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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어 라이프 (양장)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13
앨리스 먼로 지음, 정연희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2월
평점 :
품절
먼로를 알게 되어 맹렬히 읽기 시작한 때를 떠올려본다. 처음에는 팟캐스트를 통해서였고, 얼마 안 가 노벨 문학상 수상 소식을 접하게 되었더랬다. 나는 국내에 번역되어 소개된 먼로의 책을 다 구입해 읽었다. 무엇보다 평소에 장편보다는 밀도 높은 단편을 선호하여 읽어왔는데, 먼로는 거의 단편만을 써온 작가여서 더욱 각별했다. 먼로의 3인칭 시점은 완벽했고, 시간 처리 기법은 눈여겨볼만한 것이었으며, 제일 좋았던 점은 먼로만의 균형 감각이었다. 먼로의 작가적 시선은 만물에 차별 없이 내려앉는 햇빛처럼 공평하고, 이제는 그녀의 나이만큼이나 성숙하며 기품이 넘친다. 그녀가 그려내는 절름발이 여인(「코리)」이나 언청이로 태어난 남자(「자존심」)나 파혼당한 여자(「아문센」, 「기차」), 어렸을 때 아버지에게서 성(性)적 트라우마를 겪은 여인(「기차」) 같은 인물을 보면 알 수 있을 테다. 그녀의 인물들은 좀처럼, 추한 고통의 제스처를 취하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정말이지 그런 인물들을 대하면서 얼굴이 붉어졌다. 부끄럽게도 나는 나의 고통을 내세워 상대를 곤란하게 만들고 조종하려 한 적이 있었으니까. 봉합되어 감춰진 줄로만 알았던 나의 어리석음이 마구 터져나오는 것 같았다.
이 소설집에는 특별히 먼로의 자전적인 이야기들이 수록되어 있어 먼로의 인생을 조금 엿볼 수도 있다. 그 시대 캐나다의 평범한 시골 여자들처럼 농장에서 태어났지만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으려는 삶을 살았던, 그래서 주위 사람들과 자신 사이에 ‘작은 공간’이 절로 생겨났을 것으로 짐작되는 먼로의 어머니. 그러나 사십대에 파킨슨병이 발작한 어머니. 설상가상 아버지의 농장 사업도 사양길로 접어들어 아버지는 주물공장에서 일해야 했다. 그 시기에 대해 먼로는 이렇게 서술한다.
“너무하다고 생각될지 모른다. 사업은 망했고 어머니는 건강을 잃어갔다. 소설에서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나는 그때를 불행한 시기로 기억하지 않는다. 집에 딱히 절망적인 분위기가 감돌지는 않았다. 아마 그때는 어머니가 호전되지 않고 더 나빠지기만 할 거라는 사실을 몰랐던 것 같다. 아버지는 아직 기력이 있었고 앞으로도 한참 동안은 그럴 것 같았다. 아버지는 주물공장에서 함께 일하는 남자들을 좋아했는데, 그들도 대부분 아버지처럼 침체기를 경험하거나 더 많은 삶의 짐을 떠안게 된 사람들이었다. (405쪽, 앨리스 먼로, 「디어 라이프」)”
소설 속 인물에게나 소설 속 인물이 된 자신에게나 자기연민 같은 감정은 절대 보이지 않는 먼로. 작품마다 먼로 식의 ‘냉정하다고 느껴지리만치 공정하고 강인한’ 시선이 존재하는 것은 먼로의 삶과도 무관하지 않겠지, 하고 나는 당연한 사실을 매우 당연하게 확인하는 기분이었다고 할까.
“이 세상에 무서워할 건 없어. 자기만 조심하면 돼. (341쪽, 앨리스 먼로, 「시선」)”
“사람들은 말한다. 어떤 일들은 용서받을 수 없다고, 혹은 우리 자신을 결코 용서할 수 없다고. 하지만 우리는 용서한다. 언제나 그런다. (416쪽, 앨리스 먼로, 「디어 라이프」)”
이런 문장들을 읽을 때에는 과연 “먼로의 작품을 읽으면 전에는 미처 알지 못했던 무언가를 반드시 깨닫게 된다(맨부커 인터내셔널 상 선정 이유).”라고 말한 찬사에 깊이 동감할 수밖에 없으리라. 한마디로, 어느덧 여든을 넘은 노(老)작가의 통찰력이 구석구석 빛나지 않는 데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