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전한 행복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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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처음 알게 된 건 스무 살 무렵이었다. 한국 근대 문학의 우울함을 벗어나고자 한동안 영미 소설만 탐독했던 내게, 정유정과 성석제, 이상운 부류의 소설은 한국 문학을 새로이 보게 해주었다. 그의 소설은 속도감이 있었다. 그 시기에 종종 읽었던 일본 소설들이 가지고 있는 사소설적인 느림에 지칠 때면 나는 종종 정유정을 찾았다. 인간의 악이라는 근원적 질문을 탐색하는 그의 글은, 쉬지 않고 페이지를 넘기게 하는 매력이 있었다. 그의 글은 마치 장르문학의 탈을 쓴 순수문학 같았다. 내 인생의 스프링 캠프, 내 심장을 쏴라, 7년의 밤, 그리고 28. 최근의 소설들은 한국을 떠나 있느라 읽지 못했지만, 그의 초기작은 빠짐없이 읽었던 기억이 난다. ​ 


그의 책을 펼치면, 그가 만들어 놓은 세계에 발을 딛는 것과 같았다. 정신병동을 그린 내 심장을 쏴라, 댐에서의 어둑한 풍경이 잔상으로 남는 7년의 밤, 그리고 국가 재난 사태가 그려지는 28. 그는 하나의 세계를 정교하게 묘사했고, 그 세계에 입장하는 순간 이야기는 빠른 속도로 전개되었다. 사람들이 굳이 그를 부르는 별명이 페이지 터너인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여러 권의 책을 며칠에 걸쳐 동시에 읽는 내 습관은 그의 책을 펼치는 순간 더는 습관이 아니게 되었다. 나는 종종 그의 책을 집어 들었고, 책을 내려놓을 땐 어느새 반나절이 지나있곤 했다. 그 순간만큼은 그 소설 속에서 빠져나올 수 없었다. ​ 


그런 내게 그의 책이 또다시 다가왔다. 외국에 있던 5년을 건너뛴 2021년의 신작이었다. <완전한 행복>, 정유정은 행복을 향한 욕망으로 치닫는 인간 군상의 본성을 명확하게 묘사해낸다. 소설의 주인공 신유나는 완전한 행복을 꿈꾸는 사람이다. '행복은 뺄셈이야. 완전해질 때까지, 불행의 가능성을 없애가는 거'라고 말하는 그녀는 자신의 행복을 위해 앞으로만 나아간다. 소설은 유나가 전남편과 낳은 어린 딸 지유, 유나의 언니 재인, 그리고 유나와 재혼한 은호, 세 사람의 시점을 번갈아 보여준다. 뺄셈의 행복, 복종의 행복, 그리고 덧셈의 행복은 각기 행복을 향해 달려가지만, 불행의 가능성을 없애 가는 유나의 발길은 가차 없다. '행복한 순간을 더해가면 그 인생은 결국 행복한 것 아닌가?' 라고 말하던 은호의 행복은 과연 성취될 수 있을까. ​ 


오백여 페이지의 책은 바이칼호로 떠나는 시베리아 횡단 열차 만큼 서늘한 여름밤을 선물해준다. 전구색 등 하나에만 의지해 새벽 두 시에 덮은 책은 얼마 전 읽었던 부서진 여름만큼이나 긴장감 있게 다가왔다. 책을 덮고 유나가 그려내는 악에서 살짝 몸서리를 치고 이불 속으로 기어 들어갔다. 내게 있어서의 행복은 덧셈, 매혹적인 유나의 세계는 이기심이 폭력과 파괴로 치닫는 행복이었다. 나르시시스트의 가스라이팅 앞에서 황폐해지는 지유와 은호. 바이칼호의 유나는 결코 행복하지 못했을 터였다. 그녀의 신작을 오랜만에 읽으며 여름밤의 행복을 잡았다. 완전하지 않은, 하지만 소중한 행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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