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다섯 번째 계절 - 부서진 대지 3부작 1 부서진 대지 3부작 1
N. K. 제미신 지음, 박슬라 옮김 / 황금가지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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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부터 2018년까지 3년간, SF의 노벨상 '휴고상' 장편 부문은 휴고상 역사에 길이 남을 만한 이변이 펼쳐졌다. 흑인 여성 작가 N. K. 제미신의 판타지 트릴로지 『부서진 대지』 연작, 『다섯 번째 계절』, 『오벨리스크의 문』, 『석조 하늘』이 3연속으로 최우수 장편상을 수상한 것이다.

만약 2016년에 류츠신의 『삼체 2: 암흑의 숲』이 후보에라도 올랐었다면 내 바람으로는 2015년 『삼체 1: 삼체 문제』에 이어 아시아의 SF 최초 휴고상 연속 2회 수상이라는 대체역사를 즐길 수 있었으련만(흠, 찾아보니 2015년 휴고상도 여성 작가 대신 모종의 세력에 의해 남자 작가가 탔다고 말이 많았던 모양이다. 내 생각엔 『삼체』는 휴고상을 넘어서 불멸의 명작으로 오래 기억될 텐데), 애초에 『삼체 2』는 후보에도 오르지 못했으니 할말이 없다. 대신, 우리가 마주한 정사는 아시아인 2회 연속 수상이 아닌 흑인/여성 3회 연속 수상이다. (『삼체 3』은 후보엔 올랐지만...솔직히 못탈 만 했다)

당연히 논란이 있다. 나름 권위있는 휴고상의 역사에 쟁쟁한 SF 작가들, 로버트 하인라인, 필립 K. 딕, 아서 C. 클라크도 한 번도 이뤄 내지 못한 연속 3회 수상 업적인데, 그것도 정통 SF라고 보기 힘든 판타지 장르의 3부작을 3년 연속으로 빠짐 없이 수상시키는 게 맞냐는 것이다. 게다가, 드디어 '그' 논란, '작가가 흑인이자 여성'이라는 이유로 이 논란은 쓰잘데기 없는 무의미의 영역으로 파고든다. 작품 내적으로도 '아프로퓨처리즘'이라 부를 수 있는(옥타비아 버틀러가 유명하다), 흑인의 억압당한 경험을 강조하는 정서가 충만하다. 주인공들은 흑인이자 여성이고 그밖에 여러 작품에서 당연히 남성이 맡아 왔던 역할들, 마을 이장, 학자, 장군 등 많은 수도 여성이다. 레즈비언 연애와 게이 연애는 일상이라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고, 특별히 등장인물들의 '폴리아모리(다자연애)' 상황을 굳이 얘기하지 않아도 될 타이밍에 일부러 드러내놓는 상황 묘사들이 있다.

그래서 이 모든 이유 '때문에' 휴고상 위원회가 '특별히' 3년 연속으로 흑인이자 여성인 작가에게 상을 몰아주었는지가 쟁점이겠다. 여기에 '논란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1. 그렇게 건전하게 느껴지지도 않는 사상을 맥락과 상관 없이 강요하는데다가, 2. (1의 이유 때문에 혹은 1과 상관 없이도) 작품성도 뒤떨어지는데 아마도 과거 SF 거장도 한 번도 달성 못해 본 '휴고상 3연속 수상'을 이 듣보잡 흑인 여성 작가가 달성한 건 모종의 의도(아마 1과 관련된 심사위원들의 작당 혹은 맹신)이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일 것이다. (또한 2015년 여성 작가에게 상을 주지 못한 반성으로 2016년부터는 휴고상 위원회를 쇄신했다는 말까지.) 재미있게도 1의 이유는 누구에게나 무차별적으로 적용할 수 있기 때문에 큰 문제는 되지 않는다. 최근 김필산이 발표한 중편소설 『두 서울 전쟁』 또한 친미적이며 극우적인 사상을 추구하는 결말을 강요함에도 불구하고 그다지 큰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지는 않지 않은가? 아, 그건 어짜피 읽은 사람이 별로 없기 때문이라고?

2의 이유는, 사실 틀렸다. 이 작품은 1의 이유와 상관 없이, 대단한 작품성을 가진 작품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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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권의 줄거리를 간단하게나마 요약해 보자. 스포일러가 포함될 수 있다.

이 세계는 지진과 화산, 판의 지각활동이 끔찍하게 활발한 판타지 행성이다. 이 세계에서 인간들은 '다섯 번째 계절', 줄여서 아예 '계절'이라는 특이한 기후를 정의한다. 다섯 번째 계절이란 화산활동, 지진, 해일 등 극심한 천재지변으로 사계절에 비해 기후가 혹독하게 변하고 인류의 문명이 쌓아놓은 토대를 잃고 멸망까지 이르게 되는 이상기후 현상을 나타낸다. 이 문명에선 특별하게 태어나는 인간들이 있는데, 그들은 '조산력'이라는 능력을 지닌 '오로진'이다. 그들은 지진활동을 감지하는 '보님기관'이라는 감각기관을 타고났으며(지진을 느끼는 감각을 일컫는 동사 '보니다'와 그의 명사형 '보님'은 아주 매끈하게 번역되어서 좋다), 또 거대하고도 정교한 물리력을 강제하는 초능력도 행사할 수 있다. 그러나 너무 강력한 물리력을 가진 나머지 가끔 힘을 컨트롤하는 교육을 받지 않은 오로진은 인간을 손쉽게 또는 '실수로' 죽일 수 있다. 그래서 그들은 사회에서 '로가'라는 비속어로 불리며 배척당한다.

작품은 주인공 여성 세 명의 발자취를 따라간다. 그들은 모두 조산력을 가진 오로진이다. 그 중 한 명은 작품 내에서 '너'라고 불린다.(이 특이한 2인칭 화법에 적응하지 못하는 독자가 많은 나머지 인터넷 게시판에서 포기하는 자가 속출한다.) 그 '너'라고 불리는 주인공은 오로진 차별주의자 남편에 의해 오로진 아들을 잃고, 남편과 함께 어디론가 떠난 오로진 딸을 찾기로 한다. 그녀는 '스톤이터'라고 불리는 돌멩이 인간 소년을 만나는데, 스톤이터란 인간에게는 도무지 이해하기 힘든 행동양식을 가지고 있는 수수께끼 종족이다. 그들은 땅속에서 갑자기 나타나고, 돌을 먹고, 마치 로봇이 움직이듯이 사지를 등속으로 움직인다. '호아'라고 불리는 이 스톤이터 소년은 주인공 중 한 명을 따라가기로 결심한다.

주인공 다른 한 명은 '펄크럼'이라는 오로진 단체에서 강제로 짝지워준 오로진 선배와 아이를 낳아야 한다. '알라배스터'라는 이름의 그는 꽤 실력있는 오로진이지만, 주인공과는 거의 업무적인 태도만 가지고 몸을 섞는다. 다른 한 명의 어린 주인공은 오로진이라는 저주로 인해 부모와 헤어지고 '수호자'라는 정체불명의 단체의 인물을 따라 펄크럼 학교에 입학해야 한다. 전반적으로 이 책에서는 무너져 내린 인간사회에 또 한번의 '계절'이 닥치고, 거대하고도 치명적인 자연재해의 잔인함 앞에서 삶을 이어나가는 고통스러운 인간들을 다룬다.

그러던 중 결말. 알라배스터는 이렇게 말한다. “달이라는 것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느냐?” (여기까지가 1권)

2권은 1권의 주인공 '에쑨'의 사라진 딸 '나쑨'의 관점이 시작된다.

나쑨 또한 그녀의 어머니처럼 강력한 오리진이다. 그의 아버지(이자 에쑨의 남편)는 나쑨의 남동생을 오로진이라는 이유로 살해한 후에 나쑨의 오로진 성향을 치료하기 위해 '수호자'에게 딸을 맞긴다. 하지만 그 수호자는 오로진을 치료하는 자가 아니었고, 오히려 모종의 목적을 가지고 오로진의 능력을 강화시켜 주는 자였다. 나쑨은 아버지를 죽이고 수호자를 따라 어떤 사악한 행위를 달성하기 위해 수호자의 도시로 향한다.

그 즈음, 에쑨은 오래 전에 헤어졌던 알라배스터를 만난다. 업무적으로만 몸을 섞었고, 폴리아모리 관계에서 진정 사랑했던 남자의 중간다리를 거쳐서야 가족의 한 일원으로서만 인정했던 알라배스터였지만, 그가 쇠약해지고 신체의 일부분이 돌로 변한 정체불명의 질병을 앓고 있던 모습을 본 후에 그녀는 알라배스터를 향한 사랑의 본질을 깨닫는다. 알라배스터는 에쑨에게 자신의 신체를 돌로 변하게 만든 힘의 원천을 알려준다. 그것은 '마법'이라는 힘이며, 마법은 조산력보다도 훨씬 더 근본적인 힘이고, 생명의 본질 같은 것이다.

그리고 이 책에서 비로소 시리즈의 참된 재미를 맛볼 수 있는 숨겨진 세계의 정체가 드러난다. 사실 이 세계는 대지와 생명의 오랜 전쟁이 장시간 이어지고 있는 세계다. 하지만 대지 또한 생명이며, 대지의 깊은 곳에서 흘러나오는 '마법'이 바로 대지가 생명이라는 증거였다. (여기까지가 2권)
 
3권에서는 '스톤이터' 호아의 과거 이야기가 시작된다. 고대에 과학문명이 발달했던 '실 아나기스트'라는 이름의 도시, 거기서 호아를 포함한 스톤이터들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그리고 호아가 어떤 계기로 이 실 아나기스트 문명을 파괴하고 달을 저 멀리로 보냈는지 하는 이야기가 펼쳐진다. 그리고 세계를 멸망시키려 하는 나쑨과 세계를 구하려 하는 에쑨이 수호자들의 도시에서 재회한다. 그리고 그들은 대지에게 달을 되돌려주느냐 마느냐로 싸운다. (이렇게 3권 결말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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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장편 3부작 판타지에는 수많은 장점이 있다. 우선, 참신하고 경이감에 넘치는 세계관과 다양한 등장인물들. 판타지의 엘프 오크 용 나오는 전형성에서 탈피했을뿐더러, ‘스톤이터’ 같은 종족들도 매우 흔한 ‘골렘’이나 ‘드워프’ 설정과 완전히 다른 개성이 부여되어 있다. 대지가 끊임없는 조산활동을 벌여서 인류 문명이 위태롭다는 세계관은 자연 앞에서 무력한 한낱 인간군상의 실체를 되새기게 해 잘 설계된 경이감을 느끼게 해 준다. (바로 이 점이, 이 판타지 작품이 SF 문학상을 수상할 수 있는 지점이다. 이 경이감에 대한 감성은 SF 팬들에게도 잘 와닿는 측면이 있다.) 흑인이자 차별받는 초능력자라는 주인공들의 처지도 세계관과 잘 어우러지며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주제의식을 자연스럽게 드러내 준다. (LGBT나 반인종차별 사상을 ‘억지로’ 강요하는 최근 디즈니 영화들을 비교해 보자.)

두 번째의 장점은, 긴 플롯 진행 과정에 있어서 각 권에 각기 다른 역할을 부여했다는 점이다. 1권 『다섯 번째 계절』은 '부서진 대지'라는 세계관과 그 배경에서 떠도는 등장인물들의 서사를 진행시키는데, 사실 나 같은 하드 SF 갬성을 가진 사람에게는 그냥 평이한 얘기였다. 그런데 1권 알라배스터의 마지막 대사, "달이라는 것에 대해 아느냐?"부터 세계관의 숨겨진 층위가 드러난다. 그렇게 시작된 2권 『오벨리스크의 문』은 세계관의 두 번째 레이어에 대한 얘기를 한다. 거기에 포함된 이야기는 조산술과 마법에 대해, 오벨리스크와 스톤이터의 정체에 대해, 오로진과 수호자에 대해, 그리고 왜 이 대지가 이렇게 끔찍하고 잔인한지에 대해서이다. 즉, 1권에서 묘사된 이 흩어지는 문명 세계는 이 세계관에서도 문명의 본모습은 아니며, 인류는 과거엔 이것보다는 더 잘 살았으며 더 평안하게 살 자격이 있다는 말이다.

1권과 2권의 상호작용은 아주 좋다. 드러난 세계관은 설명하는데 한 권을 다 써야 할 정도로 깊고 풍부하지만, 2권에서 본격적으로 벗겨지는 세계의 숨겨진 정체도 또한 대단히 경이롭다. 그렇게 1권을 잘 참아낸 독자는 1권 마지막 대사에 의해 순식간에 참을성을 보상받게 되고, 2권에 정신없이 몰입하게 된다. 즉 이 시리즈는 명작이라고 일컬어지는 연작소설보다도 더 잘 계획되고 설계된 플롯이다 (프랭크 허버트의 『듄』 시리즈나 아이작 아시모프의 『파운데이션』 시리즈가 끝에 가서 얼마나 용두사미였는지 생각해 보라). 1권의 역할, 2권의 역할, 그리고 3권의 역할이 시리즈에서 다 다르며 독자는 켜켜이 중첩된 반전의 레이어를 즐기며 시리즈 전체를 새삼 다르게 되새길 수 있다. 2권을 읽을 때 1권의 세계를 아로새기면 그 의미가 다르게 다가오고, 3권에서 모든 과거 스토리가 드러났을 때 2권의 숨겨진 세계는 물론 또다시 1권의 세계까지도 한번 더 되새김길해 그 농축된 경이감을 뽑아낸다. 이렇게 결말까지 잘 설계한 세 권짜리 연작 소설은 정말 흔치 않다.

물론 단점도 있다. 3권 『석조 하늘』은 2권에서 밝혀지지 않은 또 다른 세계관 레이어, 즉 과거에 무슨 일이 있어서 이 세계가 이렇게 되었나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그게 바로 과거의 찬란했던 과학 문명을 자랑하는 '실 아나기스트'라는 도시 이야기. 그런데 그 과학 문명이라는게 우리의 현실세계의 반영이 아니라 완전한 판타지 설정이다. 생물마학, 오벨리스크 조작법, 스톤이터가 사실은 '조율기'라는 역할로 만들어졌다는 설정...근데 대체 조율기가 하는 역할이 뭐지? 그런 기능적인 역할을 맡은 로봇이 굳이 의식을 가져야 할지? 아무리 읽어봐도 이해가 잘 안 된다. 가상의 설정이라 그런 모양이다.

그리고 결말에 어머니와 딸의 대결은 지극히 개인적으로 축소되어 있어서 기대보다는 스케일이 좀 작다.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의 결말과 비슷하긴 한데, 애초에 이 영화는 처음부터 '난 이 영화를 가족 간의 화합에 대해 얘기하기로 했음'이라고 말하는 듯한 모양새라서 그렇게 크게 단점이 되지는 않지만, 『부서진 대지』는 그렇지 않다. 몇만 년이나 지속된 크고 거대한 '대지와 생명의 전쟁'의 장대한 최후의 대전투는 어디로 갔지?

마지막 단점. 아무리 딴건 다 괜찮았어도 폴리아모리 설정은 불필요했고 역시 좀 강요하는 느낌이 났다.

약간의 사소한 단점에도 불구하고 휴고상 3연속 수상은 어떤 논란의 여지도 없다고 생각한다. 상복은 가끔 운이 크게 작용하기도 한다. 나는 2권 『오벨리스크의 문』은 확실히 대단한 명작이며 휴고상 수상에 어떤 논란도 없다는 생각이 든다. 라이벌이었던 류츠신의 『삼체 3』은 확실히 『오벨리스크의 문』보다는 좀 떨어진다. 1권 『다섯 번째 계절』은, 『삼체 2』가 후보에만이라도 올랐었다면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후보에조차 오르지 못했기 때문에 이견은 없다. 3권 『석조 하늘』도 운이 작용했을 것이다. 같이 올라온 후보들이 대단한 명작이 아닌 이상 시리즈의 대단원을 나름 훌륭하게 마무리한 엔딩을 포함한 작품에 상을 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휴고상 3연속 수상은 이 작품이 당시에 운이 좀 좋았다는 걸 말해 주지만, 운이 좋았다는 말이 작품이 졸작이라는 얘기로 흘러가는 건 아니다. 부서진 대지 휴고상 3연속 수상이 '이 시리즈야말로 SF 역대급 GOAT 명작이며 제미신이야말로 불멸의 SF작가'라는 얘기는 아니다. 그냥 운이 좋게 세 번 연속으로 수상했을 뿐이다. 그렇다고 또 '이번 수상은 완벽히 잘못된 결정이었으며 부서진 대지 시리즈는 평작이거나 그보다 못한 졸작'이라는 걸 말해 주는 것도 아니다. 단점도 꽤 눈에 띄었지만, 아주 독보적인 특성도 있었고, 수작임을 인정할 만한 여러 요소들도 많았다. 그러므로 우리가 할 일은, 여성이니 남성이니, 흑인이니 아시아인이니 하는 여러 개소리들을 차단하고 작품을 그냥 내적으로 즐기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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