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서진 여름 - 이정명 장편소설
이정명 지음 / 은행나무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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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귀를 모으는 편입니다만, 여름에 대한 글귀는 딱히 모은 게 없습니다. 여름은 그 자체로서 주제가 된다기보다는, 다른 주제의 풍경으로서 작용하는 바가 많았기 때문이지요, 김연수는 봄이라는 것에 입술이라도 있다면 전화를 걸어 왜 안 오느냐고 따져 묻기라도 할 텐데 그럴 리 만무라고 말했고, 현진건은 봄은 벌써 반이나 지났건마는 이슬을 실은 듯한 밤기운이 방구석으로부터 슬금슬금 기어 나와 사람에게 안기고라고 했으며, 박완서는 개념으로서의 봄은 암흑의 조류와 더불어 치열하게 찾아왔다고 했습니다. 이렇듯 봄을 표현하는 글귀는 많지만, 내가 모은 여름들은 그저 단편적인 단어로서 어느 사건들의 풍경만을 암시할 뿐입니다. '그냥 그렇게 봄날이 가고 여름이 오듯,'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 


여름 하면 실로 다양한 이미지들이 떠오릅니다. 뙤약볕에 땀을 줄줄 흘리던 풍경, 끊임없이 흐르던 장맛비의 우울함, 푹푹 찌는 더위와 그 열기의 냄새를 쫓는 하루살이들, 하나의 계절로서의 여름은 선명한 색채를 띠고 있고, 그 색채는 때론 강렬한 채색의 풍경으로 소설의 배경을 채웁니다. 최은영의 그 여름, 김애란의 물속 골리앗, 김연수의 사월의 미 칠월의 솔은 그러한 배경을 바탕으로 장마와 더위의 여름 냄새를 가득 풍깁니다. 그렇다면 이정명의 부서진 여름은 어떨까요. 하워드 주택과 맬컴 주택에서 일어나는 어느 여름의 풍경을 통해 작가는 거짓된 삶들에 관하여 나열합니다. 그 여름은 부서져 내렸고, 그 위에 덧입혀진 기억들은 거짓된 기억들이었던 거죠. 


첫 번째 서술자 한조는 마흔셋의 생일을 기념하며 아내와 행복한 시간을 보냅니다. 완벽한 하루가 지난 후, 숙취에 시달리는 그를 맞이하는 건 적막한 집뿐이었죠. 사라진 아내를 찾아 나선 한조는 자신이 아내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아내의 방에 놓여있는 원고, '나에 관한 너의 거짓말.' 26년 전 여름, 그가 잊었던 하나의 살인 사건으로 이야기는 전개를 치닫습니다. 한조가 좋아했던 하워드 주택의 딸 지수의 죽음, 알리바이를 입증할 수 없던 그의 형, 그리고 묵묵히 살인죄를 인정하며 형을 살게 되는 아버지. 죽음을 두고 명백한 진실이 밝혀지지 않은 채, 거짓말과 오해는 주인공의 서사를 오가며 진실에 다가갑니다. 한조가 기억하는 부서진 여름 끝에는 어떤 진실이 존재할까요. 오랜 방황을 거쳐 돌아온 그 여름의 하워드 주택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던 오필리아는, 과연 진실을 바라보았을까요. 


부서진 여름은 뿌리 깊은 나무와 별을 스치는 바람의 작가 이정명의 미스터리 스릴러입니다. 최근 들어 소설보다는 논픽션이나 전공 관련 서적들을 읽어온 터라 설레는 마음을 안고 책을 집었는데요, 여름밤의 귓가를 간질이는 빗소리처럼 조심스레 다가온 글은, 마치 거세게 쏟아지는 폭우처럼 담백한 문체로 이야기를 끌고 갑니다. '오래 잊었던 열여덟 살의 여름이 떠올랐다. 시내를 가로질러 흐르는 강변에서 죽은 사람을 본 그해 여름. 얕은 갈수기 물살에 하천의 바닥 자갈이 쓸리는 요란한 소리. 젖은 옷자락에서 뚝뚝 떨어지는 물방울. 뺨에 달라붙은 수초와 이마에 맺힌 물방울……. 그 일은 그때까지 일어난 일들과 달랐고 그 모든 일을 합쳐놓은 것과도 달랐다. 그는 이제 안다. 부끄럽고 부도덕한 과거를 대면할 용기가 없었음을. 지금까지 미루어왔지만 더는 미룰 수 없다는 것.' 


마침 오월의 때 이른 더위가 한풀 꺾이고, 장맛비처럼 추적추적 내리는 비가 창문을 때릴 때 읽어서 그런지, 서늘하면서도 강렬한 이야기의 매력에 흠뻑 빠져 읽을 수 있었습니다. '그들의 사랑과 복수는 착각과 오해로 시작되었고 지탱되었다. 처음부터 진실은 없었어도 거기에는 삶의 열정과 서로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 만약 그를 진실로 사랑하지 않았다면 그녀는 복수를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다른 것이 다 헛것이라도 그 순간을 채운 기쁨만은 진실이었으리라.'


#이정명 #부서진여름 #은행나무서포터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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