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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이야기 ㅣ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알레산드로 바리코 지음, 이세욱 옮김 / 비채 / 2014년 4월
평점 :
2013년 2월쯤이었다. 새벽에 눈이 떠져 <롤리타>를 마저 읽고나니 햇볕이 슬며시 고개를 들고 있었다. 벽에 걸린 시계를 보니 아침 6시 5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작고 졸린 눈을 비비는데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이런 작품을 내가 언제 다시 읽을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하면서 그동안 읽었던 시시한 작품들을 '피식' 비웃어버렸다.
2014년 5월 6일 아침 9시. <이런 이야기>의 마지막 문장을 읽다 소름이 돋았다. 정확히 말하면 온몸에 전율이 흘렀다. 내가 책을 읽는 이유가 바로 이거였다. 순간 작년에 읽었던 <롤리타>가 떠올랐다. 두 작품엔 묘한 공통점이 있었다. 새벽부터 읽기 시작해서 아침에 다 읽었다는 점과 책을 덮자마자 올해 최고의 소설 베스트로 꼽았다는 점. 정말이지...대단하다고 할 수밖에는 없는 작품이다.
<이런 이야기>를 어떤 이야기라고 표현하면 좋을까?
1903년 파리. 10만 명의 사람들이 무언가 홀린 듯 어디론가 가고 있었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224대의 자동차들이 모여 있었다. 마치 며칠 굶은 호랑이들이 모여 있는 것처럼 으르렁 그르렁 거리며....곧 자동차들은 일제히 레이스를 시작한다. 비로소 자동차 경주가 펼쳐지고 장대하고 아름다운 이 소설의 이야기는 시동을 건다. 자동차에 매료된 아버지는 자동차 정비소를 세우게 된다. 자동차를 사랑하는 아버지의 열정은 고스란히 아들 울티모(주인공)에게 전해지게 된다. 아버지나 기타 남자들이 자동차에 관심을 쏟는데 반해 울티모는 달리는 자동차가 아닌 자동차가 달리는 '길'에 매료된다. 시끄러운 자동차들이 달리는 그 길고 긴 '길'.
울티모는 순간 운명을 직감한다. 주인공인 자동차가 아닌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길'(서킷)이 바로 자신이 만들어야 할 꿈이라는 사실을...하지만 울티모가 꿈을 꾸는 순간부터 불운이 시작된다. 레이스에 참가한 아버지가 사고를 당하고 곧 울티모는 전쟁에 참여하게 되는데.... 울티모는 과연 꿈꾸던 서킷을 만들 수 있을까? 단순히 자동차가 달리는 '길'을 만들고 싶었던 걸까?
<이런 이야기>는 단순한 내용이 절대 아니다. 대략적인 초반 줄거리를 썼는데 조금 걱정된다. 혹시나 이 책의 방향이 오도되는 것은 아닐까 하고 말이다. 줄거리를 아예 뺄까 생각해봤지만 너무 막연할 것 같아 일단 초입 부분만 간략하게 썼다. 이 소설에 대해 해석이 다양하게 나온다. 어떤 시각으로 보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내용이 뒤바뀔 수 있다는 것이다. 오로지 보는 입장, 즉 독자가 직접 읽고 느끼는 부분이 있다면 그것이 옳은 것이겠다. 그래서 줄거리나 중심 내용은 일단 배제하고 내 느낌 위주로 써보고자 한다.
'모든 삶은 무한한 혼돈이며 그것을 단 하나의 완전한 형상으로 표현해낸다는 것은 더없이 정교한 예술이라는 것을.'
이탈리아의 작가 알레산드로 바리코. 처음 듣는 작가의 처음 읽는 작품이다 보니 나도 모르게 기대를 하지 않았다. 그렇다. 기대하지 않았기에 더욱 감흥이 컸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욱 놀라웠다. 이런 작가를 이제야 알게 되다니...
비로소 마지막 장을 읽고 나자 작은 강들이 모여 하나의 큰 바다를 이루는 기분이었다. 작가는 이렇게 얘기했다.
'이야기는 양탄자 같은 것이고, 그것을 직조해 하나의 그림을 완성하는 이는 작가다. 결국 글쓰기란 서사의 한 올 한 올이 생명력을 가질 수 있도록 완벽히 제어하는 작업이다.'
그저 놀라울 뿐이다. 내가 소설을 읽는 이유도 이와 같을 것이다. 내 상상의 틀을 뛰어넘어 미지의 그림을 그리기 위해 한 올 한 올이 살아 꿈틀거릴 수 있도록 완벽하게 배치 또는 조합하는 작업. 소설의 마지막을 위해 모든 이야기들은 숨죽여 기다리고 있었다. 정말 황홀했다.
이야기의 힘은 실로 대단했다. 아낌없이, 진지하게 추천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