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연의 역사
박주영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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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연’이라 함은, 겪고 싶지 않다고 해서 마음대로 미루거나 피할 수 있는 경험이 아니지요. 단어만 들어도 가슴이 아리지만 생각처럼 나쁜 속성만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닌 듯 싶어요. 사람들은 실연을 경험한 후 더 나은 사람이 되곤 하거든요. (물론 더 망가지는 사람들도 있지만요)

 

 

 

네 덕분에 살도 빠졌다며, 고맙다며.

오죽하면 이런 노래가 있을까요,

 

 

 

 

 

사랑이 흔한 맹세처럼 영원할 수 없다면 실연은 필연적이다. 동시에 사랑에 빠지는 축복을 누구나 누릴 수 없는 것처럼 동시에 이별을 받아들이는 것도 불가능하다. 이 세상 모든 사람의 인생이 어쩌면 그리 특별할 것이 없는지도 모른다. 누구든 목숨을 걸듯 사랑할 수 있고, 누구든 원하지 않는데도 헤어질 수 있으며, 누구든 살면서 한두번 쯤 진짜 죽고 싶었을 것이며, 그럼에도 여전히 살아 있을 것이다. 어떻게 할 수 없는 것들은 그냥 포기해버리거나 미련 없이 돌아서고, 곧 잊어야 한다. 그러나 그럴 수가 없는 일이 있고, 그렇게 되질 않는 사람이 있다. 완전히 잊는다고 할 때 그 완전함이란 영원한 불가능을 뜻하는 것이다. 그런데 영원히 불가능을 받아들이는 것이 가능한 것인가. -p, 211 작가의 말 中

가끔 작품보다 그 작품의 주인인 작가님의 말에 더 큰 공감을 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바로 이번 경우.

사랑은 영원할 수 없고 실연은 필연적이라니, 이 말에 짜증이 솟구쳐 반박하려던 차에 ‘누구든 목숨을 걸듯 사랑할 수 있고, 누구든 원하지 않는데도 헤어질 수 있으며, 누구든 살면서 한두번 쯤 진짜 죽고 싶었을 것이며, 그럼에도 여전히 살아 있을 것이다.’ 라는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작가님을 보며 ‘그래, 그렇지. 어쩜 이렇게 내 맘을 잘 알지.’ 하며 공감하고 있는 이 변화무쌍한 감정을 어찌할까요.

 미안해요 작가님, 난 사실 작가님이 40대 아저씨인 줄 알았어요. 어쩌다 인터뷰한 글을 보게 되었는데 어여쁘신 여자분이신 걸 보고 얼마나 뜨끔 하던지.

이 작품을 통해 독자들이 이별, 실연에 대해 굳이 덤덤해지려고 애써 노력하지 말고 오히려 그런 경험을 통해 자기 자신에게서 사랑을 발견하게 되거나 특정 시기와 실연하는 것 뿐이니 그 자체를 치열하게 겪길 바란다는 작가님의 말씀,

치열하게 해내야 할 게 얼마나 많은데 실연까지 치열하게 겪어야 하나 또 짜증을 낼 뻔 했어요. 아직 제가 어린 탓이겠지요.

 방금 막 실연을 경험 한 사람에게 이 책을 권하게된다면 그 사람이 책을 읽으면서 왈칵 눈물을 쏟아버릴까 겁이나요. 그만큼 피하려고 해도 ‘실연’을 온전히 느껴버리게 되는, 그런 책이에요.

 

 

<나는 아이팟이다 中>

누군가의 속마음을 알려면 자기가 먼저 고백해야 하는 법이다. 언니는 자신의 아이팟은 이미 용량이 꽉 찼다고 했다. 무언가를 넣으려면 무언가를 지워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그 선택을 하는 게 요즘은 어렵다고 했다. 그때 나의 아이팟은 아직 절반도 채워지지 않았다. 그것은 육십 기가와 백육십 기가의 차이일 수도 있고, 삼 년 된 아이팟과 일 년 된 아이팟의 차이일 수도 있고, 언니와 나의 차이일 수도 있었다. -p, 11

셔플로 음악을 듣는다는 건 우연이다. 하지만 그 우연은 내가 선택한 선택지 안에서의 우연이다. 우연히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듣는 것과는 다르다. 내 아이팟에 없는 음악을 아이팟은 나에게 들려줄 수 없다. 우리는 선택하기도 하고 선택하지 않기도 한다. -p, 20

언니는 메러디스의 내레이션을 나에게 외우게 하곤 했다. 나는 언니가 마지막으로 보았을, 그녀의 마지막 이야기를 들었다. “당신은 말한 적 있나요? 사랑한다고, 너 없이는 살고 싶지 않다고, 네가 내 인생을 바꿔놓았다고, 말한 적 있나요? 목표를 정하고 그걸 이루기 위해 노력하세요. 하지만 가끔 하던 일을 멈추고 주위를 둘러보세요. 그리고 기억하세요. 지금 이 순간이 바로 인생이란 것을. 이 순간은 다시 오지 않는다는 것을.” -p, 29

<칼처럼 꽃처럼 中>

결과적으로 그가 했던 모든 말은 거짓이 되고 말았다. 영원히 사랑하겠다는 말도, 함께 있기 위해서 무엇을 하든 상관없다는 말도, 나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아깝지 않다는 말도, 모두모두 거짓이었다. 그는 이 세상에서 나에게 가장 심한 거짓말을, 그것도 제일 많이 한 사람이었다. -p, 73

나를 떠난 그처럼 케이도 어느 날 문득 내게서 등을 돌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상관없다.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것과 생각하지 못한 것은 다르니까. 상상한 일이 일어나는 건 상상하지 못한 일이 일어나는 것에 비할 바가 아니다. -p, 73

우리가 만나지 못한 그 몇 해 동안 케이는 대학을 졸업했고 취직을 해서 일하다가 소설가가 되었고 직장을 그만두었다. 그리고 어떤 여자와 가슴 아프게 헤어졌다. 이후 케이는 어떤 여자를 만나더라도 깊이 빠지지 않으려고 했고, 어느 정도는 그럴 수 있게 되었다고 했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케이는 그다지 달라지지 않았다. 그는 쉽게 마음을 주고 마음을 거두어야 하는 순간에도 마음을 멈출 수가 없는 사람이다. 하지만 케이는 그 고통을 사랑이라고 굳게 믿을 타입이다. 그런 케이가 사는 내내 상처를 입는 것은 불가피해 보인다. 나는 케이를 동정하지 않는다. 그건 케이가 가진 사랑의 방식이고 그의 인생이다. 그러지 않으려고 애써도 그럴 수 없는 타고난 운명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p, 74

만나본 적도 없는 케이의 여자를 저주하는 날이 있다. 그 여자 때문에 케이는 지독한 불면증에 걸렸고 잠만 자면 악몽을 꾸었으며 깨어있는 시간의 대부분을 그녀를 생각하며 소설을 썼다. 케이가 글을 쓰는 한 그녀와 케이 사이에 있었던 일은 먼 옛날의 사랑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그녀하고는 그때 헤어지고 끝이야?”

“그때라니?”

나조차도 내가 묻는 그때를 알 수 없었다. 케이는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지금 어디 있어? 그 여자.”

“여기 있어.”

“……”

“아직도.”

케이는 자신의 심장을 가리켰다. -p, 76

누군가를 전부 아는 일은 불가능하다. 어제의 진실도 오늘은 거짓이 될 수 있고, 오늘의 거짓이 내일은 진실이 될 수 있다. -p, 82

우리는 병에 걸렸다. 번번이 실패하면서 거듭해서 사랑에 빠지고, 한 번도 성공한 적이 없으면서 여전히 가능하다고 믿으며, 불가능하다고 이해하면서 여전히 기다린다. 우리는 실망할 뿐 절망하지 않는다. 우리는 갇혀서 눈물 흘리고 그리워하면서 서서히 죽어가고 있다. 아니, 어쩌면 이미 죽었는지도 모른다. -p, 88

한 사람을 잃는 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우리는 그 사람과 함께 그보다 많은 것들을 잃어버렸고, 또 잃어가고 있었다. 이 여행은 영원히 계속될 것이며 아침은 다시 오지 않을 것이다. -p, 92

<소설 小說 小雪 中>

여자는 비행기에서 보았던, 책을 읽던 남자를 보았다. 남자는 창가 자리 쪽에 앉아 있었다. 당황해서 짜증을 내거나 체념해서 늘어진 사람들과는 다르게 남자는 차분해 보였다. 남자는 책을 읽었고, 여자는 남자를 읽었다. -p, 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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