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의 우정은 첫사랑이다 - 세상 가장 다정하고 복잡한 관계에 대하여
릴리 댄시거 지음, 송섬별 옮김 / 문학동네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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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여자들의 우정은 특별할까? 단짝과 나누던 미묘한 감정들을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빠져들어 읽을 수밖에 없는 책이다. 나의 어둠을 곁에서 지켜봐주고 지금까지도 힘이 되어주는 여자 친구들에게 선물하며 ’나, 너가 있어서 이렇게 잘 살아 있어‘라고 수줍게 고마움을 표현하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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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우리를 구해주지 않는다 - 주장과 비판, 불의에 참견해온 10년의 기록
록산 게이 지음, 최리외 옮김 / 문학동네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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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NS, 블로그, 뉴스 댓글 등, 모두가 한 마디씩 자신의 의견을 말하는 듯한 오늘날에 록산 게이의 '의견들'을 읽는 의미는 무엇일까? 만약 이 글이 자신의 '취향'을 과시하듯 보여주는 글이었다면 이렇게 리뷰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미국, 트럼프가 두 번이나 대통령에 당선되고, 미투(#Metoo) 운동이 일어났으며, 흑인을 대상으로 한 범죄, 혹은 부주의한 살해 사건이 끊이지 않는 배경에서 '흑인의 생명은 중요하다(Black Lives Matter)'라는 구호가 울려퍼진 10년 동안의 미국에 대해 솔직하게 자신의 의견을 밝힌 기록이기에 그 의미가 크게 다가왔다. 우리나라에서도 그와 맞먹는, 아니 그 이상의 범죄들이 공권력에 의해 벌어지고 있는 때이니 말이다. 

록산 게이의 신간 『아무도 우리를 구해주지 않는다』는 칼럼니스트이자 에세이스트, 소설가인 록산 게이가 미국의 정치, 사회, 문화적 이슈에 글과 말로 참견해온 10년 동안의 기록 중 오래도록 읽힐 최고의 칼럼 66편을 모은 칼럼집이다. 사실, 지면을 부여받는 것도 일종의 권력이라고 할 수 있는데, 록산 게이는 그 무게를 기꺼이 지고, 지면, 팟캐스트, 유튜브, 시사 프로그램 등 자신의 목소리가 들릴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서든 쓰고 말한다. 나는 그 점이 좋다. 의외로 공인으로서 자신의 의견을 솔직하게 말하는 것이 자신의 일상을 뒤흔드는 위험한 일이 될 수도 있고, 그렇기 때문에 지면을 가지고도 꼭 필요한 말을 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록산 게이는 특히 미국의 현 상황을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자신의 의견을 밝히는 데 거리낌이 없는데, 록산 게이는 자신이 속한 자리, 즉 아이티계 흑인이라는 뿌리, 교수라는 지위, 성소수자라는 정체성, 그리고 몸집이 큰 여자이고 강간 피해자인 점 등 자신의 위치성에서 비롯한 입장을 무척 진지하게 여기며 논쟁적인 주장을 하는 한편, 비난받아 마땅한 이들에 대해서도 신중한 숙고를 거쳐 적확하고 구체적인 언어로 글을 쓴다. 이것이 그의 글이 미국뿐만 아니라 세계 많은 이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이유가 아닐까 생각한다. 


“나는 내 관점을 공유하거나, 참을 수 없는 것 혹은 끔찍한 것에 반대하거나, 열렬히 믿는 것을 주장할 수 있는 기회를 누려왔다. 나는 그런 기회를 당연하게 여기지 않는다. 예전 같으면 상상만 할 수 있었던 세상, 내게도 목소리가 있으며 그걸 두려움 없이 사용할 수 있고 또 내 목소리가 들린다는 걸 나 스스로 아는 세상에 들어서게 된 것이다.”_『아무도 우리를 구해주지 않는다』 18쪽


『아무도 우리를 구해주지 않는다』는 일곱 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스스로가 주변부의 존재로서 차별과 혐오에 맞서온 만큼 이 책의 첫번째 장을 이루는 정체성 정치는 그에게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주제로 보인다. 하지만 미국에서 보수는 물론이고 진보 진영에서도 정체성 정치의 정치적 힘을 축소하려는 움직임이 거센데, 게이는 그러한 흐름을 간과하지 않고 자기 정체성을 인식하고 끌어안는 사람이 더 너른 공동체의 일원이 될 수 있다는 신념을 담아 정체성 정치의 가능성을 10편의 글로 보여준다. 또, 그가 천착한 주제 중에는 미국의 분열된 정치 환경을 빼놓을 수 없다. 오늘날 정치는 신념과 이념이 다른 사람을 비난하고 심지어 탄압하는 사람들로 인해 손쓸 수 없이 망가지고 있고, 미국뿐만 아니라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시스템으로 굴러가는 국가라면 모두가 이 문제에 봉착해 있다. 또한 여전히 숙고보다는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정치 상황에서 사회적, 경제적으로 소외된 이들의 고난은 점점 더 심해지고 있다. 이 책에 실린 글에서 록산 게이는 나쁜 정치인에 대해서도 신랄하게 비판하지만, 비극과 폭력을 스펙터클로 소비하는 유권자에게도 마찬가지로 일침을 가한다. 트럼프를 조롱하는 데, 그의 잘못을 가십처럼 소비하는 데 몰두하는 것보다 끝내 절망에 굴복할 수는 없다는 마음, 더 나은 정치인을 뽑을 수 있다는 가능성, 우리 손으로 바꿀 수 있는 작은 행동을 할 것을 강하게 주장한다. 


“스스로를 속여선 안 된다. 불만스럽다는 식의 고결함을 내세우며 당신의 정치적 입장을 가리지 마라. 두 눈을 똑똑히 뜨고 권력을 가진 자들부터 간 커진 추종자들까지 난 쭉 뻗은 길을 보라. 투표할 때 두 가지 악을 놓고 차악을 택하는 거라고 믿는 건 냉소다. (…) 뭔가를 하라. 뭐라도 하라.” _『아무도 우리를 구해주지 않는다』 102~103쪽


2016년에 이어 2024년 트럼프가 대선에서 이긴 상황에서 미국 시민은 물론 진보의 가치를 믿는 세계의 많은 이들이 정치에 대한 환멸과 좌절감을 느끼고 있다. 록산 게이는 자신의 블로그 <The Audacity>에 투표 당일과 투표 후에 긴 글을 썼고, 뉴욕타임스에도 칼럼을 썼는데, 이 책에서도 내내 견지한 태도를 보여준다. 그것은, 우리는 외부의 변화, 단번에 주어지는 해결책으로 이 복잡하고 진창인 세계에서 빠져나오기를 기대해서는 안 되며, 다른 사람의 불행을 담보로 자신의 안전을 보장받으려는 이기심도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아무도 우리를 구해주지 않는다”라는 이 책의 제목은 록산 게이가 66편의 글을 통해 말하고자 했던 것, 우리에게도 목소리가 있다는 사실, 그걸 두려움 없이 사용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자신의 위치에서 자신만의 의견을 벼려야 한다는 요청을 전하고 있는 듯하다. 


아무도 우리를 구해주지 않지만 “우리는 스스로를 구할 수 있으며 구해낼”(114쪽) 수 있다. 정당하게 분노하고 끊임없이 항의함으로써 말이다. 늘 자신의 발언으로 사회에 책임지고자 노력하는 믿음직한 작가 록산 게이. 번역된 그의 책을 모두 읽었고, 각각의 장점이 모두 묵직하게 다가온다. 


『아무도 우리를 구해주지 않는다』는 지금, “책임감 있는 의견 쓰기란 무엇인가 묻는 이들에게” 건네고 싶은 책이다. 



“분노는 본질적으로 나쁜 게 아니다. 대부분의 경우 분노는 지극히 정상적인, 심지어 건강한 인간 감정이다. 분노를 통해 우리는 불만을 표현할 수 있다. 뭔가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혁명을 일으킬 만한 유용한 분노, 그리고 우리를 무너뜨릴 수도 있는 무용한 분노의 차이를 아는 것이다.”_『아무도 우리를 구해주지 않는다』  8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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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차 안의 낯선 자들 버티고 시리즈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지음, 홍성영 옮김 / 오픈하우스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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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이라는 심리가 어떻게 어떻게 자신의 신념과 소망과는 정반대인 행동을 하도록 몰아가는지를 설득력 있게 보여주는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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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자리는 어디입니까 - 페미니즘이 계급에 대해 말할 때
벨 훅스 지음, 이경아 옮김, 권김현영 해제 / 문학동네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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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경제적 자유’라는 말이 자주 들린다. 여기서 자유는 세속적인 조건에서 초탈하는 것이 아니라 돈 걱정을 하지 않을 만큼 돈이 많아서 그것에 얽매이지 않는 상태를 뜻한다. 자본가가 잠도 아끼며 노동자를 착취하는 여러 방법을 궁리한 결과로 발전한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경제적 자유’를 얻는 일은 당연히 단순하지 않다. 하지만 돈이 ‘자동으로 들어오는 구조’를 만들면 돈 벌 시간에 더 즐거운 일, 더 생산적인 일을 할 수 있다고 유혹하는 광고들은 실제로 IT 업종의 사람들이 파이어족이 되고, 유튜버가 부자가 되는 현실 속에서 자본도 생산수단도 없는 사람들을 혹하게 만드는 효과적인 장사 미끼가 된다.


과거 미국의 아메리칸드림이나 기업가정신처럼, 끊임없이 만들어지는 새로운 자기계발 담론이 계급의식을 지우고 있다. 고대로부터 가난한 자와 연대하는 사람은 있어왔고 복지국가의 출현이 무임승차 담론을 일찍이 형성했지만, 현대에 와서는 혐오가 더욱 가시화되고 있다. ‘가난은 질병이다’라는 말이 유명 투자 전문가의 입에서 버젓이 흘러나오고, 자수성가 한 이가 착한 척 그만하고 ‘악인이 돼라’고 말하는 책이 베스트셀러 상위에 올라온다. 부유하지 않은 사람들, 어떻게 해서든 사다리를 올라타고자 하는 사람들을 타깃으로 하는 자기계발 담론, 투자 담론을 재생산하는 이들은 사람들의 불안을 이용해 돈을 번다.



평소에 느낀 이러한 불편한 감정, 혹은 분노가 『당신의 자리는 어디입니까』를 집어들게 했다. 이 책은 페미니즘 이론가인 벨 훅스가 2000년에 출간한 책 <Where we stand>의 한국어판으로, 2008년에 ‘벨 훅스 계급에 대해 말하지 않기’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가 출판사를 바꿔 다시 나왔다. ‘우리가 서 있는 곳’에서 ‘당신의 자리는 어디입니까?’라는 질문형 문장으로 제목을 바꾸었을 때, 독자에게 끌어내고자 하는 반응은 무엇이었을까? 여기서 ‘자리’는 어떤 것을 할 수 있고 할 수 없는지를 가르는 사회 내의 자리, 즉 계급이다. 그리고 이 계급은 자본가와 노동자라는 구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행동과 기본적인 전제, 행동거지에 관해 배운 것, 자신과 남에게 기대하는 것, 미래에 대한 생각, 문제를 이해하고 해결하는 방식, 생각하고 느끼는 방식 등 온갖 것과 관련”(192)되는 것이라는 리타 메이 브라운의 설명을 빌려, 계급 문제에 더욱 섬세하게 접근해야 한다고 벨 훅스는 말한다.


벨 훅스는 그 자신이 계급적 배경의 급격한 변화를 겪은 이로서, 1950년대 미국 켄터키주의 흑인 격리 지역에서 태어나 “한 사람이 벌어오는 노동 소득으로 아이 일곱, 어른 둘이 생활하는 대가족의 일원”으로 자랐고, 지역의 여자대학에 진학했다가 뛰어난 학업 능력 덕분에 캘리포니아주의 스탠퍼드대학교에 입학한다. 스탠퍼드대학교는 설립 때부터 “평등주의와 공동체주의”의 가치를 중요시했던 곳이었기에 벨 훅스는 이상적인 대학생활을 꿈꿨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노동계급 사람들의 삶에 대해 전혀 알려고 하지 않는” 동급생들, 노동계급을 무시하는 “부르주아 흑인 엘리트”들을 보며 혼란을 겪는다. 결국 대학생활을 견디게 해준 건 자신이 소중히 여긴 정신적 유산, “근면과 정직, 출신에 얽매이지 않고 모두를 존중하는 마음”을 끊임없이 생각하며 “내가 어디에 서 있는지 내 위치를 다시 살펴”보는 일, 즉 계급 의식을 갖는 것이었다고 회상한다(77).



자기 고백적 서사를 따라 나의 이야기를 잠깐 해보자면, 나는 울산에서 나고 자라 대학을 계기로 서울로 상경해 이곳에 살고 있다. 학창시절을 돌이켜보면 서로의 집안 사정은 잘 모르고 지냈다. 거대 공업도시이기에 많은 아버지들이 공장에서 일한 까닭도 있다. 나의 아버지도 공장 노동자였지만 현대자동차를 다니지 않았다는 것, 2000년 이후로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면서 그곳으로 이사하는 이웃이 생가기면서 동네 안에서도 계급이 나뉘는 광경을 목격하긴 했지만 계급 격차에 대한 기억이 그리 많지 않다. 계기는 대학교에서였다. 1학년 때는 그저 성인으로서 만끽하는 대학생활에 취해 어느 누구 할 것없이 모두 어울려 놀았지만 점차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차이들을 느꼈고, 미대라는 조건 때문인지 학회, 사회운동단체, 중앙 동아리 같은 것을 찾아볼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바쁘게, 하지만 공허한 상태로 서둘러 학부를 마쳤다. 이때의 시간은 감정적으로도 응어리를 남겼다. 당시 고등 교육을 받지 못한 부모님, 노동계급의 아버지를 부끄러워했고, 계급적 성장을 꿈꿨으며, 그 성공을 과시할 수 있기를 바랐다. 하지만 학부를 졸업하고 내가 나름의 역할을 할 곳을 기웃거리면서 깨달았다. 나는 그러기엔 계급적 배경이 다른 데다가 사회적 성공에 대한 욕망, 부에 대한 열망이 크지가 않다는 걸.


이후 대학원에서 공부를 하고, 소비주의에 관심이 있던 나는 잠시 들불같이 일어난 페미니즘 이슈에 흥분한 한편, 내가 운동에 몸담는다면 빈곤운동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대학교 때부터 막연히 가난한 사람을 멸시하는 태도가, 부를 과시하는 세상이 거북스러웠다. 더욱이 이렇게 양극화가 심해지는 서울에서의 경험 때문에 그러한 부대낌은 더 심해졌다. 2005년 청계천 노동자의 내몰림, 2009년 용산참사, 2011년 포이동 화재, 2014년 송파구의 세 모녀의 비극적인 죽음 이후 이어진 생활고로 인한 자살 등, 내가 서울에서 살면서 보고 들은 안타까운 죽음들에는 가난이 있었다. 부끄럽게도 나는 한두번 연대 장소에 가거나 정기 후원금으로 운동단체에 마음을 보태는 일에 그쳤지만, 정말 근본적인 변화는 빈곤운동, 계급운동으로 가능하다고 보았다. 물론 무엇이 먼저이고 무엇이 나중일 수는 없지만 벨 훅스의 말처럼 “이상을 꿈꾸는 운동이라면 무엇보다 노동계급과 빈곤층 여자들이 처한 구체적인 조건에 뿌리를 두어야 한다”(202)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러한 믿음이 무색하게 점점 더 부자를 선망하는 사람들, 그런 욕망을 부추기는 미디어가 도처에 있다. “다양한 계급 특권을 가진 사람이 자신보다 다른 사람이 더 많이 가졌으므로 자신은 가난하다는 투로 말하는 소리”가 온갖 매체를 통해 들리고 “계급 특권이 없는 사람들은 부자와 동일한 물건을 소비함으로써 부유하고 권력을 가진 사람과 동등한 지위를 차지하리라 믿기 때문에 부자들의 계급적 이해관계에 동조하면서 스스로 착취 대상으로 전락”(144)하는 상황이 반복되고 있다. 갈수록 “사람들은 어떤 식으로든 물질적으로 부족한 상황이 각 개인의 책임이라고 믿게 되었”고, “계급 배경에 상관없이 각자 자신의 경제적 번영을 좇으라고 권하는 요즘 같은 시기에 가난한 사람과 연대하기란 쉽지 않”게 되었다.(93)


현재 한국의 정치적 상황을 보면 더욱 암담하다. 임금 체불에 대한 노동계급의 시위와 장애인 이동권 시위에 대해 경제 활동을 방해한다느니, 시민들의 발목을 잡는다라는 식으로 말하는 정치인들의 말은 사회에 던지는 강력한 시그널이다.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노동자들의 처지와 시설에 갇히거나 목숨을 걸고 이동해야 하는 장애인을 무시하고 고립시켜도 된다는 메시지를 준다. 이런 상황에서 “가난한 이들에 관한 관심 부족은 무엇보다 좌파가 이런 현실을 무시한 채 권력자의 비리만 신경쓸 때 더욱 심해진다”(94)는 벨 훅스의 진단은 지금 한국의 상황과 꼭 들어맞는다. 그나마 진보적인 의제, 사회적인 약자에게 집중하던 정당들은 거대 양당의 싸움에 밀려 점점 영향력을 잃어 정당의 기능을 거의 하지 못하고 있다. 오늘날 권력과 부를 가진 사람들은 “가난을 만들어내는 조건을 없애려고 애쓰지 않는다.”(235) 그러기는커녕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 계급을 공고화하는 제도들을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국민의 권리라는 이름으로 끊임없이 만들고 있다.



『당신의 자리는 어디입니까』를 읽으며 자본가-노동자, 금수저-흙수저, 건물주-임차인 등 범람하는 이분법적 언어들을 넘어서 더 많은 위치를 포함하는 계급의식을 생각했다. 벨 훅스가 에세이의 형식으로 성장 배경, 라이프스타일, 인종, 페미니즘 내 차이, 절대적 빈곤층과의 관계, 부동산의 소유 문제와 자신이 어떻게 얽혀 있는지 이야기했듯이, 우리 역시 자신이 가진 모든 특권을 돌아봐야 하고, 또 자신이 지향하는 가치를 점검해야 한다. 고등교육을 받은, 어쩌면 특권층에 속하는 교수이지만 스스로 흑인, 페미니스트, 노동계급 출신, 여성으로서 그 어떤 조건도 놓치지 않고 계급에 대한 담론을 만들고자 했다는 점에서 이 책은 가치가 있다. 우리는 하나의 자리에 고정되어 있지 않다. 계급 의식은 인종, 성별, 젠더, 교육 수준, 거주 지역 등과 교차하며 서로 다르게 경험된다. “계급은 돈 이상의 것이다. 우리가 이 사실을 이해할 때까지, 우리 삶의 모든 문제가, 특히 빈곤층과 가난한 사람이 겪는 문제가 돈으로 해결될 수 있다는 믿음이 계속해서 약탈적인 지배계급의 이익에 봉사하는 상황에서 권력을 쥐지 않은 그외 우리는 계급을 초월해 의미 있는 변화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수밖에 없다.”(287)


변화에 우선되어야 할 것은 나의 자리를 인지하고 그 안에서 할 수 있는 것들을 끌어안는 일이다. 계급, 여성, 장애, 젠더, 가족, 인종, 모든 것이 우리 안에 사회와의 연결고리로서 내포되어 있다. 계급의 사다리에 올라타 있는 듯 여겨지더라도, 계급에서 초월한 평화로운 상태에 있다고 믿는 사람이라도, “이 사회는 결코 계급 없는 사회가 아니”(22)며 “다양한 계급을 넘나드는 일이 불가능하지는 않아도 무척 어렵다”는 현실을 자각해야 할 것이다. 그러한 현실 인식이 선행되어야 나의 자리를 생각하고, 이 사회를 변화시킬 방법을 실질적으로 모색해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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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면 아래
이주란 지음 / 문학동네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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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소설은 '해인'을 중심으로 펼쳐진다. 해인은 서울 근교(로 추정되는) 지역, 젊은 사람이 많이 살지 않는 동네의 중고물품 가게 '해동중고'에서 일한다. 초중고를 같이 다닌 우경과 해인은 서로의 집에서 밥을 먹기도 하고 해인의 엄마와 함께 시간을 보내기도 하고, 밤 산책을 하고, 어디 멀리 다녀온 날에는 서로 마중을 나오는 다정한 연인 사이다. 해인의 주변에는 해동중고의 단골인 장미와, 어느 모임에서 만나 인연을 이어오고 있은 유진씨, 초등학교 동창이자 우경과의 결혼식에서 사회를 맡기도 한 성규가 있다. 또, 해동중고의 사장님과, 알바생, 가게 옆 공터에 자주 오는, 할머니 할아버지와 함께 사는 환희, 엄마와 친해 이모라고 부르는 이웃도 있다. 이러한 인물들과 해인의 만남과 대화가 드문드문 이어지는 가운데 훌쩍 일 년이 지난다.  아직 눈이 내리는 3월에 시작해 그해 연말에 끝이 나는 소설. 그 안엔 별다른 사건이랄 것도 없다. 길지 않은 대화도, 평화롭게 흘러간다.


“우경이 더없이 좋다고 느낄 때마다 왜인지 그날의 우경이 천천히 떠오르곤 한다.

우리는 누구도 그날 일에 대한 이야기를 다시 꺼낸 적이 없다.”(51)


하지만 이 소설은 커다란 사건을 수면 아래 깔고 있다. 해인과 우경은 “베트남에서 그애를 잃고 한국으로 돌아와 모든 일상을 잃어버렸을 때”(60) 한 번 이별을 했었다. 하지만 우연히 둘이 자주 갔던 미용실에서 만난 후 다시 가까이에서 서로 챙기는 사이로 지내고 있다. 이들이 베트남에서 무슨 일을 하며 살았는지 그날 정확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이 소설 안에서는 알 수 없다. 독자로서는 자식을 잃었나보다 생각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잃었다는 ‘그애’가 어린 아이인지, 유산을 한 것일지, 어쩌면 정말 오랜 시간 함께했던 반려동물을 잃어버린 건 아니었을지, 라는 추측도 가능하다.

아무튼 그애를 잃은 그때, 우경의 반응은 해인에게 상처를 남긴 듯하다. 우경이 좋다고 느낄 때마다 왜인지 그날의 우경이 떠오른다. 우경이 실수를 한 걸까, 그것도 모르겠다. 해인은 한국으로 돌아와 일상을 잃을 만큼 크게 아팠다. 그는 그저 이전과 무관한 일을 찾아 중고물품 가게도 흘러들어갔는지도 모르겠다. 해동중고라는 장소는 도무지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던 그에게 버려진 물건을 깨끗히 닦아 필요한 사람에게 준다는 회복의 의미를 넌지시 심어주었는지도.  

이제 둘은 다시 만나 손을 잡고 걷는다. 그날의 이야기는 절대 하지 않은 채. “저절로 되는 것은 없지만 억지도 되는 것도 없더라고요.” 유진씨의 말이다. 아마 해인은 이 말과 모양은 다르지만 뜻은 같은 여러가지 문장을 그동안 숱하게 생각하며 일어난 일과 일어나지 않은 일과 아직 남아 있는 것들 사이에서 일상을 찾아갔겠지.

이렇듯 잔잔한 일상은 우경의 한 마디 말에 파문이 인다. 일 때문에 베트남에 가게 됐고, 같이 가자는 말. 어쩌면 다시 꺼낸 구애의 말일 텐데, 해인은 우경의 제안을 거절한다. 성규가 춘천에 대해 “갈 수 있는데 안 가는 거라고 생각이 들지 않”는 것처럼, 해인은 베트남에 갈 수가 없다. 이 말을 통해 아직 그 아픔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음을 깨닫는다. 평생을 이렇게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 멀쩡히 일을 하다가도 무너져 우는 날이 계속 이어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해인은 이전과 같지 않다. “아무것도 변한 게 없는 것 같으면서도 변해 있었다(176)”는 것을 안다. 이제는 “남들처럼 텔레비전에서 본 방법을 메모해두었다가 장을 보고, 맛은 없지만 몸에 좋다는 주스를 만들어 먹고, 누군가와 복숭아를 따러 가자는 약속을 하면서 일상을 보내고 있.”(83)음을 느낀다. 해인은 이런 일상을 조용히 돌아보며 “혼자서는 어려웠겠지. 정말 어려웠을 것이라고, 어쩌면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83)” 베트남에 다시 갈 만큼은 아니지만 엄마, 유진, 성규, 장미, 환희와 맛있는 것을 챙겨 먹고 웃고 서로의 이야기를 들을 만큼, 조금 ‘모자’라지만 ‘소중’한, 괜찮은 일상을 산다.

이 이야기를 읽으며 아주 가까운 사람의 슬픔을 들었을 때가 생각났다. 나는 이 아픔이 얼마나 클지 가늠도 할 수 없어서, 그냥 술잔을 앞에 두고 잠자코 들었던 기억이 난다. 이후 그 이야기를 자세히 들었을 때도 나에겐 막막한 일인 건 변함이 없었다. 하지만 어느날, 그 사람의 눈에 길게 그림자가 드리운 날에는 누군가를 생각하겠구나, 마음이 아프겠구나, 하고 어렴풋이 생각하며 손이며 등으로 작은 온기를 나누고자 했다. 비슷한 아픔을 겪은 사람들은 서로 더욱 구체적으로 공감할 수 있겠지만, 어떤 슬픔을 안고 있겠거니, 그 감정의 물결이 한동안 잠잠했다가 가끔은 속절없이 세지기도 하겠거니, 내가 보지 않을 때 자기도 모르게 눈물을 툭 하고 떨굴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 그것만으로도 상대방을 조금 더 부드러운 눈으로 바라볼 수 있다. 이 소설 속 인물들은 내 머릿속에서 모두 순한 눈을 가졌다.


“나는 우리가 모르겠다는 말을 너무 많이 해왔구나, 그걸 알게 되었어.

안다고 생각될 때, 더 경계해야 한다는 것도.

너무 두려웠는데 모르겠다고 말하면 두려움이 조금 옅어지곤 했던 것 같아.

그런 채로 살아왔고 이런 채로 살 것 같아.

무언가를 단언하는 게 너무나도 두렵지만.”(195)


우경이 해인에게 보낸 (이 소설에서의) 마지막 메일에서 고백하는 것처럼, 나 역시 “모르겠다는 말을 너무 많이 해왔”다(이 글에서도 그렇다). 어쩌면 나는 이 등장인물이 나처럼 눌변이라, 그리고 감정의 진폭이 크지 않아서 좋았는지도 모른다. 이 소설 역시 소설로서 좋은 것인지, 탁월한 이야기인지 잘 모르겠다. 다만 나는 이들의 담백한 미련을, 모자람을, 말줄임표를, 싱겁게 가서 싱겁게 오는 여행을, 정작 하고 싶은 말은 하지 못하는 메일을 오래 생각했고, 그럴수록 내 마음속에는 찰랑찰랑 감정이 일었다. 한 번 더 수저를 쥐어주고 싶고, 찻잔을 기울이고 싶고, 문자 한 통 더 보내고 싶은 사람들이 생각났다. 그들도 그들만의 감정의 흔들림을 겪고 있겠지. 때로는 외롭겠지, 하고.

혼자서는 일상이 성립되지 않는데, 우리는 홀로 너무 오롯이 충만하려고 분투해온 것은 아닐까? 이 기회를 놓쳐도 괜찮아요, 자기 걱정을 하는 건 나쁘지 않아요, 이별을 했어도 결국엔 괜찮아요, 라고 담담하고 다정한 말을 주고받는 이 책의 사람들처럼 고요한 눈과 귀와 입을 가진 이들에게, 내게 모두 말해주지 않아도 좋지만 그래도 내가 언제든 들어줄 수 있다는 작은 사인을 보내고 싶다. 그저 괜찮다는 말을 서로 주고받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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