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을 기억하는 남자 스토리콜렉터 49
데이비드 발다치 지음, 황소연 옮김 / 북로드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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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잠복 근무를 하던 형사가 늦은 밤, 아무 소득 없이 귀가했다. 허탕친 일보다 피곤함이 우선이었던 그는 바닥에 쓰러진 물체에 걸려 넘어지고 만다. 그것은 밀대나 무거운 물건이 든 박스가 아니라 그의 처남이었다. 귀까지 찢어진 자상으로 피를 철철 흘린 시체였다. 남자는 집에 아내와 딸이 있다는 걸 기억했다. 정신없이 윗층으로 올라갔다. 그는 침대에서 총알 한 방에 영혼을 빼앗긴 아내를 발견했다. 아이는 방에 없었다. 마지막 희망을 걸고 화장실에 갔을 때, 그는 모든 희망을 잃었다. 그의 아이가 눈을 부릅 뜬 채로 목이 졸려 죽어 있었으니까.


스릴러물의 대가 존 그리샴을 뛰어넘는 작가를 10년 안에 만날 수 있을거라 생각한 적 없었다. 그런데 에이머스 데커를 탄생시킨 데이비드 발다치를 만날 줄이야! 존 그리샴을 탄생시킨 시대에 데이비드 발다치를 넣다니. 신의 머리가 어떻게 된 게 아닐까. 입으로는 신의 멍청함을 주절댔지만 입꼬리는 벌써 귀에 걸쳐져 있었다. 손에 접착제를 발라놓은 것처럼 고정되어 있었다. 단순에 읽지 않으면 내 숨이 넘어갈 것 같아서 멈출 수 없었다. <모든 것을 기억하는 남자>에 저항할 기력이 없을 때까지 눈이 활자를 더듬거렸다.



"자살하고 싶습니다. 이게 다예요. 더는 할 말이 없네요."



처남, 아내, 아이까지 이 세상에 혈육이라고 생각할 수 있던 모든 이들을 한꺼번에 잃은 형사 에이머스 데커는 그대로 무너졌다. 2미터에 달하는 키에 100킬로그램이 한참 넘는 몸무게, 지저분한 행색에 무성한 수염은 그의 망가진 인생을 대변했다. 허망함에 일을 그만두고, 팔지도 못하는 집을 버려두고 친구의 소파에 신세를 지다가 노숙자 쉼터, 공원 벤치, 그리고 이마트 주차장까지 점령하고 나서야 그는 눈을 떴다. 이렇게 살다간 아내와 딸한테 진짜 면목없겠다고. 그 이후 좁은 여관방이나마 집이라고 할 만한 데서 머물게 되었지만 특별히 더 나아진 것은 없었다. 그의 옛 동료 랭커스터가 나타나 16개월만에 그의 가족을 죽인 살인자가 자백했다고 말해주기 전까지.


3명을 끔찍하게 죽인 남자는 정신이상자였다. 데커가 세븐 일레븐에서 자신을 무시했기 때문에 그의 가족을 죽였다고 자백했다. 그러나 데커는 그가 진범이 아니라고 확신했다. 그는 어린 시절 프로 미식축구 선수 생활을 하다 사고를 당해 과잉기억증후군에 걸린다. 기억을 잊을 래야 잊을 수 없는 것이다. 모든 것을 기억하는 그에게 세바스찬 레오폴드라는 남자는 없다. 데커는 확신했다. 이 놈은 아니라는 걸. 그는 이제 자신의 기억 속에 있을 법한, 존재하지 않는 살인자를 추억해야 했다. 그에 발맞춰 음지에 숨어 있던 악독한 그림자가 연쇄 살인을 시작했다. 에이머스 데커와 어둠 속에 숨어 있는 그림자 속 살인자. 치열한 머리 공방이 뇌 세포의 주름 하나하나 쥐어 짜는 기분이었다.


<모든 것을 기억하는 남자>의 에이머스 데커를 알아가는 건 재미있는 일이었다. 그는 자신을 부정적으로 평가했지만 실상은 달랐다. 그에게는 여전히 그를 믿어주는 동료와 그의 자상함에 마음이 돌아서는 새 동료도 생겨났다. 자신도 모르는 자신을 깨닫는 것. 에이머스가 행복해지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었다. 자신을 대놓고 망가진 인물이라고 표현했지만, 꽃집에서 선물받은 꽃이 많은 위로가 되었다고 고백하는 그의 진심은 그가 얼마나 강인하고 따뜻한 사람인가를 알게 해주는 대목이었다. 내 입술은 끊임없이 중얼거렸다. 데커, 괜찮아. 데커, 힘내. 데커, 달려.


데커와 동료들이 진실에 향해 서서히 살인자를 조이기 시작할 때 침이 바싹 말라왔다. 건드릴 때마다 '허탕이다, 등신아'라고 하듯 약올리는 범죄자의 흔적만 발견했는데 이제 제대로 뭔가 건진 것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드디어 그 베일이 벗겨졌다. 에이머스 데커란 별 볼일 없는 남자에게 세상의 모든 증오를 퍼붓고 있었던 존재가 드러나게 된 것이다. 말도 안 될 정도로 어이없는 말 한마디. 그것이 한 사람에게 비수가 되어 평생의 증오를 안게 했다는 게 얼떨떨해질 정도다. 마음에서 우러난 진심으로도 상처를 줄 수 있구나. 동감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지만 그 비뚤어진 마음이 나를 돌아보게 만들었다. 진심으로 하는 말에도 상처를 입을 수 있다면, 작정하고 할퀸 말은 어떤 흔적을 남겼을까.


오감이 저릿하게 읽어댄 후에도 엔딩의 여운이 가시질 않았다. 에이머스 데커가 연방정부의 정보원으로서 활약하는 데커의 뒷 이야기가 궁금한데 어디에도 시리즈나 후편 얘기가 없다. 엔딩에 불 지펴놓고 어줍잖게 끝을 내버리는 게 말이 되나. 치명적으로 멋진 데커가 다시 활약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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