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를 쓰다 1 - 흠영 선집 돌베개 우리고전 100선 19
유만주 지음, 김하라 편역 / 돌베개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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흠영에는 죽을 때까지 자기 확신을 갖지 못한 청년의 답답하고 회의적인 마음이 넘치도록 일렁인다. (역자 김하라님 ‘책머리에‘중)

밖에 나갈 일을 줄이는 것이 참으로 이득이 될 것이다. 잘 하느니 못 하느니 하는 지겨운 이야기가 귀에 들지 않고, 촌스럽기 짝이 없는 모습들이 눈에 닫지 않으며, 재주도 없고 지혜도 없는 진부한 내 몰골을 드러내지 않아도 될 테니 말이다.

그리하여 스스로 의취 있는 있는 일을 고요히 찾아 나간다면 무한히 좋을 것이다. 내 본성은 고요한 것과 잘 맞는다. 본성과 어울리지 않는 것을 억지로 해서는 안 될뿐더러 배워서 잘할 수도 없다.

(...)

고상하고 심원한 사람이 되면 손해일까? 맑고 준엄한 사람이 되면 손해일까? 대체로 이 두 가지 미덕을 갖고 있다면 세상의 척도에 부합하기 어렵다.

스스로 돌아보고 헤아려 보아도 이미 어긋버긋하고 두루뭉술하고 물정을 몰라, 나긋나긋하고 세련되게 꾸미기를 요구하는 세상의 규울에 너무나 맞지 않는다는 걸 알겠다.

- p.69 ‘세상에 나오지 못하는 호랑이‘

그저 나가서는 여러 사람들 앞에서 신세한탄이나 하고 들어와서는 또 저 혼자 탄식을 한다.
우유부단하고 나약하고 산만할 뿐 끝내 삶에 아무런 박자가 없다.
옛사람은 이런 걸 두고 ‘뜻을 세우지 못하는 병‘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

겉으로는 고상하고 빛나며 맑고 준엄한 것 같지만, 내실은 둔하고 나약하며 속이 텅 비고 엉성하다.
이런 점에서 온 나라에 너와 맞먹을 자 누구겠는가?

-p.74 ‘바람에 나부끼는 마음‘

나는 고상한 데도 비속한 데도 해당되지 않는다.
그저 비썩 메마른 처지를 견딘다.
세상사의 변화를 잘 알면 뭔가 긴요한 작용을 할 텐데 그런 변화를 잘 모르므로 작용을 할 줄도 모른다.

-p.84 ‘아무 것도 아닌 사람‘

‘언제나 오두마니 앉아 글 읽으며 한 해를 다 보낸다‘는 이 말은 책상물림의 썩어 빠진 행태를 잘 형용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나면 ‘죽음‘이라는 단어가 당도해 있다가 눈 돌릴 새도 없이 데리고 가는 거다.


-p.85 ‘아무 것도 아닌 사람‘

유만주는 스스로를 모멸하고 비하하는 별명을 붙인 적이 간혹 있는데 ‘열 가지가 없는 허랑한 인간‘도 그중 하나다.

내가 여기에 있어야 하는 필연적인 이유도 모르겠고,
얼굴이 잘 생긴 것도 아니고,
인간관계에서는 세련되지 못하고 서툴기만 하고,
특별한 재능도 없고,
무슨 재주가 있는 것도 아니고,
집에는 돈도 없고,
한다하는 뼈대 있는 가문 있는 출신도 아니고,
말을 잘하는 것도 그렇다고 글을 잘 쓰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와 같은 아홉 가지 부정적 상황을 딛고 일어날 의지가 없다.

이로써 그는 ‘아무 것도 아닌 사람‘으로 자신을 그려 내고 있는데,
이런 그에게 ‘자신을 좋게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이야말로 무엇보다 간절한 것이었을 터이다. - p.88 (역자 김하라님)

대체로 몸과 마음이 잠의 힘을 이기지 못하는 것은 역시 도무지 즐겁고 살맛나는 일이 없어서 게을러지기 때문일 것이다.

한밤중에 잠에서 깨었을 때를 생각해 본다.
눈에 보이는 것이라곤 칠흑같은 어둠뿐이고, 귀에 들리는 것은 아득한 정적뿐이다.
이런 시간은 유독 태곳적과 같아, 참고 견뎌야 하는 이 세상 가운데 별도로 존재하는 하나의 세계라 하겠다.
이런 시간에 몸을 뒤척이며 생각해 보면 내가 했던 말들이 혼돈과 순수함 사이에서 또렷이 떠오르는데, 여기에 참으로 무한한 의취와 맛이 있다.
그러나 해가 떠서 허다한 이들이 일어나고 번뇌가 밀려들어 나에게 들러붙게 되는 때보다 훨씬 낫다.
이런 까닭에, 맘이 탁 트인 사람들이 영원한 쉼을 즐거운 일로 여긴 것도 본디 깊은 뜻이 있었다 하겠다.

-
고요하고 캄캄한 밤이 벌건 대낮보다 나은 것 같다.
무언가 의미 있는 행동을 하고 세계에 영향을 미쳐야 한다는 생각이 없기에 그런 듯한데, 이처럼 아무런 작용이 없기 때문에 벌건 대낮과 볕바른 맑은 날씨를 버려두게 되는 것이다.
반면 비 내리고 흐린 날이나 고요한 밤에는 온통 어두침침하고 모호하여 ‘나‘와 내가 노닐 수 있다. - p.91

하늘이 내린 빼어난 품성을 타고난 이들이 있다.
그들 가운데, 도를 간직하고 재능을 품고 있어, 크게는 천하를 바로잡아 다스릴 수 있거나,
그 정도는 아니더라도 보람 있는 일을 할 만한 이가 얼마나 수없이 많을 것인가.
다만 때를 만나지 못한 나머지, 헛되어 태어나 헛되어 늙어 가다가 풀과 나무와 티끌과 마찬가지로 썩어 가고 소멸하게 되는 것이니
누가 다시 그들을 알아주겠는가? 이것은 예나 지금이나 애달프고 서글픈 일이다.

-p.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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