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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책중독자의 고백
톰 라비 지음, 김영선 옮김, 현태준 그림 / 돌베개 / 2011년 2월
평점 :
절판
프랑소와 트뤼포의 영화 <화씨451도>에서 사람들은 각자가 한 권의 책이다. 책이 금지된 미래, 책을 불태우기 위해 나타나는 방화수들에게 대항하기
위해 보존해야 하는 책을 전부 암기해버린 사람들. 이제 그 누구도 책을 빼앗아갈 수 없다! 이 영화를 보면서 나는 죄와 벌을 외워야겠다고 생각했다. 지금 생각해봐도
참 멍청하지? 미래세계에 도래할 문명에 대한 고민, 문자의
의미 뭐 이런 것들에 대해 고뇌해도 시원치 않으련만 고작 생각한다는 게 나는 어떤 책이 될까라니…그렇다고
해서 내가 톰 라비와 같은 책중독자냐 하면 절대 그렇지 않다.
책을 좋아하고 즐겨 읽으려 하는 나조차 저자 톰 라비의 ‘이런
과도한 책 사랑은 해롭다.’라고 생각하면서 걱정스럽게 고개를 저을 만큼 <어느 책 중독자의 고백>은 중독의 독성 수치가 높고 과하다. 대상이 마약, 도박, 스토킹이
아닌 책이라 하더라도 ‘무엇’에 홀딱 빠진 사람들은 대체로
위험하니까. 무엇과 비교해서 위험하냐에 대해 따져보자면 아마도 아름답고 절제하는 생활, 사회에 합당하다고 여겨지는 태도와 타인의 비위를 거슬리지 않는 생활인의 품격을 고루 갖춘 사람들? 그들에게 책중독자는 이상하고 괴이하며 한편으론 우습기도 한 존재들로 비춰질 공산이 크다. 책을 읽지 않는 사람들, 책을 읽을 필요를 느끼지 않는 사람들, 심지어 왜 책을 읽어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 하는 사람들에게 인생은 얼마나 명랑한가. 외로움, 타인이라는 지옥, 낯선
세상에 대한 공포. 그들은 그것들을 보았거나 눈치챘을지라도 책이 아닌 다른 사물들로 허기를 채울 수
있다.(그들은 선택이 가능하다!) 연애도 하고 술을 마시고
당구와 내기, 멋진 옷을 사거나 춤을 추고 화장을 하고 노래를 부른다.
햇살처럼 화사한 그들은 외부와 고립된 채 혼자 우두커니 의자에 앉아 점점이 박힌 까만 글자들을 손으로 짚어가면서 반나절을 보내는 이들이
하는 독서라는 행위를 도저히 납득할 수 없거나 하더라도 나는 저러지 않겠다고 다짐할 것이다. 이건 어디까지나
속마음에 관한 이야기이다. 물론 사람들은 사회에서 독서를 존중하고 권장한다. 다독가를 부러워하며 그들의 비법을 듣고자 모여서 경청하나 그건 우리가 받은 교육 때문에 갖추는 예의일 뿐. 사람이 얼마나 모자라면 일어나서 행동하지 않고 책이나 읽고 앉아 있을까라고 음흉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나는 라비가 제시하는 책중독의 유형들에 끼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화장실을
차지할 만큼 책을 쌓아두지도 못 했고, 호랑이가 손에 쥔 책을 주면 안 잡아먹는다고 하면 책을 내줘버릴
테다. 책에 밑줄도 좍좍 긋고
잊지 않아야 할 구절이면 망설이지 않고 책장 모서리를 접어버린다. 눈에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을
위해 책을 읽는다고 오래 전에 깨달은 뒤로 필요하면 책 앞 뒤에 덧붙은 색지를 북 찢어서 메모지로 쓰기도 했었다.
책을 고이 모시는 책중독자들에게 나는 끔찍한 폭행을 저지르는 파괴자일 지도 모른다. 이
책의 곳곳에 내가 책중독자인지 확인하는 테스트를 하면서 열에 여덟 번 책중독자로 밝혀지기는 하였으나 나보다 책을 더 우선으로 여기진 않는다. 뭐 다른 것들, 사람이나 음식보다 책을 좋아하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렇다. 나는 친구나 가족보다, 여행이나
맛있는 음식보다 책읽기가 더 즐겁다. 사실인 걸 어쩌라구.
살아오면서 읽은 책들과 내가 함께 겪었던 사건들이 떠올랐다. 10대
때부터 책을 사러 다녔던 동네 서점, 한 달에 한 번씩 책을 사러 갔던 광화문의 할인책방, 바슐라르의 책들을 한꺼번에 다 사버렸던 홍대앞 서점(바슐라르는 죽음
뒤 세상이 도서관이면 좋겠다면서 그렇다면 죽음이 기쁘겠다던 시인이자 학자였다)과 이미 읽은 줄 모르고
다시 샀던 책들, 절판된 판본이 꽂힌 내 책장을 바라보며 배시시 웃던 기억, 이사할 때 이삿짐 직원들에게 책 때문에 들었던 타박과 인터넷 서점에서 택배가 오는 날이면 가족들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택배기사님과 모종의 문자를 주고 받으며 시간을 조정했던 일들. 그 모든 나와 책의 역사가 어느
틈에 내 옆에 앉아 지켜보고 있다. <어느 책중독자의 고백>을
읽는 내내 그랬다.
역사에 기록된 책을 사랑해서 책에 파묻혀 살았던 많은 독서가에 비할 수는 없고 나는 그저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다. 예스24의 상품 카트에는 517,860원어치, 상품 보관함에는 6,566,530원 어치 책들이 담겼다. 알라딘과 교보까지 합치면
약 천오백만 원 어치 정도 책들. 지금 당장 살 책들이다. 만약
내게 유산이 몇십 억 생긴다면 아! 당장 이것들을 결재해서 싸담아 보라카이로 날아가서 멋진 호텔에 박혀
책을 읽으면서 이번 겨울의 끝자락을 보내고 싶다. 이런 내 미망(迷妄 사리에 어두워 갈피를 잡지 못하고 헤맴. 또는 그런 상태)을 글로 쓸 줄 정말 몰랐다. 이게 다 톰 라비가 쓴 책을 읽은 탓이다. <어느 책중독자의 고백>은 라비의 책에 대한 사랑이 낳은
변종 책이다. 딱히 내세울 만한 지식도 없고 그럴싸한 지혜를 감춘 책도 아니다. 내세운 유머도 미미하며 책을 둘러싼 여러 유형들을 짚어주는 수준은 대단히 극단적이다. 극단적으로 넓혀준 품 탓인지, 내가 책을 사랑했던 순간을 떠올렸고
그 시절을 기억하며 잊었던 날들과 먼지만 쌓인 책들을 다시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사랑했던 책들. 부모가 알려주지 않았던 인생을 사는 태도와 친구가 말해주지 않았던 비밀들과 허락되지 않은 낯선 곳으로 가는
여행을 함께 해준 책들에 대한 내 깊은 사랑을 축축한 내 마음의 저장고에서 꺼내 넓은 땅, 따뜻한 볕에
두고 말렸던 시간. 책 없인 못 살 것 같은 외로운 인생들에게 이런 시간, 해롭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