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화상 

        서정주 

애비는 종이었다. 밤이 깊어도 오지 않았다. 

파뿌리 같이 늙은 할머니와  대추꽃이 한 주 서 있을 뿐이었다. 

어매는 달을 두고 풋살구가 꼭 하나만 먹고 싶다 하였으나.. 

흙으로  바람벽한 호롱불 밑에  

손톱이 까만 애미의 아들 

갑오년이라던가 바다에 나가서 돌아오지 않는다 하는  

외할아버지의 숱 많은 머리털과 그 커다란 눈이 나를 닮았다 한다. 

  

스물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할이 바람이다. 

세상은 가도가도 부끄럽기만 하더라. 

어떤 이는 내 눈에서 죄인을 읽고 가고 

어떤 이는 내 입에서 천치를 읽고 가나 

나는 아무것도 뉘우치치 않을란다. 

 

찬란히 티어오는 어느 아침에도  

이마 위에 얹힌 시의 이슬에는  

몇 방울의 피가 언제나 섞여 있어 

볕이거나 그늘이거나 혓바닥 늘어뜨린 

병든 수캐마냥 헐떡거리며 나는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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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찬민용 2010-04-07 16: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국 근대 시는 사람의 마음을 꽉 쥐는 감동이 있다. 그 만큼 힘든 시대였으리라 생각이 된다. 역사는 반복되고 문학은 그 시간을 반영하고 우리는 거기에서 위로를 얻고 지혜를 배울 것이다. 감동과 카타르시스가 공존하는 느낌. 오랜만이다.

당찬민용 2010-06-13 2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병든 수캐마냥 헐떡거리며 나는 가고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