폐쇄 피드백 루프가 형성된다. 그러면 그것을 보지 못했을 때와는 다른 생각을 할 수 있다. 여기에서 그는 스스로의 사고를 결정하는 '궁극인' 또는 '결정하는 자'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읽으면 읽을 수록 철학자 대니얼 데닛의 의식 이론인 '다중 원고 모델(multiple draft model)'이 떠올랐는데, 역시나 (유독 이 작품에만 수록되어 있는) 작가의 말에 대니얼 데닛의 『의식의 수수께끼를 풀다』를 인용한다.
스티브 피버(Steve Fever, 2008)
유일한 21세기 작품으로, 어떤 연유로 20세기 말의 작품들과 함께 실렸는지는 잘 모르겠다. 평범한 미국 농촌의 지긋지긋한 분위기를 못견뎌 하는 사춘기 소년의 관점으로 시작되는 평범한 분위기는, 곧이어 인간을 지배하는 나노뉴로로봇과, 전세계를 휩쓴 나노로봇 전염볌, 그리고 종교의 본질을 어렴풋이 생각나게 하는 조종당한 인간들의 이야기로 이어진다. (내가 읽을 당시엔 종교적 향취는 알아차리지 못했는데, 바로 이어진 '옮긴이의 말'에서 이 작품이 종교에 대한 비유라고 언급한다. 듣고보니,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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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드SF를 빼놓고 그렉 이건이라는 소설가가 의미있느냐고 말할 수 있겠지만, 나는 그렉 이건을 높게 평가하는 사람들에게 다시금 '하드SF'에 주목하지 말고 그가 다루는 인간성에 주목해 보라고 말하고 싶다. 그가 다루는 음울한 시선, 즉 “대체 인간이란 무엇이길래?”는 그의 작품들을 관통하는 핵심 주제다. 물론 이 주제란 역사 이래로 인간이 써 왔던 거의 모든 '소설'들이 다루는 주제이기도 하다. 하지만 의외로 대부분의 고전 하드SF들―우주와 중력과 외계인과 시간여행을 다루는―에서는 “소설이란 인간성을 소재로 삼아야 한다”는 핵심 강령을 곧잘 무시한다. 반면에 그렉 이건은 우리가 소설을 왜 읽는지에 대해, 소설의 본질에 대해 매우 잘 알고 있다. 그는 인간성에 대해 다룬다. 하드SF란 도구는 단지 도구일 뿐이다. 우리는 그가 어떻게 세련되게 인간성의 음울한 핵심 질문을 다루는지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일개 독자가 아닌 '소설가'라는 동종업계의 종사자 입장으로서, 그리고 동일한 방향성의 작품 스타일을 추구하는 입장으로서 감상평을 말하자면, 읽는 내내 나는 경이감과 동시에 절망의 감정마저 들었다는 것을 고백한다. 그가 부리는 창의력과 독창성과 디테일은 내가 한평생 읽어보지 못한 어떤 경지에 이른 수준이었다. 무조건 '그 누구도 상상해 보지 못한 글'을 추구해야 하는 소설가의 입장에서, 그를 따돌리고 새로운 길을 개척하기는커녕 그를 졸졸 따라하다가 그의 문턱을 반도 넘지 못하고 쓰러져버릴 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가 닦아 놓은 '하드SF 장르의 인간성 탐구'를 뒤따르려 하는데, 왜냐하면 나는 모방이 창조의 어머니라고 믿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