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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주의, 자본주의의 최고 단계 (양장) ㅣ 레닌 전집 63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 지음, 이정인 옮김 / 아고라 / 2017년 10월
평점 :
<제국주의, 자본주의의 최고단계>감상: 제국주의와 계급협조
사고 나서 묵혀둔 <제국주의, 자본주의의 최고단계>를 최근 완독했다. 나의 뒤엉킨 감상이 신기하게도 ‘옮긴이 후기’에 깔끔하게 정리 된 걸 보니 괜히 더 왈가불가하는 것 같지만, 그래도 레닌전집에서 그간 받은 호의에 보답하는 마음에 몇 자 써본다. 이렇게 말해도 결국은 레닌 핑계로 하고 싶은 말만 늘어놓는 샘이지만.
5년 전, 출판사는 다르지만 레닌의 이 책을 읽었을 때는 소위 ‘제국주의’의 다섯 가지 표지를 머릿속에 넣는데 급급했다. 당시에는 이 다섯 가지만 외우면 뭔가 ‘제국주의’에 대해 다 알 것만 같은 착각에 빠졌다. 참 괘씸했다. 레닌이라는 거인을 발판으로 날로 먹을 심산이었다. 그 부작용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스스로 ‘반제주의자’를 자처하면서 오늘날 제국주의에 대해선 별반 할 말이 없는 것이다.
나의 이런 지적게으름과 달리 레닌의 이 책은 꼼꼼함으로, 속된 말로 팩트로 가득한 책이다. 제국주의적 본질, 제국주의적 구조 따위의 선언은 편하다. 그에 비해 이 본질과 구조를 설득시키는 경험적 연구는 피곤한 법이다. 그래서 책에서 가장 뇌리에 박힌 부분은 서문 전에 “인쇄용지 50더미에 달하는 이 기록에는 148종의 책과 223편의 논문에서 발췌한 내용이 담겼다.”라는 ‘편집자 주’이다. 레닌은 수많은 부르주아(주류) 학자, 은행가 등의 입을 빌려 제국주의를 논한다. 비록 레닌은 검열을 피하기 위해 ‘노예의 언어’를 썼다며 분개하지만 말이다.
이런 꼼꼼함은 기회주의, 특히 카우츠키를 비판하는데도 빠지지 않는다. 카우츠키는 제국주의를 자본주의의 단계가 아니라 ‘정책’으로 바라본다. 레닌은 카를 리프크네히트(독일 사민당 좌파)의 입을 빌려 이를 비판한다. 독일과 영국의 갈등은 “기자들의 자극적인 말들 때문에나 외교라는 음악회에서 솜씨 없는 음악가들이 뽐내는 연주”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니다. 두 나라의 긴장은 “고삐 풀린 자본주의 발전과 국제적 경쟁의 직접적 산물”이다. 즉 독점이라는 경제적 상황이 정치에서 식민지 경쟁으로 이어진다.
카우츠키는 제국주의 국가들이 (평화적으로) 단합한 초제국주의라는 전망도 제시하는데 이에 대한 반박은 레닌의 다음 한마디면 충분할 것 같다. “순수하게 경제적인 관점에서 초제국주의는 가능한 것일까, 초허튼 소리에 불과한 것일까?” 레닌은 초제국주의란 단지 “국제적으로 연합한 금융자본이 세계를 공동으로 착취”하는 단계라고 일축한다.
주장 하나하나의 문제보다 주요한 것은 카우츠키가 제국주의와의 화해를 이야기하고 있다는 점이다. 카우츠키는 이집트 예시를 들며, 제국주의적 폭력적 방법보다 평화적인 자유경쟁이 더욱 이익이 된다고 강변한다. 레닌은 이를 아래와 같이 비판한다.
“현존하는 모순들을 철저하게 폭로하는 대신 회피하고, 그 모순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들을 잊어버리는 것―이것이 바로 마르크스주의와 아무 공통점이 없는 카우츠키의 이론이다.” (153p)
“카우츠키의 선한 의도가 무엇이든 간에 그의 ‘이론’이 지닌 객관적인, 즉 현실적인 사회적 의미는 단 하나밖에 없다. 대중의 관심을 현 시대의 첨예한 모순들과 첨예한 문제들로부터 돌려 뭔가 새로운 것처럼 보이는 미래의 ‘초제국주의’라는 거짓 전망으로 향하게 함으로써 대중에게 자본주의 아래에서도 영구적인 평화가 가능하다는 희망으로 가장 반동적인 위안을 주는 것. 카우츠키의 ‘마르크스주의’ 이론에 있는 것은 오직 대중에 대한 기만뿐이다.” (196p)
카우츠키는 계속 두드려 맞는다. 그래도 맞을 만 한 것이 카우츠키의 논리는 제국주의자들의 노골적인 논리와 본질적으로 같은 ‘정치적 입장’으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노동계급이 혁명을 거부하고, 계급투쟁이 아닌 계급화해를 택하는 것이다. 카우츠키의 복잡한 말장난과 달리 당시 제국주의자들은 이를 명확하게 인지한 것으로 보인다.
영국의 아프리카 분할에 앞장선 정치가 세실 로즈는 이렇게 말했다. “제국이란 빵과 버터의 문제라네. 내란이 일어나길 바라는 게 아니라면 여러분은 제국주의자가 될 수밖에 없다는 거야.” 여기서 내란이란 곧 계급투쟁을 말한다는 것은 자명하다. 어느 프랑스 부르주아 저술가는 한술 더 뜬다. “어떤 일정한 계급적 궤도에서 뿜어져 나오는 에너지는 탈출구를 찾아야만 한다. 국내에서 폭발하지 않도록, 그 에너지가 해외로 발산되도록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아마 계급적 불만을 완화하는데 지역주의, 인종차별, 여성혐오 그리고 반공주의도 유용할 것이라 생각든다.
레닌의 표현처럼 두 제국주의자는 보다 ‘정직한 사회배외주의자’다. 국내 계급모순을 피하기 위해, 혁명을 예방하기 위해, 계급적 불만을 우회하기 위해 제국주의는 필요하다. 혁명을 거부한다면 필연적으로 제국주의자가 될 수밖에 없다. 카우츠키처럼 말이다. 자본주의 발전기 때 자본과 노동의 화해를 말하듯이 제국주의 팽창기 때 ‘초제국주의’같은 화해를 말하는 것, 이것이 계급협조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카우츠키와 같은 태도는 과연 한 세기 전 이야기에 불과한가? 아니면 오늘날에도 진행되고 있는 현실인가? 오늘날의 제국주의가 어떠한지 말하기보단 트럼프의 괴벽이나 중국의 무례함 따위에 주목하는 언론은 어떠한가? 중동에서 동북아에서 진행되는 사태를 폭로하기를 외면하고, 기껏해야 ‘평화’라는 구호를 외치는 것은 어떠한가? 100년 전 카우츠키의 ‘평화’구호가 전쟁을 막기는커녕 오히려 제국주의를 부추겼다는 사실을 우린 잊으면 안 된다.
적다보니 카우츠키에 관한 말이 길어졌다. 이 외에도 100년 전 제국주의 모습에서 인상 깊었던 부분들을 인용하는 것으로 이만 말을 줄이겠다.
“차관의 일부를 채권국의 생산물, 특히 군수품, 선박 등을 구입하는 데 지출하는 것을 차관 조건으로 삼는 것이 가장 일반적인 관행이다. 프랑스는 최근 20년간(1890~1910년) 아주 빈전하게 이 수단에 호소했다. 이처럼 자본수출은 상품수출을 촉진하는 수단으로 활용된다.”(106p)
“브라질 철도 건설은 대부분 프랑스, 벨기에, 영국, 독일의 자본으로 시행되고 있다. 이 나라들은 철도 건설과 관련된 금융거래를 통해 건설자재 공급권이 자기 나라에 주어지도록 하고 있다.”(108p)
“은행들은 가장 절박하게 자금이 필요한 기업들로부터 도움의 손길을 거두었다. 처음에는 거짓말 같은 호경기를 조성했던 은행들은 다음 순간, 자신들과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지 않은 회사들을 절망적인 파멸로 몰아갔다.”(111p)
“독일에서 전매는 소비자에게 이익을 갖다 준다든가, 또는 국가에 기업자 이득을 일부라도 전해주든가 하는 목적을 가진 것도, 그런 결과를 가져왔던 것도 결코 아니었고, 그것은, 파산에 처한 사적 기업을 국가의 부담으로 구제하는 데 기여했을 뿐이었다.” (118p)
“이 민족자주 운동은 유럽자본의 가장 가치 있고 가장 유망한 착취 지역에서 유럽 자본을 위협하게 되며, 유럽 자본은 권력수단을 끊임없이 확대하는 것에 의해서만 지배를 유지할 수 있게 된다.”(202p)
읽으면서 어느 특정 ‘국가’가 연상됐다면 그건 내 문제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