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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운슬러 ㅣ 민음사 모던 클래식 64
코맥 매카시 지음, 김시현 옮김 / 민음사 / 2013년 11월
평점 :
절판

내가 좋아하는 요소를 다 갖춘 스타일의 소설을 쓰는 작가는 드물다. 내가 특정 작가의 소설을 좋아하는 경우는 많지만 소설 자체의 스타일을 좋아하기란 쉽지 않다. 쉽게 말하면 바라던 이상형을 만났다고나 할까? 그저 좋아하는 조합의 완성체인 이상형을....
난 상당히 자극적인 걸 좋아한다. 꼭 피가 나와야 하는 건 아니다.^^; 살인이든 복수든 배신이든, '깜짝!' 놀라게 만드는, 뇌를 쫄깃하게 만드는. 시작을 했으면 뭔가 끝을 봐야만 끝나야 한다. 그러면서도 스토리 완성도도 좋아야 한다. 납득할 수 있는 살아 숨 쉬는 스토리와 그 사이사이에 숨겨진 음모들. 그런 면에서 코맥 매카시가 딱이다! 이걸 지금에서야 발견했다니 나도 참 그동안 답답하게 살아온 거다. 아직 매카시 책은 두 권밖에 보지 않았다. 둘 다 영화를 보고 원작을 본 것이라 영상이 떠올라 소설에 집중하긴 힘들었지만. 영화 <카운슬러>를 보고 매카시의 책 세 권을 바로 주문했다. 일단 한 권 꺼내 읽어보면 확실한 답이 나오겠지. 내가 좋아하는 게 그의 소설인지 아니면 영화인지 말이다.
가끔 그런 책이 있다. 생각 없이 읽다가 소리 없는 번개를 맞은 듯 머리가 짜릿짜릿해지는 경험을 선사하는 그런 책.
인간이라면 누구든지, 세상에 발을 디딜 때 비로소 세상의 중심은 자신이 된다. 특별히 인식을 하든 무의식중이든 중심은 오로지 자신 뿐이다. 내 생각이 곧 앞에 있는 사람의 생각이고 내 판단이 무조건 옳다. 타인이 자신의 의견에 공감을 하지 않으면 그놈이 이상한 것이고 다 공감하는 타인이 있다면 그놈은 정상적인 사람이다. 스스로의 우주를 설계하고 만들어 나간다. 철저하고 옹졸하게.
이런, 내 우주가 <카운슬러>에서 산산조각이 나버린다. 63빌딩에서 떨어져 머리가 깨진 것처럼 머리가 얼얼하다. 그렇다. 우린 자신이 보고 싶어 하는 세상을 보고 절대로 고개를 돌리지 않는다. 스스로 배척하는 어리석은 짓을 무의식처럼, 습관처럼 하고 있다. 마치 훈련받은 군인처럼. 하지만 고개를 돌리면 경험하지 못하는 경험할 수 없는 세상은 펼쳐진다.
'세상을 실제보다 더 어둡게 묘사하고 싶지는 않소. 하지만 세상이 어둠에 잠식당한 지금, 세상이 사실상 나 자신이라는 사실을 무시하기가 더더욱 어려워졌소. 사실 세상은 바로 나 스스로가 창조한 것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오. 내가 존재하지 않게 되면 세상 역시 마찬가지요. 다른 세상들이야 있소. 당연하지. 하지만 그건 다른 사람들의 세상이오. 그리고 타인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저 환상에 불과하오. 당신에게 중요한 것은 그저 당신 자신의 세상일 뿐이지. 당신이 죽으면 그 세상도 사라지고 두 번 다시 나타나지 않소. 모든 현실의 소멸은 그 어떤 비관론에서도 받아들일 수 없는 개념이지. 종말이 일어나지 않는 한 말이오.'
'시신이 사막에 묻히는 곳과 시신이 그냥 길거리에 버려지는 곳은 서로 전혀 다른 세상이오. 지금까지 나는 그런 세상이 있다는 걸 몰랐지. 하지만 그런 세상은 늘 있었소. 안 그렇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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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는 단어와 뜻은 없지만 실로 무시무시한 파괴력을 지닌 문장들이다. 내가 애써 외면했던 현실적인 공포가 순식간에 덮쳐왔다. 내가 하는 말을 이해하시나? 신문, TV에서 보는 끔찍한 사건들을 그저 우린 남들 이야기로 치부하고 애써 기억에서 지워버렸지. 근데 그게 내가 되지 말라는 법은 없다. 언제든 닥칠 수 있는 '세상'인데도 다들 자신들의 '세상'에 있다. 그렇다. 우린 다 비슷비슷한 인간일 뿐이다.
하지만 위의 문장에서도 그렇듯 그런 세상은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존재해 왔고 존재할 것이다.
<카운슬러>는 영화 극본이다. 혹시나 몰라서 말하지만 소설책이 아니라 극본집이다. 캐릭터들의 대사가 있고 배경이 바뀔 때면 배경을 떠올리게 만드는 묘사가 있을 뿐이다. 영화를 봤다면 굳이 이 책을 안 봐도 괜찮다. 왜냐하면 영화에서 나오는 대사가 이 책과 거의 똑같다. 영화에 안 나오는 대사가 있지만 극히 미미하다. 만약 이 책만 본다면 조금 낯설 것이다. 왜냐하면 영화를 만들기 위한 극본으로 나왔기 때문이다. 소설처럼 자세한 묘사나 설명은 없다. 얼마 전 영화 리뷰에서 작품에 대한 정보는 다 얘기했기에 책 리뷰엔 다른 이야기를 하려 한다. 우선 주인공 세명에 대해,
말키니(여): 섹시하고 현실을 잘 인지하고 스마트하다. 라이너가 사랑하는 애인.
라이너(남): 하는 일마다 잘 풀려 돈을 많이 번 사업가. 무식한 긍정가.
변호사(남): 착실하게 살아왔지만 돈 때문에 타락한다. 곧 결혼을 앞두고 있다.
웨스트레이(남): 미래에 대한 철저한 대비로 현실적인 인간. 라이너 파트너이기도 하고 어둠의 세계에서 종사한다. 여자를 좋아함.
마약 거래로 크게 한탕 하고자 하는 남자 셋. 그들의 목표는 '돈'이다. 라이너, 변호사, 웨스트레이와 어둠 조직의 자금도 유입됐다. 단지 돈이 필요했던 변호사는 처음으로 도덕적이지 않은 일에 뛰어들었고 라이너와 웨스트레이는 그에게 항상 심각한 경고를 했다. 이번 일은 생명을 담보로 잡고 해야 하는 거라고. 혹시나 무섭거나 두려우면 언제든 발을 빼도 된다고. 하지만 그의 세상 속엔 부정적인 생각과 그에 대한 대책은 어디에도 없었다. 마치 도박에서 자신의 전재산과 생명을 건 한판 승부인지도 모른고. 설마 했던 일은 터진다. 운반하던 마약은 사라져버렸다. 돈을 날려버린 조직은 어떻게 행동할까?
세 명의 남자는 어떻게 반응할까? 라이너는 생각하는 것 자체가 귀찮은 건지 '되는대로 흘러가겠지', 라는 말을 남기고 총에 맞아 죽는다. 성공 or 실패를 대비한 웨스트레이는 그동안 모아온 돈을 들고 런던으로 튄다. 변호사는 어떨까? 자신의 책임이 아니라는 진실을 밝히려 애를 쓴다. 이 셋은 최악의 상황에서 나올 수 있는 경우의 수 세 가지를 보여준다. 도망가거나 그냥 순응하고 죽어버리거나 그것도 아니면 살려고 발광하는.....찌질하지만 재밌는 경우의 수가 아닌가?
똥구멍 빠지게 쩔쩔매는 세 명과는 달리 이 모든 걸 위에서 조정했던 사람, 바로 말키니다. 그녀는 모든 계획을 알고 마약을 강탈하지만 다시 빼앗기고 만다. 세상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진 않았다. 소설 같지만 이런 부분은 지극히 현실적이다. 계획을 변경하고 런던으로 튄 웨스크레이를 쫓는다. 그가 모아둔 돈 2천만 달러를 빼앗기 위한 철저한 계획. 최후의 승자는 말키니다. 소설에서든 현실에서든 결국 살아 남은 말키니같은 인간이 승자가 된다. 감정에 휘둘리지 않으며 이익을 위해선 무엇이든 저지르고 배신할 수 있는 인간상.
마지막의 마키니는 이런 말을 남긴다. 생각할 거리가 많은, 결과론적인 대사.
'심약한 마음탓에 모든 현실에 눈을 감아 버렸죠. 그리고 그 결과 우리의 운명이 정해졌고요.'_ <카운슬러> 말키니 대사
피도 눈물도 없는 이 세상, 코맥 매카시의 무서운 경고는 테러였다. 알면서도 보지 않으려 했던 세상.
그래도 난 아직까진, 살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