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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실격 외 ㅣ 세계문학의 숲 5
다자이 오사무 지음, 양윤옥 옮김 / 시공사 / 2010년 8월
평점 :
품절
나만 그런 것인지는 몰라도 낯선 작품을 만나 이해하며 교감을 통하기까지 조금 시간이 걸린다. 첫 장을 넘겨 마지막 장을 덮는 순간까지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해야 비로소 한 작품을 온전히 이해했다, 라고 착각하게 만든다. 그렇다고 이해를 못한 바는 아니지만 말이다.(작품에 있어 차이는 있다.) 마음에 드는 문체나 기가막힌 스토리를 만났을 때 나는 빠져든 작품보다 작가에 집중한다. 그 작가를 이해하면 작품 또한 자연스레 이해할 거라는 내 지론 때문이다. 그의 삶과 철학을 이해한다면 작품따위를 이해했는지 안 했는지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을 읽고 참 안타까웠다. 일본의 천재적인 작가라 불리는 인간들은 왜 죄다 자살하려 안달했단 말인가?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미시마 유키오 등등 자신 스스로 목숨줄을 끊어버렸다. 물론 다자이 오사무도 사랑하는 연인과 강물에 뛰어들어 물속에서 생을 마감했다. 사무라이 정신이 유전으로 남은 건지 아니면 자신이 존경하는 작가들이 자살로 생을 마감하니 자신 또한 그분의 뜻을 받들며 존경의 수단으로 그랬을 수도 있다. 오죽했으면 현재 일본에서 100년만에 나올까 말까한 천재로 불리는 히라노 게이치로는 일찍 요절하지도 않을뿐더러 자살할 생각도 없다고 말하지 않았던가?(그래서 왠만하면 비행기를 타지 않는다.) 분명 자살하기까지 어떤 명분이나 자신만 아는 이유들이 있겠지만 독자된 입장으로써 상당히 아쉬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왜냐하면 더이상 그 작가의 작품들을 읽지 못하기 때문이다.
천재들은 일찍 요절을 하거나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는 얘기는 공공연히 알려진 사실이다. 팩트라 하기보다는 그렇게 믿는 것이 더 아름답기 때문은 아닐까? 왠지 그 작가의 삶이 짧고 굵게 한 방 크게 치고 퇴장한 것 같이 가슴속에 공허한 빈터만이 남아있다. 그 빈터엔 온갖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펼쳐 그 작가의 생을 더욱 아름답게 꾸미는 것일지도 모른다.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은 분명 자신의 자전적인 소설이다. 그가 정신병원에 갖혀 있을 때 상당한 충격으로 <인간실격>을 쓰고자 결심했다. 그의 파란만장한 삶을 짧은 단편소설인 <인간실격>에 다 담은 것일까?
<인간실격>은 인간 다자이는 자신의 삶을 소개하는 말투의 전개로 어렸을 적 집안의 배경과 느낌, 자신이 어떤 인격을 가졌으며 어떻게 삶을 버텨나갔는지 세세히 기록해나가고 있다. 물론 1인칭으로 써내려가지만 누군가에게 고백하는 편지형식인 것이 색다르다. 일본의 가정의 정통적 문화를 이해하려고 받아들이려 하지않고 어떻게 대처할지를 몰라 꾸역꾸역 맡은 역활을 해나간다. 자신이 판단하고 결정하는 일따위는 어디에도 없었다. 또한 심신이 약했기 때문에 곧이 곧대로 따르는 수밖에 없다. 그러니 어디서든 눈치를 보며 일정한 환경속에 끼어 무색무취가 되고자 한다. 그럼에도 자신의 껍데기를 최대한 가리기 위해 광대 짓도 곧잘하는데 혹시 누군가 눈치를 챌까봐 계속해서 전전긍긍한다. 그의 파란만장한 삶이 어떤식으로 펼쳐지고 왜 그래야만 했는지, <인간실격>을 읽는다면 다자이를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또 다른 단편소설인 <로마네스크>와 <개 이야기>는 다자이의 또 다른 면을 볼 수 있다. 사실 <인간실격>은 다자이의 자전적인 성격이 짙기때문에 말할 필요가 없는데 순수한 창작인 이 두 작품은 그의 뛰어난 이야기꾼의 재치와 유머를 엿볼 수 있다. <로마네스크>는 제각기 개성이 다른 세 명의 달인이 결국 한자리에 모임으로써 완성되는 구라의 미학을 보여준다. 먼저 선술의 달인과 싸움의 달인, 그리고 거짓말의 달인. 이 세 명의 달인은 자신들의 특기인 선술, 싸움, 거짓말로 인해 결국 스스로를 파괴하지만 마지막에 극적인 이들의 만남으로 달인이란 칭호는 예술가로 남는다.
<개 이야기>는 일본인의 성격을 이보다 더 잘 표현하는 소설은 없을 것이다. 개를 무서워 하는 주인공은 필시 개가 분명 자신을 물거라는 허무맹랑한 상상 때문에 개만 보면 웃음띤 표정으로 적대감이 없다는 신호를 보낸다. 핑계는 이렇다. '개가 자신을 물면 한 달 정도는 병원에 들락날락거려야 하고 금전적으로 보상을 받을 수 없다. 얼마 전 내 친구도 개에게 물려 일도 못하고 돈을 축냈다. 그러니 개에게 물려서는 안 된다.' 이런 핑계로 개에게 사근사근한 미소를 흘리며 지나가는 어느 날, 어이러니하게도 개들은 주인공을 좋아하게 된다. 닥스훈트는 그를 집까지 쫓아 오며 끊질길 애정공세가 먹혀들어 주인공 집에 정착한다. 그때의 핑계도 이렇다. "이 개를 쫓거나 해를 끼치면 분명 이 개의 친구들까지 불러 복수를 하게 될거야.' 결국 계속된 핑계거리를 만들며 아주 극진하게 대접하는 주인공.
주인공은 개를 싫어하는 듯 보이지만 끊임없이 개 이야기를 하고 있다. '강한 부정은 강한 긍정이다.'라는 말이 있다. 결국 그는 닥스훈트를 자신이 데려와 키우는 데까지 이르렀지 않나? 분명 자신은 개를 극히 혐오한다고 말했는데도 불구하고 행동은 정반대로 흘러간다. <인간실격>에도 나오지만 다자이는 일본인들은 속을 알 수 없다, 라고 말한 바 있다.
일본인들의 알 수 없는 마음, 예상치 못한 행동을 <개 이야기>를 통해 비꼬려는 시도는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