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에 집착하는 많은 사람들이 그러겠지만 내가 책을 사는 이유가 읽기 위해서인지 쌓아두기 위해서인지 알 수가 없다. 신권들이 한 권 두 권 밀리는 마당에 기다리던 황정은 작가의 소설집이 나왔고 샀고 쌓여있는 책들에게 살짝 미안했지만 바로 읽었다. 

  내가 이 책을 기다린 이유는 이 책에 '상류엔 맹금류'가 실려 있기 때문이다. 2014 젊은작가 수상작품집에도 실렸던 이 소설은 신형철이 극찬한 소설로 2013의 최고의 소설이라고 했다는데(알라딘 책 설명에도 나와있다.) 2013년에 내가 모든 단편 소설을 읽은 것은 아니지만 비슷하게 생각했고 그 근처에 읽었던 소설 중에 가장 좋았다. 물론 이전에도 황정은 소설을 좋아했지만 '상류엔 맹금류'이후로 황정은은 "믿고 보는 황정은"이 됐다고 해야할까.


  황정은 작가는 자신의 소설집에 작가 소개랑 해설을 빼고 싶다고 했었던 것 같다. 과연 그 바람이 어느 정도 이뤄졌는지 이 책에는 작가 소개가 없고(물론 한국 소설에 어느 정도 관심 있는 사람에게 그녀의 이름은 더이상 설명할 필요가 없는 이름이 되버렸다.) 해설도 없다. 표지색도 무채색이다. 제멋대로의 상상이지만 사진과 뒷부분의 본문 인용도 뺴고 싶어하지 않았을까? 


  책의 물성도 그렇고 문체도 그렇고 "아무도 아닌"이라는 제목과 관련해서도 그렇고 건조하다. 고통이 존재하지만 그 고통을 삼키는, 고통에 대해 말하고 싶지만 말하지 않는 장면이 자주 등장하는 것 같다. 참는 게 아니라 아무도 아니고 아무 것도 아니게 취급당하기 때문에 할 수 없는 것에 가깝다. 소설 속의 사람들이 외롭게, 간신히 살아가는 것을 보면 마음이 서늘해진다. 


  "파씨의 입문"도 읽었기 때문에 '웃는 남자'를 봤을 때는 마음이 아팠다.(스포일러가 될까봐 자세한 언급은 참는다...나만 놀랄 수 없다.. 물론 미리 읽은 사람들도 있겠지만..) '디디의 우산'을 떠올리면 "아무도 아닌"의 세계는 더 고통스러워졌다. 그런데 내가 본 황정은의 소설들 중에서 "아무도 아닌"을 보고 가장 많이 웃었다. 말장난 같은 것도 많았고 부조리와 아이러니에 기반한 웃음이라고 해야하나.. 이런 식이다. 다음은 백화점 판매원인 화자가 매장 매니저에게 듣는 말과 그에 대한 반응이다. 


게다가 자기야, 나는 무시당하는 쪽도 나쁘다고 생각해. 자존감을 가지고 자신을 귀하게 여겨야지. 존귀한 사람은 아무에게도 무시당하지 않는다. 스스로를 귀하게 여길 줄 모르는 사람이나 진정으로 당하는 거야 무시를

(중략)


자존, 존귀, 귀하다는 것은, 존, 존나 귀하다는 의미입니까.('복경' 202)


  황정은의 소설을 처음 본다는 사람에게 "백의 그림자"를 입문작으로 추천했었는데 이제는 "아무도 아닌"을 추천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나저나 언어학 전공하는 연구자들이 황정은 작가의 문체 좀 분석해줬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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