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사람들을 마주 대할 때 엄청나게 많은 에너지를 소모해야 했다. 물론 다른 사람들도 어느 정도 그러하겠지만 그는 그 정도가 훨씬 심했다.
타인들과의 대화가 조금만 길어지면 그는 마치 실타래에서 실이 풀려나가듯 자신의 몸에서 기운이 빠져나가는 광경이 환시로 보이는 것이었다.
게다가 다른 사람들의 경우에는 상대방으로 인해 에너지를 빼앗기는 동시에 반대급부로 그만큼의 에너지를 돌려받는다고 생각하는데 반해, 김동학은 그런 생각은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생각해보라.
회사에서 점심시간이 되면 동료들이 함께 식사를 하러 가자고 부를까 봐 전전긍긍하는 인간,
어쩌다 끌려가면 멍한 얼굴로 밥알을 헤아리면서 속으로는 좌불안석이 되는 인간,
사무실에서 상사의 눈길이 그를 향하고 있으면 자기를 바라보는 게 아니라 어디 다른 곳, 아니면 자기 주변의 컴퓨터나 의자 따위를 바라보고 있다고 생각하려 하는 인간을 말이다.
하지만 그것은 그가 소심하거나 심약해서만은 아니었다.
그는 어차피 공적인 일들로 마주치는 타인들과 그이상의 깊은 관계를 맺고 싶지 않았다.
그 소통이나 교감의 한계가 애초에 뻔했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런 상투적이고 진부한 관계들로 인해 일상의 구석진 자리에 옥죄어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것이 그가 스스로 채널 인간이 되고자 한 이유이기도 했다.
그러다보니 그는 어쩌다 상사의 질책을 받거나 성가신 인간들이 가까이 다가오면 단호하게 채널을 돌려버리게 되었다.
그럴 때면 빙글빙글 돌아가는 채널의 끝에 달린 날카로운 칼날이 그들의 머리를 뎅강뎅강 잘라버렸다.
그가 겉으로는 결코 그런 내색을 하지 않았으므로, 그들은 방금 자기들의 머리가 잘리고, 그와 거의 동시에 목에서 우유처럼 흰 액체가 공중으로 치솟곤 한다는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결코 자책감 따위는 느끼지 않았다.
그가 그들의 목을 치는 것은 오히려 그들로 하여금 저열한 일상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라고 믿고 있었던 탓이었다.
- ‘채널 부수기‘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