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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자의 기억법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7월
평점 :
절판
<살인자의 기억법>을 두 번 읽었다. 출간하자마자 기쁜 나머지 지하철에서 단숨에 읽어버렸다. 그리곤 알츠하이머에 걸린 노인처럼 꿀꺽 까먹어버렸다. 내가 주인공처럼 병에 걸린 것일까, 고민했지만 이내 해결됐다. 사라지지 않는 이상 또 읽으면 되니까. '읽었다'는 기억은 있지 않은가? 인생에선 괜시리 심각해질 필요는 없다. 심각해지면, 그때부터 내 눈앞에 펼쳐진 모든 것들과 결투를 벌여야 하기 때문이다.
소설이 굳이 길 필요는 없다. 짧지만 긴 호흡으로 읽어야 하는 소설이 있기 때문이다.
<살인자의 기억법>은 고작 149페이지이지만, 주인공의 특성상 느릿느릿 읽힌다. 알츠하이머에 걸린 70대 할아버지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이 노인은 보통 노인이 아니다. 쾌락을 위해 사람들을 거리낌없이 죽이는 연쇄살인범이었다. 연쇄살인범이, 다 늙어서 알츠하이머에 걸리다니...신의 저주인가? 아니면 세월의 흔적인가? 그 덕에 언제 어디서 사건이 터질지 모르니 긴장감 속에서 지뢰를 찾는 양 천천히 읽을 수밖에 없었다.
어느 날, 눈 녹듯이 살인의 쾌락이 사라져 살인을 멈추게 된다. 그 뒤엔 기억을 잃기 시작한다. 70대 노인에겐 자신을 돌봐주는 딸이 하나 있다. 마지막으로 죽인 한 여인의 딸. 그녀가 죽기 전 딸을 살려달라던 약속을 지킨다. 그렇게 자신이 죽인 여인의 딸을 데려와 키우게 된다. 딸은 자신이 입양됐다고 알고 있다.
노인은 병 때문인지 자신이 사는 집조차 낯설어 점점 혼란스러워진다. 내가 왜 지금 여기 있는지, 밥은 먹었는지, 딸애는 누군지, 뭘하려고 했는지 순간적으로 기억을 잃어버린다. 예고도 없고 조짐도 없었다. 방편으로 항상 메모를 하고 녹음기를 목에 걸어 하고자 했던 것을 기록 혹은 녹음을 해놓고 까먹을 때면 리플레이를 누른다. 그래도 무슨 일이 생길지 몰라 불안하다. 혹시나 최악의 경우를 대비해 방에 독극물이 든 주사기를 준비한다. 여차하면 자신이 스스로 목숨을 끊기 위해서다. 그런데 동네에선 연쇄살인 사건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혹시나 자신이 누군가를 죽이고 다닌 게 아닌가 하는 착각에 빠진다. 기억력을 되돌려 봐도 누굴 죽인 기억은 없었다. 다행이라 생각하지만 안심하지는 못한다. 자신의 기억이 100% 장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점점 연쇄살인 사건이 늘어나고 노인은 극도로 불안해진다.
불안감에 잠식 당했는지 잠든 딸의 목을 조르기까지 했다고 한다. 아무리 기억을 되돌려도 오히려 남아 있는 기억까지 소모되는 것 같다...노인은 살인을 멈춘 것도 잊고 살인의 쾌락을 위해 밤마다 나가는 것일까?
역시 김영하 작가님이다. <살인자의 기억법>은 정말 강렬한 소설이다. 마지막까지 단서 찾기에 집중해야 한다. 다 읽어도 노인처럼 불안하다. 혹 내가 눈치 못 챈 부분이 있었나? 이게 팩트일까? 아니면 저것이 팩트일까?
읽으면서도 불안하고 다 읽으니 뭔가 께름칙하다. 불안해질 필요는 없다. 마지막 사실이 있는 그대로의 내용이니까.
(반전 때문에 많은 내용은 언급할 수 없다.)
인간의 기억력은 불안전하다. 그래서 아무리 기억력이 좋아도 추후에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왜곡시킨다고 한다. 예를 들어 회사에서 프로젝트 아이디어를 내는데 추후에 대박이 났다 하자. 그럼 여러 명이 서로 자기가 아이디어를 냈다고 아우성이다. 하지만 아이디어를 낸 사람은 단 한 명. 나중에 회의 자료를 보니 다 나와 있었다. 인간은 원래 망각의 동물이다. 그리고 기억력은 살아가는데 필요한 최고의 메모리일 뿐. 그런데 그 메모리 회로가 무언가에 의해 망가졌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전혀 기억이 안 난다거나 반복되는 일이 너무 생소하다 느낄 때 혼란에 빠진다.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고 고민을 해봐도 기억이 안 난다. 우리가 겪는 비슷한 경험이 있다면 술 마시고 필름이 끊기는 현상, 즉 블랙아웃을 당할 때다. 이때 괴로운 이유는 기억이 없는 그 시간에 내가 도대체 무슨 행동과 말을 했는지 전혀 갈피를 잡을 수 없기 때문이다. 자신이 뭔가를 하긴 했는데 기억이 사라졌다? 이 경험 자체가 공포로 다가올 수밖에 없다. 혹 내가 무슨 짓을 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기억력은 자신의 존재 그 자체이다.
전 연쇄살인범이자 알츠하이머에 걸린 70대 노인은 자신과 죽을 때까지 싸워야 한다. 지워지는 기억과의 사투, 눈 앞에 보이는 모습의 인과관계와의 사투, 그 사투의 결과에 대한 사투. 눈을 뜨고 감는 모든 것에 의심을 품어야 하는 지옥같은 시간을 과연 70대 노인은 감당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