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의 정치학 - 기독교 세계 이후 교회의 형성과 실천
스탠리 하우워어스 지음, 백지윤 옮김 / IVP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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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After Christendom?”에 대한 대답으로 살기



『교회의 정치학』
스탠리 하우어워스 지음, 백지윤 옮김, IVP: 2019.
글_ 김주경
2020년 1월 15일(수)

모르긴 몰라도, 이 책의 표지 디자이너는 운신의 폭이 작았을 것이다. 편집자가 강하게 개입한 흔적이 역력하다. 원서와 역서의 제목과 부제 전부를 넣어서 텍스트 디자인으로만 꾸몄다. 역서의 제목(교회의 정치학)과 부제(기독교 세계 이후 교회의 형성과 실천) 모두 의역이라는 사실이 흥미롭다. 직역하기는 까다로우면서도 묻어두기는 아까웠을 것이다.

원서의 제목은 ‘크리스텐덤 이후(After Christendom)?’이고, 부제는 ‘자유와 정의와 기독교 국가라는 개념이 나쁜 것이라면, 교회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How the Church is to Behave if Freedom, Justice, and a Christian Nation are Bad Ideas)?’이다. 오늘날 그리스도인에게 자유나 정의나 기독교 국가라는 개념은 ‘굳 아이디어(good ideas)’이다. 저자는 달리 묻는다. 그것이 ‘배드 아이디어(bad ideas)’라면?

정의나 자유라는 개념 자체가 나쁘다는 말은 아닐 것이다. 자유주의(liberalism)에 점령당한 정의와 자유라는 개념이 나쁘다는 말이다. 여담이지만, 이 책이 두O노나 규O과 같은 출판사에서 발간되고, 책 제목을 ‘자유주의, 교회를 점령하다’ 또는 ‘자유주의에 물든 기독교’ 정도로 뽑았으면, 보수 기독교인의 지갑을 쉽게 열었을 것이다. 자유주의를 신학적 자유주의로 이해할 공산이 크다. 안타깝게도(?) 저자가 문제 삼는 자유주의는 정치사상으로서의 자유주의이다. 자유주의는 개인의 자유와 평등을 추구하는 정치사상이다. 전제 왕정 및 봉건시대에 반발하며 탄생했고, 근대 이후 서구 사회의 지배적 이념이 되었다. ‘지배적 이념’이란 말에 주목하자. 자유주의는 정치·사회의 구조를 결정하다 못해 교회의 모습까지 규정했다.

저자는 현실을 다음과 같이 진단한다. (서구의 혹은 미국의) 기독교는 문화적 국교의 지위를 획득‘했었’다가 상실‘하고 있는’ “애매한” 상태이다(37). 자유주의 사회에서 문화적 국교(國敎)의 지위를 획득했을 때 기독교는 무엇을 ‘믿는’ 것으로 전락했고, 그리스도인의 신념과 실천은 분리될 수밖에 없었다. “종교는 사적(private)이라고 불리는 새롭게 창조된 공간으로 사회적·정치적으로 추방되어야 했다.”(43) 한마디로, 성경이 아니라 자유주의 사상이 현실 기독교를 형성하는 대서사(meta-narrative)가 되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그리스도인은 정의, 자유, 교회, 성(性)과 같은 주제를 성경이 아니라 자유주의적 사고를 기반으로 하여 이해한다. 오늘날 그리스도인은 가난하고 억압받는 사람을 돕고 구조적 불의를 제거해야 한다는 데에 동의한다. 개인의 천부인권을 보장하는 것이 정의(正義)이다. 그러나 이러한 정의 개념조차 자유주의의 산물이다. 구스타보 구티에레스(Gustavo Gutiérrez)의 해방신학조차 그 영향권을 벗어나지 못했다. 개인의 요구를 극대화해야 한다는 신념이 기저에 자리하고 있다. 결국 어떻게 됐는가? 개인은 민족국가에 행복과 복지를 요구했고, 민족국가는 병역의 의무를 지움으로써 개인을 구속했다.

종교의 자유 역시 자유주의의 산물이다. 종교의 자유를 천명한 미국의 수정헌법 1조는 오히려 교회와 사회에 재앙이 되었다. 국가가 종교를 허락한 셈이고, 종교는 국가의 허락 안에서 국가 체제의 존속에 복무하게 되었다. 종교를 개인의 영역에 두려는 사람(R. 로티)이나 종교를 시민사회에 확대하려는 사람(W. 베넷)이나 너나없이 같은 전제를 공유한다. 광신자는 안 된다는 것이다. 믿는 것은 가능하지만, 너무 세게 믿은 나머지 사회를 뒤집어버리지는 말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진짜 문제는 “우리에게 종교의 자유가 있는가”가 아니라, “우리의 교회 안에 국가에 대해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는가”이다(101).

같은 맥락에서 교회의 현실을 점검해봐야 한다. 자유주의 사상 아래에서 교회는 대안의 공동체가 되지 못하고 돌봄의 공동체에 머물게 되었다. “교회는 사람들이 개인적인 인생의 위기를 잘 통과하기 위해 필요로 하는 섬김을 제공하는 일은 훌륭하게 해내지만, 이것은 단지 교회가 우리 문화에서 사적 영역이 되었음을 보여준다.”(131) 자유주의는 인간의 가능성을 크게 치지만,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죄인이 되는 것을 훈련해야 하고 피조물이기를 배워야 한다. 교회는 돌봄의 공동체이면서 훈련의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성(性)의 영역 또한 다분히 정치의 문제이다. 자유주의 사회는 성과 사랑과 결혼을 개인의 선택으로 두려 하지만, 성은 개인적 친밀감의 문제라기보다 권력 관계의 문제이며, 사랑은 좋은 감정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배워야 할 덕목이고, 결혼은 사랑을 배우는 장이자 서로를 위한 섬김의 장이므로 결혼이나 독신 어느 쪽이 우월하다고 말할 수 없다. 성과 결혼은 ‘관계’의 문제이다. 서로를 지배하려는 유혹을 뿌리치고 참된 사랑과 우정의 관계를 형성하는 것, 이것을 교회 공동체의 서사로 삼아야 한다.

마지막 장의 부제는 “자유주의 사회에서 그리스도인을 어떻게 교육할 것인가”이다. 자유주의 사회는 객관적이자 공정하게 교육한다고 자부하지만, 국가와 인종과 권력 관계의 지위를 한 치도 포기하지 않는다. “그 결과, 우리는 우리를 지배하는 권세를 정당화하는 이야기에 도전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했다.”(190) “신약성경에서는 그러한 파괴적 관습을 권세라고 부른다. 그리스도 안에 충만한 구원은 이러한 권세와 충돌하는 것 그리고 그 권세를 정복하는 것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196)

이 모든 문제의 해결책은 자명하다. 세상에는 구원이 필요하다. “구원은 모든 창조 세계가 그리스도의 주권 아래 놓이도록 회복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다.”(53) 하나님의 역사는 교회 공동체를 통해 드러난다. 저자가 “교회 바깥에는 구원이 없다”고 말할 때, 이것은 단순히 종교적 배타주의를 표방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구원이 하나의 정치적 대안이며, 교회라고 불리는 구체적인 사람들의 존재와 동떨어져서는 세상이 이 대안을 결코 알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52) 교회는 폭력이 아니라 비폭력으로, 헤게모니의 획득이 아니라 순교의 죽음으로, 세상에 대응한다. 자유주의적 사고는 세상에 목숨을 걸만한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 교회는 응답한다. “진정한 정치는 죽는 기술에 관한 것”이다.(61) 그 옛날 순교자처럼, “당신들은 우리를 죽일 수 있지만, 우리 죽음의 의미를 결정할 수는 없다.”(55)

저자는 이 책이 존 하워드 요더(John Howard Yoder)와 알래스데어 매킨타이어(Alasdair MacIntyre)의 영향권 아래 있음을 숨기지 않는다. 요더는 『예수의 정치학』(IVP 역간)에서 예수의 가르침을 삶의 실제로 받아들이고자 한다. 매킨타이어는 주요 저작을 통해 개인의 서사는 거대한 서사 안에 위치함을 역설한다. 두 사람의 영향을 받은 흔적은 다음 문단에 진하게 배어 있다.

“이는 기독교가 하나님을 믿는 믿음 더하기 행동이 아니라는 것을 일깨워 준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인 것은 우리가 믿는 것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의 제자가 되도록 부름받은 것 때문이다. 제자가 된다는 것은 새로운 혹은 변화된 자기 이해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일련의 다른 관습을 가진 다른 공동체의 일부가 된다는 의미다.”(145).

저자의 결론은 단순하다. 진정한 교회가 되자는 것이다. 그러나 단순한 결론에 비해 책을 읽어나가는 일은 쉽지 않다. 저자의 배경인 재세례파의 입장이나 저자가 비판하는 철학 사상을 기본적으로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많은 사람의 글과 주장을 인용하기 때문에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길을 잃는다. 게다가 전반적으로 초벌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는 번역은 커다란 걸림돌이다. 출발어의 문장 구조를 그대로 옮긴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어서, 모어를 읽으면서 나도 모르게 독해를 하고 있었다. 이것은 결국 출판사 프로세스의 문제이다.

더군다나 저자의 주장은 오해를 받기에 딱 적절하다. 불륜을 저지른 아내를 받아들이라고 ‘명령’하는 근본주의 목사의 이야기를 긍정적으로 제시하는 대목이 대표적으로 그렇다. 걸려 넘어지지 않으려면 ‘선의의 해석학’을 총동원하여 읽어야 한다. 선의의 해석학은 내가 만든 용어인데, 어떤 주장/행동의 배경에는 발언자/행위자의 가장 선한 의도가 담겨 있다고 믿어주는 것이다. 학문적 글을 읽을 때 특히,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최대한 선하게 읽어줘야 한다. 비판은 그 이후의 일이다.

이 책을 비판하기 위해 리처드 니버의 『그리스도와 문화』(IVP 역간)를 소환하는 것은 손쉬운 방법이지만 왠지 내키지 않는다. 저자도 니버가 비판하는 바를 알고 있을뿐더러, 저자가 분파주의를 조장하려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다른 전통의 자리에서 서면, 저자의 입장이 분파주의적으로 보일 뿐이다. 보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것이다. 저자의 주장은 신학적 보수주의자와 신학적 자유주의자 양측에서 공격을 받기에 안성맞춤이다. 하지만 저자를 변호하면서 다소 순진하게 말하자면, 저자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을 진지하게 고민하는 그리스도인이다.

“내가 하려는 일은 종교를 너무 진지하게 여기지만 않으면 ‘종교를 갖는 것도’ 괜찮다고들 생각하는 시대에 그리스도인들이 교회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습관들을 기르도록 돕는 것이었다. 나는 기독교를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고는 기독교가 좋은 것이 될 수 없다고 말하려 했다.”(『한나의 아이』, 377)

인간의 중대한 착각은 “‘타인은 단순하게 나쁜 사람이고 자신은 복잡하게 좋은 사람’이라고 믿”는 데에 있다(신형철). 노골적으로 말해서, 우리는 ‘한국 기독교가 썩어가지만 적어도 나만큼은 하나님 앞에 바로 서 있으려 한다’고 착각하는지 모른다. 저자의 통찰에 기대어서 한발 뒤로 물러나 자기를 성찰해야 한다. 이 책은 뼛속까지 침투한 현대 사상의 잔류물을 가려내도록 도와준다. 김기현 목사는 이 책의 추천사로 “당신이 촛불을 밝히든 태극기를 흔들든 그 사이에 끼어 있든, 하우어워스는 당신을 불태우고 당신의 세계를 뒤흔들 것이다.”라고 썼다.

바로 이 지점에서, 몇 가지 난점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정치학(이하 교회정)』을 읽어야 한다. 저자의 대표작 제목을 빌려 달리 표현하자면 “하나님의 나그네 된 백성(이하 하나백, 복있는사람 역간)”이 되기 위하여 이 책을 읽어야 한다. 『교회정』 개정판 서문에서 저자는 『교회정』이 『하나백』보다 늦게 출간되었지만, 『교회정』은 『하나백』의 후속작이 아니라 프리퀄(prequel)이라고 했다(10). 서문을 읽을 땐 이 말의 뜻을 이해할 수 없었는데, 책을 덮은 후에 『하나백』을 다시 읽으니 비로소 알 수 있었다. 『교회정』의 바탕에서 『하나백』을 읽으면 『하나백』의 주장이 한층 날카롭게 다가온다.

저자의 입장에 부합하여 말하자면, 우리는 ‘하나님의 나그네 된 백성’이 될 때만 『하나백』을 제대로 읽었다고 할 수 있다. 『교회정』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원서의 제목인) “After Christendom?”에 대한 대답으로 존재할 때만 우리는 『교회정』을 제대로 읽은 셈이다. 니버는 분파주의를 비판하면서도 분파주의의 저력을 경시하지 않았다.

“‘문화와 대립하는 그리스도’ 유형이 주는 매력은 이처럼 입술의 고백과 행동이 중복(reduplication)되는 현상에서 찾을 수 있다. 이처럼 언행일치를 이룰 수만 있다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것이 진정한 마음으로 그렇게 하는 것임을 우리 자신과 타인에게 입증하는 게 가능할 것이다.”(『그리스도와 문화』, 154)

휘황찬란한 신학적 언사는 어디까지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을 위한 것이고, 것이어야 한다. 이 삶에 관심 있는 신자에게 일독을 권하며, 『하나백』의 문장을 가져와서 글의 마침으로 삼는다. “우리는 예수를 따르지 않고서는 그를 알 수 없다.”(『하나백』, 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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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안개 2020-01-16 0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뉴스앤조이> 서평단에 선정되어 작성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