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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어디선가 시체가
박연선 지음 / 놀 / 2016년 7월
평점 :
요즘 소설 소재는 '할머니'가 대세인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프레드릭 배크만의 <할머니가 미안하다고 전해달랬어요>의 할머니만 매력적이고 특이한 줄 알았는데 <여름, 어디선가 시체가>의
할머니도 못지 않게 웃긴 여사님이었다. 62년을 함께 한 배우자의 장례식 날에도 가신 님은 묻어 두고 어디엔가 묻혀 있을 리모컨만 찾아 다녔다.
가족들이 할머니의 정신 상태를 걱정하지 않는 게 이상하지. 결국 가족들은 제단에 제물 바치듯 한 명의 여인을 산내면 두왕리에 떨궈놓고 집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그 희생양이 3수째 수능만 붙잡고 달리는 스물 한 살의 처녀 강무순이었다.
이 돈 갖고 내 아들과 헤어져 주세요같은 어려운 미션도 아니다.
할머니가 걱정되니 당분간 곁에 있으라는 미션이 뭐 그리 어렵겠나. 그러나 이건 할머니의 간호와는 거리가 멀다는 걸 하루 아침에 무순은 깨달았다.
공중파 티비조차도 제멋대로 잡히는데다 스마트폰은 시골에 와서 스마트를 벗어 버렸다. 조금 더 무거운 시계로 전락해버린 현대 과학 기술을 보고
무순은 한 가지 생각이 들었다. 이건 유배다. 확실한 유배.
몇 십년간 유배만 다니면서 저서를 집필한 정약용 선생과는 달리 우리의
무순은 지루함을 달래기 위해 여섯 살 적에 땅에 묻어놨던 보물상자를 꺼내면서 15년 전 '두왕리 네 소녀 실종 사건'을 접하게 된다. 기억나지
않는 어릴 적 친구의 실종. 그저 한 다리 건넌 남의 일일 뿐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호기심으로 나다니던 중 두왕리 일대를 장악하고 있는 경산
유씨 가문의 도련님을 만나게 된다. 외모는 훤칠한 박보검같은데 까칠하기로는 김창렬같은 존재랄까. 일명 '꽃돌이'인 이 소년은 그가 양자로
들어오고 나서 실종된 누이의 행방에 대해 의문점을 품고 있었다. 왜 타이밍이 딱 맞게 사라졌는가.
<여름, 어디선가 시체가>는 보물상자에서 발견된 목각인형
'자전거와 소년'을 실마리로 '두왕리 네 소녀 실종 사건'을 파헤치는 두 어리숙한 탐정의 이야기를 그려내고 있다. 그리고 15년 전, 묻혀버렸던
비극적인 진실들이 하나둘씩 드러나면서 모든 사건이 풀리게 된다. 물론, 사건 해결이 반드시 해피엔딩이라는 법은 없다. 누군가는 어떤 일을
행했고, 그 원인에는 결과가 따른다. 그를 받아들이든 받아들이지 못하든 인생은 꼬인채로라도 흘러가게 되어 있다. 해결이 되고나서도 전혀 기쁘지
않은 그저 슬프고 애매한 감정만 내 가슴 밑바닥에 눌러 붙어 버렸다.
가볍고 위트있는 표지로 시작된 작품은 시기를 잘 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나 평화롭고 아름다운 정경만 있을 것 같은 시골에서 하루 이틀 거리로 무섭고 흉흉한 사건이 터지는 때라면 아주 시기적절하다.
할머니라는 재미있는 캐릭터를 작가가 조금 더 살려냈으면 좋았을 걸, 하는 아쉬움이 드는 건 둘째다. 시골에서 벌어지는 흉흉한 살인 사건을
풀어헤치는 과정이 캐릭터를 따라가서 그런가 너무 어설프다. 삼수나 하는 높은 학력의 주인공이 '다임개술'이 타임캡슐인지 몰라서 물어보고 다닌다는
설정은 좀 참아내기 어렵더라. 짜임새 있는 미스터리를 기대했지만 박연선이 내게 보여준 건 여전히 '가능성' 뿐이었다.