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가니 - 공지영 장편소설
공지영 지음 / 창비 / 2009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한동안 잠잠했던 성폭행 사건이 다시 수면위로 떠올랐다.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던 '경기도 발바리' 사건은 가정이 있는 평범한 가장이 악마의 탈을 쓰고 자행했던 연쇄 성폭행의 충격은 이루말 할 수 없었다. 그 주인공은 자살로 사건은 히미하게 잊혀져 갔다. 그렇게 놀란가슴에 잠시 숨을 고를 때쯤 어디선가 불쑥 나타난 '조두순 사건'으로 뒤통수를 강타했다. 처음엔 단순한 성폭행으로 생각했지만 친구가 그 사건의 내막을 자세히 알려주는 바람에 형언할 수 없는 분노가 피어올랐다. 순간 오바이트가 일었고 잠시 맑은 공기를 마시고 겨우 진정시켜야만 했다. 인간이 점점 이성이 없는 동물과 다를 바 없어지고 있는걸까? 

 <1Q84>를 읽고 한동안 다른 책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제 어떤 책을 읽어야 할지 나름대로 고민하고 있었다. 고민에 고민을 한 끝에 최근 인문학 서적을 거의 읽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책장에서 마케팅처럼 서 있는 인문학 서적을 고르게 됐다. 찬찬히 눈으로 한권 한권 좇고있는데 공지영의 <도가니> 앞에서 멈춰버렸다. 내 두 눈은 미동도 하지 않고 지긋이 그 책을 가리켰다. 왜지?라고 생각한 순간 '조두순 사건'이 떠올랐다. 나영이 사건과 도가니가 어떤 개연성이 있는지는 확실하게 답할 수 없었지만 막연히 읽어야 한다고 말해주고 있었다. 물론 도가니의 내용은 단어 몇 개로 표현할 만큼 밖엔 알지 못했다. 그럼에도 내 눈은 나를 가르키고 있었다. 내 신체 중 하나인 눈에 무언의 압력이었다.
그래서 보라색 펜과 포스트잇을 꺼내어 읽을 준비를 마쳤다.

"너무 코미디 아니니? 우리 여기서 딸 키우고 살아야 하는 거지? 이 발정난 나라에서. 응?"
(<도가니>주인공 서유진의 말중)

딸을 가진 아이의 어머니로서, 딸을 가진 아버지로서, 책을 읽는 독자로서 이 책을 읽고 이렇게 얘기할 것이다.
<도가니>는 실화를 바탕을 쓴 소설이다. 실제 2005년 6월 '광주 인화학교'의 직원이 성폭력 사건으로 고발했다. 인권위 한 직원은 "소설에 나온 부분은 내가 아는 내용의 3분의 1밖에 안 된다"며 "작가 역시 사회적 파장을 생각해 입에 담지 못할 내용 모두를 그대로 반영할 수는 없었을 것"라고 말했다.  

'조두순 사건'으로 얼얼한 뒤통수를 만지다가 실화소설<도가니>를 읽자  꽁꽁 얼은 물에 머리를 쳐박힌 것 같았다.  '조두순 사건'도 다 끝난 다음에서야 동아일보 기자에 의해 알려졌고 <도가니>에서 다룬 사건도 4년이 지나서야 알게 되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이런 충격적인 사건도 이렇게 모르고 있었는데 하물며 큰 사건들은 어쩌겠는가?
언론들의 문제점일까? 아님 자기 하나 먹고살기 바쁜 국민들의 무관심일까?

돈없고 빽없으면 살기 힘들다는 말은 정의가 돼어 피부의 살갗을 파고들어 곰팡이가 돼었다. 그 곰팡이는 대를 이어 물려 받았다. 정의, 상식, 진실은 다 어디로 사라졌을까. 

나는 <도가니>에 나오는 남자 주인공(강인호)에 주목했다. 아니다, 주목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나의 분신이자 두려움에 대상이던 것이다. 그의 행동 하나하나가 나를 살 떨게 만들었고 마지막엔 결국 그의 행동에 어떤 면에서는 안심하기까지 했다. 나는 강인호의 선택에 동감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는 나도 강인호처럼 이런 변명들을 늘어 놓았다.   

"그래, 어쩔 수 없자나. 상황이 그렇잖아.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여우같은 마누라와 토끼같은 딸을 먹여살여야 하는 의무를 가지고 무진으로 내려왔는데 생각치도 못한 상황이 펼쳐졌고 난 정말 최선을 다한거야. 정말 그러긴 싫지만, 학생들을 위해 내 가정까지 버리고 매달릴 순 없어. 내 손에는 두 명의 목숨도 달려있으니까. 그리고 많이 지쳐버렸어. 더러운 인간들의 세치 혀로 날 발가벗기고 몸 구석구석을 파헤쳐 제자들을 볼 낯이 없어진거야. 그게 진실이든 아니든. 난 선택의 여지가 없었어. 길이 없었다고. 답이 주관식이면 좋겠지만 객관식에 보기는 하나밖에 없었다고...."

왜 내가 강인호의 마지막 행동에 대해 조심스레 지켜봤을까? 소설을 보며 내가 강인호라면 어떤 행동을 취할 수 있을까라는 물음에 대답을 가지고 읽어 나갔다. 어쩌면 나 대신 강인호가 끝까지 아이들을 위해, 정의를 위해, 진실을 위해, 빌어먹을 세상을 위해 싸워줬으면 하는 은근한 바람이 있었다. 솔직히 나는 그럴 자신이 없었기 때문에 소설만은 내 그런 기대에 부응하여 대리만족이라도 해줬으면 했다. 그러나 나의 이런 바람을 눈치 챘는지 공지영 작가는 강인호를 바람 없는 풍선처럼 만들어버렸다. 강인호가 실제 인물인지 가상의 인물은지는 알 수 없지만 그의 선택에 그 누구도 뭐라 할 사람도 없을 것이다. 공지영 작가는 강인호를 통해 독자에게 물음을 던진 건 지도 모른다.
 

 

▲ 북콘서트에 나온 공지영 작가의 모습.

 

(다음은 내가 상상해서 쓴 글이다.)   

"당신이 소설속 주인공인 강인호라고 한다면 과연 어떤 선택을 해야만 하는가? 정의를 위해 싸울 것인가? 아니면 눈 앞에 뻔히 보이는 정의를 외면하고 정의가 땅바닥에 나뒹구는 사회속에 숨죽이고 인간들이 먹고 살아야 할, 어쩔 수 없는 자본주의 길들여져 정의가 땅바닥에 패대기 쳐지든 말든 어떻게든 살아갈 것인가? "

난 공지영 작가는 <도가니>를 통해 모든 대한민국 국민에게 질문을 던진 것이다. 인생을 살다보면 이런 일이 선택에 갈림길에 서 있을 수도 평생 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도가니>를 통해 생각지도 못했던 상황에 맞딱뜨린다면 과연 나는 어느 쪽에 설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한 번쯤 해봄직하다. 죽을 때까지 이런 고민을 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이런 고민을 통해 내면에 있는 자신과 맞서 싸우며 어떤 진실을 향해 달려가는 자신을 볼 수 있는 기회다. 소설은 자신이 경험하지 못한 상황에 내던져져 간적적이나마나 생각하고 대비하게 만드는 구실을 한다. 공지영의 <도가니>는 인간 본연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거울의 역할을 자처하고 있다. 덕분에 난 씁쓸함에 이루말 할 수 없는 부끄러움을 느낄 수 있었다.

공지영 작가는 <도가니>를 쓰기 전에 다른 소설을 준비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 상태에서 "이 소설을 처음 구상하게 된 것은 어떤 신문기사 한 줄 때문이었다. 나는 그동안 준비해오던 다른 소설을 더 써나갈 수가 없었다. 그 한 줄의 글이 내 생의 1년 , 혹은 그 이상을 그때 이미 점령했던 것이다." 라고 <도가니> 작가의 말에서 밝혔다. 어떤 사명감이 그녀를 움직일 수도 있고 본인도 나와 같이 본연의 모습을 보고 적잖히 놀랐을 가능성도 있다. 어찌됐든 <도가니>는 실화소설이며 간만에 국어책에서나 볼 수 있던 뭔가 강렬한 여운을 남게 하는 소설임에 틀림없다.

<도가니>와 '조두순 사건'을 결부해 사회적으로 크게 파장을 일으켰으면 하는 바람이다. 약자에게 강하고 강자에게 약한 대한민국의 상식이 통하지 않는 법과 사회적 인식을 바꿀 수만 있다면 나또한 그에 따른 정의, 진실을 위해 내 자리에서 조금이나마 보탬이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노력할 것이다. 그래서 사회가 지렁이 지어가듯 천천히 바뀔 수만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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