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운 도시 - 뉴욕의 예술가들에게서 찾은 혼자가 된다는 것의 의미
올리비아 랭 지음, 김병화 옮김 / 어크로스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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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거리두기가 일상화된 지금, 이 책은 외로움의 정치학이라 불러야 한다. 이 책을 통해 다시금 깨닫게 되는 것은 인간은 사실 외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한 욕망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를 갈망했고, 외로움을 강요하는 상황과 조건에 저항해왔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 어떤 미래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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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의 몫을 모두에게 - 지금 바로 기본소득
금민 지음 / 동아시아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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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소득을 받아야 하는 권리의 정당성, 그리고 기본소득의 현실성을 논한다. 그러나 이 책은 기본소득을 논하는 것 이상의 탈자본주의 대안에 있어 높은 이론적 성취를 보여준다. 노동, 여성, 생태 등 최근의 글로벌 좌파담론의 쟁점을 다루면서 그 누구보다 명확한 언어로 비전을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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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의 탄생 - 초롬, 밤비, 태양, 샤샤, 놀, 단풍, 초달, 밍키, 그리고 은선과 희철
김은선 지음 / 모비딕북스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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흡사 롤러코스터를 타는 느낌. 고양이와 함께 하는 사람들에게 언젠가는 닥칠 사건과 일상의 경험들에 관한 감정과 사유를 담고 있다. 고양이란 존재가 선사하는 작지만 놀라운 기쁨과 위로, 그리고 사랑하는 존재를 영원히 잃는 것에 대한 슬픔과 적막한 외로움. 올해 읽은 최고의 책 중에 한 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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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의 권리는 하늘이 내렸나?
마저리 켈리 지음, 강현석 옮김 / 이소출판사 / 200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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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한국어판 제목은 아무래도 잘못 붙여진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자본의 권리는 하늘이 내렸나?'라는 책의 제목은 곧바로 누구나 '아니오.'라고 답할 수밖에 없는 식상함을 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책의 내용도 그러한 식상한 관념들로 꽉 차 있는 책이 아닐까하고 오해를 하게 만든다. 하지만 이 책은 그렇지 않다. 이 책은 기업을 둘러싼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이 꼭 읽어야 할 필독서다. 특히 우리 삶에 큰 부분을 차지하며 절대적 영향력을 갖기 시작한 기업에 대해 그런 영향력에 걸맞는 사회적 책임성을 요구하고 사회의 공공선에 복무하도록 기업을 바꾸어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은 반드시 읽어야 한다.

언제부터인가 아니, 1997년 이후부터 기업의 윤리경영, 사회책임경영, 지속가능경영과 같은 개념들이 우리를 찾아왔다. 이 개념들의 부분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이 개념들이 포괄적으로 의미하는 바는 기업의 사회적 책임성과 이해관계자들에 대한 윤리적 태도를 촉구하자는 것이다. 여기에는 기업의 이해관계자를 주주나 종업원들만으로 한정하는 것이 아니고, 소비자와 지역사회, 환경을 포함한 '사회일반' 으로 확대정의하는 관념의 변화가 깔려 있다. 소비자와 시민들의 자발적 촉구로부터 기업들이 변화가 시작된 경우도 있고, 기업들이 변화된 상황에서 난관을 타개하기 위해 공격적으로 치고 나오는 경우도 있다. 또한 시민운동 단체 및 진보적 활동가들에 의해 이끌려 나오는 경우도 있다. 누가 주도하든지간에 그것은 크게 다음 세가지 문제의식속에 추진되고 있다.

(1) 지금까지의 기업활동(기업의 목적을 비롯한 총체적 기업활동을 말한다)을 그대로 해나갈 경우, 현 경제는 지속가능한 경제가 되지 못한다는 것.

(2) 소비자 및 시민들의 의식과 이익행위(소득을 얻고 소비하는 다양한 형태들)의 동기가 개인적인 것에서 사회적이고 집단적인 것으로 변화했다는 것.

(3) 막강해진 기업의 사회적 영향력에 비해 그 힘을 제어하고 통제할 수 있는 수단이 없다는 것.

윤리경영이든, 사회책임경영이든, 지속가능경영이든 그것이 기업을 긍정적으로 변화시키고 있고, 그럴 수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것은 많은 사람들을 기업활동의 이해관계속에 '참여'시키고, 그로 인해 기업활동에 관심을 갖고 보다 사회의 공공선에 기여하도록 조정하도록 하는 분위기를 이끌어낸다. <사회책임투자>(에이미 도미니, 필맥), <착한 기업이 성공한다>(필립 코틀러, 리더스북) 등을 보라. 물론 이러한 분위기에 대해 그것이 단지 마케팅의 일환일 뿐이라는(즉, 속임수) 평가도 있고, 실제 그런한 면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것이 다소간 거짓을 함축하고 있을지라도 마케팅 효과를 가지게 할 정도로 변화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런 변화들 속에서 <자본의 권리는 하늘이 내렸나?>를 읽는 것은 기업에 관한 지금까지의 법 제도와 통속적 관념을 완전히 뒤엎어버리는 것이 될 것이다. 그리고 어떻게 기업이 빈부격차를 줄이고, 사회의 제 문제를 해결하며, 사회의 공공선에 기여하도록 변화시킬 수 있는지 그 대안을 발견하는 일이 될 것이다. 저자 마저리 켈리는 '기업윤리'라는 잡지를 발간하며, 윤리경영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내는 일을 하는 활동가이자 컨설턴트다.

"기업 개혁가랍시고 다음과 같은 말을 하는 사람들은, 위에서 칸트가 제시한 명령을 떠올릴 필요가 있다. '종업원을 잘 대우하세요. 그래야만 주주들도 함께 번창할 수 있어요.' 또는 '환경보호를 실천하세요. 그래야만 이익이 늘어날 테니까요.' 불행하게도 이는 사회 투자 전문가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말이다. 그런 면에서 필자가 관여하고 있는 <기업 윤리> 또한 특별히 나을 게 없다. 나를 포함하여 사회 투자 분야에서 활동하는 모든 사람들은 사회적 평가를 받는 투자가 그렇지 않은 투자보다 높은 성과를 거둔다고 거듭 주장해왔다-이는 얼마간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어떤 면에서 자기파괴적이다. 왜냐하면 은연 중에 주주 수익이 유일한 잣대라는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궁극적으로 우리는 여타의 번영의 잣대-임금상승, 재정이 튼튼한 학교, 건강한 환경 등-또한 중요하다고 주장해야 한다. 그러기 전까지는 우리가 가져야 할 마땅한 권력을 제대로 주장한다고 보기 힘들다."

마저리 켈리는 기업이 '주주의 이익을 위해 복무한다'는 기업에 관한 법 제도, 기업의 재산권 관념과 소유권제도를 고치고, 사회적 책임성에 대한 부분을 법제도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켈리가 보는 시각은 정확하고 공정하다. 이는 기업이나 사회책임 투자자들이 '주주이익'과 '사회적 책임성'을 연계시키고 동일시하려는-현행 제도에서는 그것이 명백히 모순을 함축한 딜레마라는 것을 은폐하려는-것이 주주의 지배아래 기업을 묶어두려는 통속적 관념에 근거한다고 비판하는 것이다. 그래서 현재의 사회책임경영이나 지속가능경영은 법제화보다는 기업의 통상적 양심에 호소하거나, 소비자의 힘을 빌어 기업이 이끌려나올 것을 기대하는 정도에 그치고 있다.

켈리가 제안하는 실천가이드는 명쾌하다. '주주이익의 극대화'라는 통속적 관념과 법 제도를 합리적 방향으로 수정하는 것이다. 이것은 미국의 몇몇 주에서 이미 실천되고 있다. 또한 기업의 소유구조를 민주화하고 주주라는 '귀족주의'로부터 종업원과 지역사회 등이 골고루 참여하여 기업의 전략을 결정할 수 있는 민주주의를 확대하자는 것이다. 이런 주장 속에서 마저리 켈리가 제안하는, 법제화를 목표로하는 새로운 개념들은 창의적이고 실용적이며, 향후 연구할 가치가 풍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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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운동 - 독일, 서유럽, 미국
잉그리트 길혀-홀타이 지음, 정대성 옮김 / 들녘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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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껏 세계혁명은 단 둘 뿐이다. 하나는 1848년에, 다른 하나는 1968년에 일어났다."

월러스틴의 말이다. 아...그랬던가? 생각해보니 그렇다. 일국적이고 국지적이고 지역적 혁명이 아니라, '세계혁명'이란 것은 딱 두 번 일어난 거로군.

1968년에 관한 책은 처음 읽어본다. 혁명사에 관한 책을 싫어하는 나의 편견 탓이다. 혁명사가 싫은 이유는 저자의 정치적 입장이 지나치게 많이 투사되어 있기 때문이다. 또 영움담이나 단순히 어떤 경험을 공유한 기억공동체의 회고담 정도에 불과하게 될 가능성도 높다. 그래서 잘 안 읽는다. 게다가 68혁명에 관한 책은 주위에서 줏어들은 바가 너무 많아 일견 식상해져버려서 읽을 마음조차 들지 않았다. '도발'과 '전복', '규칙이나 금기에 대한 위반', '상상력에 권력을!'과 같은 것이 지금은 너무나 진부하게 느껴지지 않는가? 하여튼 나는 그게 매우 진부하게 느껴졌다. 그렇다고해서 맑스/레닌주의처럼 68혁명을 폄하하는 관점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런데 어째서 이 책을 보고 사서 볼 결심을 했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그냥 마음에 들었다. 어쩌면 우연히 펼친 페이지에서 다음의 문장을 보고 결심을 굳혔는지도.

"사회에는 주소가 없다. 사회에 대한 요구는 조직으로 보내야 한다." - 니콜라스 루만

이 말은 되씹기에 따라서 상당한 의미의 과잉을 함축하고 있다. 이게 마음에 들었다.  다행히 이 책은 자신의 정치적 입장이나 이념적 태도를 68년에 지나치게 투사하려는 짓을 '덜' 하고 있다. 최대한 객관적 평가를 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여기서 객관적인 태도를 유지하려고 한다는 의미는 가급적 신조어나 신개념을 통해 분석대상에 변형을 가하거나 재해석하지 않으려고 한다는 의미다. 근래에 좀처럼 보기 힘든 저자의 이런 태도 때문에 맥락과 환경이 서로 다른 사회운동간의 비교가 가능해졌다. 또 그것을 이 책은 장점으로 내세우고 있다.

(이하 스포일러 주의)

68혁명을 주도한 세력은 다양한 스펙트럼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을 딱 잘라 두 개의 경향으로 구분한다면, '반권위주의'파와 '노동계급과의 연대'파다. 이 두 개의 경향을 묶어 그냥 '신좌파'라고 통칭하고, 기존의 좌파들-공산당이나 사회민주주의, 노동조합세력들-을 '구좌파'라 통칭한다. 신좌파는 구좌파에 대한 반발로부터 나왔다. 구좌파에 대한 반발이기는 하나 반권위주의파와 노동계급과의 연대파는 입장 차이가 크다. 반권위주의파는 더이상 노동계급에게서 혁명의 주체성을 발견할 수 없음을 선포하고, 청년과 학생을 새로운 혁명계급으로 선언한다. 또한 '행동'을 통한 투쟁을 강조한다. 말하자면 기동전에 대한 강조라 할만하다.

반대로 노동계급과의 연대파는 타협일로를 걷던 노동자정당과 조합을 비판하지만 노동계급이 혁명의 주체임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들이 선택한 것은 노동계급의 혁명성 강화를 위한 계급적 연대다. 또한 반권위주의파와 다르게 '조직'을 강조한다. 이 둘은 '신좌파'로 서로 묶여있었지만 68혁명기간내내 투쟁의 목적과 방법을 두고 갈등을 겪는다. 하지만 68혁명에 노동자들의 참여는, 프랑스를 예외로 한다면 극히 미미했다. 즉, 노동계급과의 연대파가 신좌파로 묶여 있긴 했지만 반권위주의파의 영향아래 있었다는 얘기다. 노동계급과의 연대파를 대표하는 것이 트로츠키주의자와 마오주의자였다. 한가지 흥미로운 점은 이탈리아의 '노동자주의'는 노동계급과의 연대파에 속하면서도, 공장에서의 반권위주의를 요구했다는 점에서 주목을 끈다. '참여민주주의', '자치', '자주관리', '자율' 등 반권위주의파의 아젠다를 얼마간 공유하고 있었던 것이 이탈리아 노동자주의였다.  

반권위주의파의 아젠다가 급부상함에 따라 신좌파내의 노동계급과의 연대파가 급속히 이탈해간다. 그 결론은 노동계급과의 연대파의 구좌파로의 흡수였다. 몰락의 위기를 맞았던 구좌파는 싱싱한 새 피를 흡수함으로써 기사회생하게 된다. 구좌파는 '임금인상안에 관한 협상'등을 발빠르게 제시함으로써 '참여민주주의'나 '자주관리'등의 아젠다의 힘을 죽이고 68혁명을 잠재우려고 한다. 그리고 그것은 체제가 원하던 바로 그것이었다.  반권위주의파는 행동을 통한 투쟁을 강조하면서 한편으로는 대안사회적 실험을 벌여나간다. 여기에 다시 갈등요소가 부상한다. '행동'을 강조하는 쪽과 '실험'을 강조하는 쪽. 따라서 반권위주의파는 지속적으로 대중동원에 실패한다. 폭로와 의식혁명을 겨냥한 그들의 돌출행동이 잦아짐에 따라 점점 더 식상해지고 대중적 공감에 실패하고 만다. 이제 그 일부는 반권위주의파의 기본정신과 완전히 대비되는 테러리즘으로 돌아선다. 이상, 이 책에 대한 내 나름의 요약정리다. (스포일러 끝.) 

그렇다면, 오늘날 68년이 나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인가? 

사회변혁의 주체는 고정되어 있지 않고 항상 새롭게 설정된다는 것, 구체제나 기존세력은 항상 새롭게 형성되는 혁신의 피를 공급받아 기사회생한다는 것-즉, 새로운 것에 기생한다는 것. 그러한 기사회생을 '진보'라고 부르는 사람이 많다는 것. 

그리고 가장 중요한 교훈은 사회에는 주소가 없다는 것, 사회에 대한 요구는 항상 자신에게  돌려져야 한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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