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 - 로베르트 발저 작품집 쏜살 문고
로베르트 발저 지음, 박광자 옮김 / 민음사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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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더 이상 미래의 전망을 볼 수 없었고, 지나온 일을 이해하려고 아무리 애써도 납득이 되지 않았다. 자신의 삶을 정당화하려는 시도는 물거품이 되었고, 쾌감도 점점 사라지는 것 같았다. 예전에는 은밀한 기쁨을 선사했던 여행과 산책도 이상하게 싫어졌다. 발걸음을 옮기는 것도 겁이 났고, 체류지를 옮기려고 하면 괴물을 마주한 듯 소름이 끼쳤다.


그는 완전히 고향을 상실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이 세상 어딘가를 진실로 자연스럽게 편안한 거처로 삼지도 못했다. 그는 죽지 않아도 죽은 거나 마찬가지였고, 거지처럼 가난하지는 않았지만 영락없이 거지였고, 그럼에도 구걸은 하지 않았다. 그래도 아직까지는 우아하게 처신했고...

그는 나름대로 섬세하고 고결한 사람이었다. 그는 교양이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아주 특별한 경로를 통해 독특한 교양을 쌓는다.

그는 신분이 낮아서 소박한 옷차림을 하고 다녔다. 아무도 그에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고, 그래서 그는 좋았고 기뻤다.

그는 말하자면 어두컴컴한 길을 따라 즐겁게 사색에 잠겨 우아한 인생을 차분하게 조용히 살았다. 그는 자신의 변변치 못한 처지를 예찬했다.

그는 책을 읽을 때면 몇 주일 몇 달 내내 자연스러운 행복을 맛보았다. 그럴 때면 온갖 상상과 상념들이 마치 다정한 여인들처럼 친근하게 다가왔다. 그는 바깥세상보다는 정신의 영역에서 살았다. 말하자면 그는 이중생활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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