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짝반짝 변주곡
황경신 지음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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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오랜 시간이 흐른 후 우리가 서로의 시간을 더듬어볼 때, 우리가 새긴 마음은 이미 지워지고 사라졌을 것이다. 지워지고 사라진 흔적이 증명하는 것은, 우리의 사랑이 그토록 살아 퍼덕이는 생명이었다는 것, 그래서 바람에 쓸리고 비에 무너지지 않을 수 없었다는 단 하나의 진실이리라. -p, 19

 

 

사랑이 언제 끝났느냐는 질문에 대해, 남자는 쓸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같은 질문에 대해, 여자는 살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글쎄요, 이미 잊었어요.

 

해야 할 일도 지켜야 할 약속도 없어 이른 귀가를 한 날, 서둘러 찾아든 겨울 저녁, 혼자 밥을 지어 먹고 남자는 오랜만에 그 기억을 호출해본다. 자신의 눈 속에 비치던 그녀의 눈빛을, 자신의 손바닥 안에 남은 그녀의 온기를, 자신의 어깨에 가만히 기대오던 그녀의 설렘을, 자신의 보조에 맞춰 종종걸음으로 따라오던 그녀의 미래를, 두 사람이 함께 걸어갔던 길을, 함께 나누었던 밤을, 함께 들었던 노래를, 그리고 함께할 수 없었던 많은 것들을. 기억의 폭포가 쏟아져 내리고, 남자는 멍한 눈으로 오래 허공을 응시한다.

 

혼자 먹을 밥을 짓기 싫어서 편의점에 들러 우유와 몇 알의 귤을 사 들고 들어온 날, 여자는 문득 그때 그가 했던 그 말을 떠올려본다. 그러나 그것이 그녀의 일상을 멈추게 하지는 못한다. 남자를 떠올리는 건 그와 헤어진 그녀에게 새로 생긴 습관이었고, 그녀는 이미 그 습관에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오늘은 조금 울어도 괜찮겠다고 남자는 생각한다. 여느 때처럼 그냥 웃어버리자고 여자는 생각한다. 남자에겐 사랑이 쉬웠고 이별이 어려웠다. 여자에겐 사랑이 어려웠고 이별이 쉬웠다. 어쩌면 그 반대인지도 모른다. 어찌 되었거나, 우리는 그렇게 달랐다. 함께 사랑을 했다고 믿었지만, 시작은 달랐고 마지막도 그렇게나 달랐다. -p, 62, 63

 

 

"마리, 남자가 여자에게, 여자가 남자에게 선물을 잔뜩 안겨주는 이유를 알아?"

마리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건 말이지, 보이지도 않고 잡히지도 않고 만져지지도 않는 사랑 대신, 뭔가 확실한 것을 주고 또 받고 싶기 때문이야. 하지만 눈에 보이고 잡히고 만져지는 물건들은 언젠가 깨지고, 부서지고, 변하고, 사라지지. 네가 기다리는 그 사람이 아직도 돌아오지 않고 있는 이유와 비슷한 거야."

"왜 돌아오지 않는데요?"

마리는 겁에 질려, 여자에게 물었다."

"아마 그는 깨지지 않고, 부서지지 않고, 변하지 않고, 사라지지 않는 무엇인가를 사러 왔을 거야. 이를테면 사랑이 시작되는 곳에서 생겨난다는 무지개 같은 거. 그리고 그 비슷한 것을 샀을지도 몰라. 그런데 불안해졌겠지. 그 사람은 아마 기다렸을 거야. 그 무지개가 진짜 무지개인지, 그래서 영원히 반짝반짝 빛나는 것인지. 어쩌면 몇 번이나 실패를 했을 거야.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것에 신경조차 쓰지 않아. 그저 눈앞에서 빛나는 것이면 무엇이든 사랑이라고 생각하고, 계산을 치른 다음 포장을 해서 들고 가지. 하지만 그 사람은 달랐던 거야. 너에게 진짜 사랑을 줘야 한다고 생각한 거지."

"그랬던 거군요."

마리는 점점 초점을 잃어가는 눈으로 여자를 멍하게 바라보았다.

"그래. 하지만 그런 것을 구하기 위해 십 년째 이곳에 머물고 있는 사람들도 있어. 중간에 밖으로 나가는 사람들은 포기한 이들이지. 게다가 운이 좋게 물건을 구했다고 해도, 그것을 받을 사람이 기다려주고 있다는 보장은 없어." -p, 79, 80

 

 

삶이 계속되는 사람에게 있어 과거란 이미 지나간 일, 즉 종결된 무엇이 아니라 현재와 미래에 적극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생명체와 같은 것이다. 그리하여 그 시간과 기억들은 '기쁨'이나 '슬픔' 같은 한 가지 감정으로 분류되지 못하고 광활한 감정의 바다를 표류하며 엎치락 뒤치락할 수밖에 없다. -p, 103

 

 

다 잊을 필요는 없지만 다 간직할 필요도 없다. 다 버릴 수도 없고 다 가져갈 수도 없다. 살아 있는 한 사람의 삶에서, 소유란 그러한 형편이다. 기쁨이었던 것이 슬픔이 되고, 가벼웠던 것이 무너지고, 높이 날던 것이 내려앉고, 영원할 줄 알았던 것이 문득, 끝이 난다. -p, 104

 

 

그제야 두 사람은 알게 되었다. 멋진 남자를 만난다고 해서 멋진 사랑을 할 수 있는 건 아니라는 사실을. 그들이 찾고 있었던 건 '세상에서 가장 멋진 남자'가 아니라, 그들을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남자였다는 사실을. 하지만 세상의 어떤 남자도, 행복을 베풀어주지만은 않는다는 것을. 아무리 많이 해보아도 그 답을 알 수 없는 것이 연애이며, 한번도 하지 않아도 그 뻔한 답을 짐작할 수 있는 것이 연애라는, 무시무시하고 무의미한 진실을. -p, 125

 

 

당신은 한때 칼날 같은 사랑을 품고 있었다. 사랑 같은 칼날이었는지도 모른다. 당신이 내게 내민 것이 사랑인 줄 알고 품었으나 칼날인 적도 있었고, 칼날인 줄 알고 피했는데 사랑인 적도 있었다.

"네가 그 자리에 그렇게 서 있겠다면, 내가 도망치는 수밖에 없어."

당신은 그렇게 말하고 떠났다. 사랑 같은 칼날이 나를 피해 갔으니 목숨은 건졌다고 현자들은 내게 말했다. 하지만 칼날 같은 사랑이 떠났으니 곧 목숨을 잃을 거라고 그들은 내 뒤에서 수군거렸다. 하루는 살고 하루는 죽은 채로 시간이 흘렀다. 나를 떠난 당신은 어떻게 살고 죽었나.

"정말로 아무것도 안 하는 건 아니야. 시간을 소진하고, 소모하고, 소비하고, 낭비하고, 탕진하고, 그래도 돌아오는 시간을 또 소진하고, 소모하고…… 그것만으로도 모든 에너지를 다 쓰게 돼. 죽을 만큼 힘들다고."

코끼리가 그런 말을 할 때, 사막은 점점 커져갔다. 코끼리가 점점 작아진 것인지도 모른다.

"고래는 다 지나 보냈어? 그 시간들을?"

이상하게 내 목소리가 울먹이는 것 같다고 생각하며, 나는 물었다.

"응. 그리고 무뎌졌지."

"그 사람도 그럴까?"

코끼리는 커다랗고 무겁게, 고개를 꼬았다.

"여태 붙잡고 있을지도 몰라. 사랑 같은 칼날이라거나 칼날 같은 사랑을. 그게 충분히 무뎌지기 전까지는, 아마 돌아오지 않을 거야. 너를 해치게 되면 자기 자신도 해치게 되는 거니까. 그게 사랑이든 칼날이든. 시간만이 그걸 무디게 만들 수 있는 거야." -p, 166, 167

 

 

 나의 하루하루는 소란하고 고요하고, 따뜻하고 외롭고, 불안하고 평화롭게 흘러간다. -p, 189

 

 

내가 가지고 있는 은으로 만든 목걸이는 샤워할 때도, 잘 때도 빼놓고 있어야 한다. 게다가 매일 아침 천으로 닦아주어야 한다. 하지만 난 영원히 변하지 않는 다이아몬드보다, 매일 자신의 존재를 확인시키며 아껴달라고 조르는 은이 좋다. 하루만 물을 갈아주지 않아도 시들어버리는 꽃이라거나 유통기한이 너무나 짧은 모차렐라 치즈, 조금만 오래 놔두면 맛이 변해버리는 와인…… 그리고 쉽게 상처받는, 쉽게 절망하는, 쉽게 눈물 흘리는, 쉽게 행복해지는, 유리로 만든 구슬처럼 불안하고 위험한, 그러나 반짝반짝 빛나는,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바로 지금 이 순간. -p, 195

 

 

그들은 늘 멋진 레스토랑으로 나를 데려가서 근사한 저녁을 사주고 나의 향기를 맡고 싶어 했어. 나에게서는 언제나 달콤한 향기가 났거든. 당연하잖아, 나는 초콜릿이니까 말이야.

 

뭔가 일이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걸 깨닫기까지,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았어. 몇 번의 데이트가 끝나면, 남자들은 모두 나를 떠나버렸지. 이유를 궁금해하는 내게, 친구들이 그들의 소식을 전해주었어. 나의 달콤함과 부드러움에 지친 남자들은 짜거나 맵거나 딱딱하거나 무미건조한 여자들에게로 가버린 거야. 이상하게 난 슬프지도 않았고 화도 나지 않았어. 그저 '그래, 그럴 줄 알았어' 라는 기분? 내 이야기는 이게 끝이야. 아아, 혹시 오해할까 봐 한마디 더 하겠는데, 지금의 내 삶은 그다지 불행하지 않아. 이 세상에는 아직도 달콤하고 부드러운 나를 원하는 사람들이 차고 넘치거든. 그저 누군가에게 한순간의 위로가 될 수 있는 것으로, 그것으로 나는 충분해. 어쩌겠어. 나는 그렇게 태어났고, 이제 와서 그 사실을 바꿀 수도 없으니까. 이런 식으로 행복해지는 수 밖에. -p, 251, 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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